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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설이지 말고, 페미니즘 돋보기

[90-00: 언니들의 영화] ➁짧고 강렬한, 영화

1990년대-2000년대 독립단편이 선보인 여성 서사

손희정|문화평론가 / 2020-05-21


< ZOOM IN >에서는 여성 영화, 감독, 배우, 캐릭터 등을 퍼줌만의 새로운 시각으로 들여다보고 다양한 관점에서 이야기해보고자 합니다. 여러분들도 망설이지 말고, 페미니즘 돋보기!
[90-00: 언니들의 영화] 글 보러가기
➀전환을 이끌었던 여자들: 1990년대-2000년대 한국영화와 여성영화인
➂전환기의 시대정신: 1990년대-2000년대 중반 시네페미니즘의 흐름

<세친구> 스틸컷

1990년대 문화의 시대로의 전환은 영화판에도 지각변동을 일으켰다. 새로운 여성영화 인력의 등장은 이 덕분이었다. 변화는 연출의 영역에서도 일어났다. 1990년대 중반까지 한국에서 감독으로 ‘입봉’하기 위해서는 오랜 도제식 훈련 기간을 거쳐야 했다. 이 도제 시스템은 남성 감독 중심의 남성 네트워크를 바탕으로 했고, 여성에게 별로 호의적이지 않았다. 1919년 <의리적 구토>(김도산)로 조선영화가 시작되어 1996년 임순례 감독이 <세친구>를 선보이기 전까지, 단 다섯 명의 여성 감독만이 개봉작을 낼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다. 2000년대에 장편영화를 찍는 여성 감독이 늘어난 이유에는 새롭게 열린 단편영화의 장이 있었다. 이는 감독들에게 도제 시스템 밖에서 데뷔할 수 있는 또 다른 발판이 되어주었다.

이번 글에서는 퍼플레이가 서비스하고 있는 <90-00, 언니들의 영화> 여섯 편을 중심으로 ‘여성 단편영화의 탄생’이라는 90년대적 사건에 대해 이야기해보려고 한다. 

<우중산책> 스틸컷

단편영화 시대의 시작과 임순례의 <우중산책>(1994)

한국 영화 역사에서 지금처럼 단편영화가 활발하게 제작되기 시작한 것은 30년이 채 되지 않은 일이다. 영화 관계자와 평론가들은 대체로 1994년 제1회 서울단편영화제의 개최를 단편영화 대중화의 기점으로 꼽는다. 바로 이 영화제에서 임순례 감독의 <우중산책>(1994)이 대상과 젊은 비평가상을 수상했다. 프랑스 유학파였던 임순례는 도제 기간 없이, 여균동 감독의 <세상 밖으로>(1994) 단 한 편의 조감독을 거쳐 <우중산책>으로 “‘감독’ 타이틀을 얻게”(김진국) 된다. 이어 발표한 장편 데뷔작 <세친구>(1996)가 1회 부산국제영화제 넷팩상 수상작에 이름을 올리면서 임순례는 주목받는 신인 감독으로 급부상한다. 1980년대 말 1990년대 초 당시, 영화판에서 이름을 알 만한 여성 감독은 유현목, 김호선 등 남성 감독 밑에서 조감독 생활을 오래했던 이미례 감독 한 명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확실한 변화의 시작이었던 셈이다.

1980년대까지는 사회변혁 운동과 영화운동의 일환으로 제작됐던 단편영화가 다채로워지기 시작한 배경에는 1987년 민주화 이후 넓어진 표현의 자유와 1980년대 중반에 결성된 대학가 영화동아리를 통한 예비 영화인들의 성장이 존재했다. 이와 함께 <우중산책>을 제작한 ‘청년’이나 한국 최초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의 목소리를 담은 다큐멘터리 <낮은 목소리> 시리즈를 제작한 ‘영화제작소 보임’ 같은 영상 단체들이 결성됐으며, 서울단편영화제를 비롯하여 부산국제영화제(1996),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1997), 서울국제여성영화제(1997) 등이 문을 열면서 대중과 단편영화의 접점 역시 넓어졌다.

