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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혜의 영화산책] 모든 것은 ‘지금’과 ‘이후’ 그 사이에 있다

미아 한센 러브 <다가오는 것들>

정지혜|영화평론가 / 2021-03-18


슬렁슬렁 힘을 빼고 산책하듯, 여성 감독의 영화 세계를 정지혜 평론가와 함께 거닐어봅니다. 그가 안내하는 산책로를 따라 가끔은 여성영화라는 휴식처에서 잠깐 쉬기도 하며, 미처 알지 못했던 또는 놓쳤던 세계의 구석구석을 관찰하고 또 사색해보시길.

〈다가오는 것들〉 스틸컷

0.
갑작스레 찾아온 몸의 통증 때문일까. 1년 넘게 계속된 코로나 탓일까. 지난겨울 내내 ‘다가오는 것들’을 생각했다. 병듦과 늙음, 상실과 죽음, 빈곤과 무력, 단절과 고립……. 나열하고 보니 하나 같이 상승의 기류보다는 쇠락의 기운이 짙은 상태를 설명하는 말들이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누구나 살면서 각자의 역사 속에서, 어떤 시기에 한 번쯤은 맞닥뜨리게 될 난제들일 것이다. 그러니 호들갑 떨 것 없다고, 별일 아니라고, 이 또한 지나갈 것이라고 덤덤히 넘기고 모른 척하고 싶지만, 어느 땐 저 쇠락의 상태가 지금 당장의 현실을 압도해버릴 것처럼 거대하게 느껴진다. 생의 불가사의하고 불가해한 강력한 힘이 잡아당기는 듯할 때, 그 힘에 속수무책으로 이끌리는 듯할 때가 있다. 특히 점점 더 나이 들어가고 있음을 자각하는 여성은 다가오는 것들 앞에 서 쉬이 갈피를 잡지 못한다.

1.
불안의 밤, 미아 한센 러브의 영화를 생각한다. 예전에 봤을 때도 좋았지만 <다가오는 것들>(2016)은 지금 다시 봐도 감동적이다. 미아 한센 러브가 이 영화의 시나리오를 쓰던 때는 30대 초반. 그 시기는 그의 필모그래피에서 가장 이질적인 세계를 그린 듯 보이는 <에덴: 로스트 인 뮤직>(2014)을 만들 때와 절묘하게 겹친다. 1990년대 프랑스 EDM 문화 속 청춘의 얼굴을 주목했던 <에덴: 로스트 인 뮤직>과 인생 후반기로 접어든 나이 든 여자의 초상인 <다가오는 것들>은 극적인 대비처럼 보이면서도 태생적으로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짝패처럼 읽히는 것이다. 미아 한센 러브는 10대 시절부터 줄곧 여성으로서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위태롭고 불안정한 조건 위에 있는지, 여성으로서 홀로 살아간다는 건 또 얼마나 큰 불안을 낳는지에 관해 두려움을 느껴왔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로부터 온 감각이 창작의 원료가 돼 준 듯 그의 영화 속 여성들은 ‘홀로 된다는 것’에 존재론적 불안을 느끼곤 한다. 그럼에도 미아 한센 러브의 영화 속 여성들은 그 불안에 압도돼 인생을 송두리째 잃거나 내팽개치지 않는다. 그들은 어떻게든 계속해서 다시 또다시 살아갈 것이다. <다가오는 것들>을 만들 때 미아 한센 러브의 머릿속을 지배한 하나의 이미지를 떠올려본다. 주인공 여성이 창문을 열어젖히고 불어오는 모래바람에 온몸을 내맡긴 빅토르 셰스트륌의 <바람>(1928)의 한 장면. 거센 바람을 맞는 여자를 보며 강렬한 해방의 기운을 느끼는 동시에 자기 앞의 생을 오롯이 감당하고 서 있는 여자의 존재감을 오랫동안 잊지 못했다는 미아 한센 러브. 광풍이 만든 자유로움과 거친 기운, 그것을 자유라고 느끼면서도 버티는 것. 얼핏 모순되는 이 이중의 상태가 미아 한센 러브의 영화에서도 동시에 발생할 때 어떤 감흥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다가오는 것들〉 스틸컷

2. 
<다가오는 것들>에는 파리의 고등학교에서 철학을 가르치는 50대의 나탈리(이자벨 위페르)가 있다. 그는 지금 자기 앞에 다가오는 것들과 정면으로 마주해야 한다. 여러 문제 가운데 가장 직접적이고 명징한 것은 다른 사람이 좋아졌다고, 그 사람과 살겠다는 남편의 고백일 것이다. 여기에 더해 나이 들고 병든 엄마를 온전히 감당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모른 척할 수도 없는 딸로서의 책무가 나탈리를 버겁게 한다. 젊음은 이미 지나간 지 오래고, 학문적 성과나 반응도 예전 같지 않으며, 세상은 빠르게 변하고 있다. 평생 철학적 사고와 질문에 둘러싸여 살아왔건만 어째서 제 삶의 질문에는 쉬이 답할 수 없는가. 역설과 딜레마가 나탈리의 일상을 침범한다. 그런 그녀에게 약간의 환기가 돼주는 건 젊은 제자 파비앙(로만 코린카). 고교 시절 나탈리에게서 철학적 자극을 받았다는 파비앙은 이제 나탈리보다 훨씬 더 급진적인 방식으로 철학적 연구를 이어가며 철학과 실천적 합일을 지향하며 산속 공동체를 만들어 동료들과 새로운 삶의 대안을 찾은 듯 보인다. 남편과의 결별, 각자의 삶을 꾸린 장성한 자식들, ‘죽을 날만 기다리는 냄새’로 가득한 요양원에서 하루하루 늙어가는 엄마. 누군가와 깊이 있는 내면의 대화를 나눌 기회조차 없는 나탈리에게 파비앙은 여전히 철학적 대화와 질문을 가능하게 하는 유일한 존재다. 물론, 나탈리는 잘 알고 있다. “나는 자유를 되찾은 거야, 온전한 자유”라고 말하면서도 “급진성을 논하기엔 너무 늙어”버린 그녀 자신을.

3.
미아 한센 러브의 세계에서 인물들은 갑작스러운 관계의 단절과 상실을 경험한다. 죽음과 같은 극단적인 방식이기도 하고 (<내 아이들의 아버지>(2009)), 예기치 못한 방식으로 소중한 사람 곁을 떠나거나 오래 자리를 비우는 경우도 있다. (<모두 용서했습니다>(2007), <안녕, 첫사랑>(2011)) 영원히 계속될 것만 같던 관계는 원치 않은 방향으로 급선회하고 그 달라진 흐름과 기류 속에서도 여성들은 생의 무게를 무던히 감내한다. 그렇기 때문일까. 미아 한센 러브는 자신의 영화에 ‘시간이 흐르고 있다’는 명백한 사실을 숨기지 않고 강하게 드러낸다. 플래시백으로 시간을 거스르는 일 하나 없이 연대기적으로 흘러가는 시간은 때때로 ‘몇 년 후’라는 자막과 함께 껑충 점프하기도 한다. 그의 표현대로