그렇게 새로운 영화들이 출현한다. <우중산책> 역시 지금까지와는 다른 서사와 이미지로 영화계의 큰 관심을 끌었다. 지금 이 작품을 다시 보면 2020년과 1994년 사이에 존재하는 감각의 차이를 읽게 된다. 공식 줄거리는 작품을 이렇게 묘사한다. “도시 변두리의 삼류영화관 매점 점원이면서 매표원인 강정자는 서른을 넘긴 노처녀다. 오늘은 맞선 볼 남자가 방문하기로 약속한 날이다.” ‘노처녀’나 ‘맞선’이라는 표현은 영화에 등장하는 동시상영관, 삐삐, 젊은 톰 크루즈만큼이나 낯설다. 영화 자체가 민족지적 기록이 될 수 있는 것처럼 영화에 대한 설명도 그 시대상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이런 시대의 간극에도 불구하고, 영화가 공간을 구성하고 여성의 심리를 포착하며, 인물 군상을 묘사하는 방식만큼은 여전히 세련됐다. <우중산책>은 ‘작가 임순례’의 시작으로 놓쳐서는 안 되는 작품이다.

<우중산책> 스틸컷

디지털, 서울국제여성영화제 그리고 ‘여성영화’

1980년대에서 1990년대에 걸쳐 비디오와 디지털 카메라가 나오면서 영화는 훨씬 더 여성친화적인 매체가 된다. 작은 카메라가 기동성을 높여준 것은 물론이거니와, 여성의 삶 속으로 들어와 사적 이야기를 담아내는 친밀한 미디어가 되어주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여성 감독들은 <김진아의 비디오 일기>(2002)와 같은 ‘비디오 다이어리’ 형식을 비롯하여 다양한 사적 다큐멘터리를 선보이면서 사회참여적인 성격이 강했던 한국 다큐멘터리의 지형을 한층 확장시킨다. 이는 1990년대 한국 페미니즘이 “사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다”라는 모토를 통해 ‘정치적인 것’의 의미를 다시 썼던 과정과 함께 했다. 이제까지 사소한 것으로 여겨졌던 여성의 이야기가 ‘정치적인 것’으로서 스크린을 찾아왔다. 그리하여 지금까지와는 또 다른 ‘여성-우리’라는 감각이 여성들 사이에 형성되기 시작한다.

1997년 “여성의 눈으로 세계를 보자”라는 모토를 내걸고 그 시작을 알렸던 서울국제여성영화제는 본격적으로 ‘여성영화’를 소개하고 여성들이 모여 이를 함께 즐길 수 있는 친밀한 문화의 장을 열었다. 여성영화제는 1회부터 ‘단편영화 및 비디오 경선 부문’을 선보였다. 여성영화인을 발굴하고 “그 등용문이 되고자 하는 목적”(심혜경)에서였다. 3회부터는 경선 부문의 이름을 ‘아시아 단편경선’으로 바꾸고, 그 관심을 아시아 여성/감독으로 확장시킨다. 박찬옥, 정재은, 장희선, 이경미, 정주리, 전고운 등 중요한 이름들이 여성영화제 단편경선을 통해 주목을 끌었다.

여성영화제는 한국사회에서 ‘여성영화’ 그리고 ‘여성서사’의 의미를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여성감독이 여성에 대해 만든 영화’를 상영작의 기본조건으로 삼고 있었지만, 그것이 필요충분조건은 아니었다. 단순히 여성이 만들거나 주인공인 영화를 넘어서, 페미니스트 의제를 담고 있을 때, 혹은 풍부한 담론을 만들어낼 여지가 있을 때, 그리하여 페미니스트 의제의 의미망을 형성할 수 있을 때, 영화는 비로소 ‘여성영화’로 규정되었다. 초창기 여성영화제가 운동성을 강조하는 ‘비디오 액티비즘’과 ‘여성영상공동체’에 무게 중심을 두었던 이유다.

<고추말리기> 스틸컷

2회 우수상 수상작이었던 장희선의 <고추말리기>(1999)는 1990년대 페미니즘 영화의 특징을 볼 수 있는 흥미로운 작품이다. 영화감독을 꿈꾸는 희선은 집에서 빈둥거린다. 사업을 하는 열정적인 여성인 희선의 어머니 설정원은 ‘살찌고 게으른’ 딸이 못마땅하다. 한편, 희선네 가사를 도맡아 하는 할머니 최천수는 밖으로만 나도는 며느리 설정원이 불만이다. 이런 여자 삼대가 어느 늦여름, 고추를 옥상에 널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장희선 감독은 할머니와 어머니를 직접 출연시키고, 자신의 역할에는 배우 박준면을 캐스팅한다. 카메라 뒤에 있으면서도 동시에 앞에 있는 존재로서, 여성 감독은 자신의 위치를 유연하게 바꾸면서 ‘사적’인 이야기를 ‘공적’ 장으로 꺼내온다. 지금까지는 일기장에나 은밀하게 적혔을 법한 이야기들이 ‘우리들의 이야기’로 들려올 때, 그 이야기는 ‘여성-우리’라는 공통의 감각을 만들어 낸다. “뭐 이따위 걸 영화로 찍느냐”고 말하는 어머니와 할머니 세대는 이해할 수 없(거나 뒤늦게 이해하게 되)는 다른 세대의 여자들, 페미니즘 시대의 여자들의 탄생인 셈이다.

<목욕> 스틸컷

그러나 이 ‘우리’라는 감각이 배타적인 범주였던 건 아니다. 여성영화제는 다른 국제영화제들과는 구별되는 프로그래밍을 통해 ‘(남성)영화’와는 다른 ‘여성영화’를 고민하고 고안하는 동시에 여성 내의 다름을 충분히 사유하고자 했다. 여성영화제 상영작은 아니지만, 이미랑의 <베트남 처녀와 결혼하세요>(2004)와 <목욕>(2007)은 그런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전자는 결혼이주여성의 매매혼 문제를, 후자는 트랜스젠더 여성에 대한 공감과 이해를 그리면서 2000년대에 소수자의 가시성을 확보하는 도구로서의 여성영화의 정치성과 가능성이 어떻게 상상되었는지 가늠해 볼 수 있도록 이끈다.

<물안경> 스틸컷

<귀걸이> 스틸컷

영화학교 그리고 ‘단편영화’라는 제도

다른 한편에서는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을 비롯하여 중앙대, 동국대, 한국영화아카데미 등 영화학교의 부상, 1998년 한국독립영화협회의 창립, 미로비전과 인디스토리 같은 독립영화 배급사 설립, 영화진흥위원회의 제작지원 프로그램 확대 등이 단편영화의 장을 성장시키는 배경이 되었다. 2000년대 초, 한국독립단편영화가 “제도적 지원(교육기관과 영화진흥위원회 제작지원)과 산업적 지원(배급망과 상영 시스템 구축)이라는 이중의 후원 아래 축복의 항해를 시작”(문학산)했다는 평가를 받았던 이유다.

이수연의 <물안경>(2000)과 김보라의 <귀걸이>(2003)는 이런 조건 속에서 등장한 작품들이다. 두 감독 모두 영화학교의 제도교육을 받은 신진 감독으로서, 여성의 이야기를 ‘웰메이드’로 담아내는 ‘만듦새의 성취’를 보여준다. 이 영화들에서 발견할 수 있는 여성의 내밀한 기억과 욕망을 스크린으로 옮기는 대담함은 페미니즘 문화운동의 물결 속에서 등장한 ‘여성영화’의 자양분 속에서 움튼 예술성이지만, 그것을 유려한 영화언어에 담아내는 감각은 영화학교를 포함한 한국 단편영화 제도의 자양분 속에서 움튼 자질이다. 특히 이수연 감독의 장편 데뷔작 <4인용 식탁>(2003)이 선보이는 한국 근대성을 비판하는 예리한 시선과 영화 언어의 수려함은 이런 다층적인 토양의 중첩 위에서 가능한 것이었다.

물론 2000년대 중반, 이렇게 ‘웰메이드’가 단편영화의 주류가 되었을 때, 페미니스트 아방가르드 실험 정신이나 페미니스트 비디오 액티비즘의 정치성을 어떻게 지켜갈 것인가는 중요한 문제로 대두되었고, 이 과제는 여전히 우리 앞에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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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김진국, 「무네미고개 넘던 산골소녀, 유럽을 넘는 영화감독으로」, 《황해문화》 84호, 2014.

-문학산, 「비우는 화면과 비워진 역사: 한국독립단편영화의 경향과 역사」, 『한국 단편영화의 쟁점들: 작가, 여성, 디지털』, 도서출판 소도, 2003.

-서울국제여성영화제 기획, 심혜경 책임편집, 『제 10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 기념 백서: 여성, 영화, 그리고 축제!』, 서울국제여성영화제, 2008.

-한국영화100년기념사업추진위원회 엮음, 『한국영화 100년 100경』, 돌베개,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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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 리부트>, <성평등>, <다시, 쓰는, 세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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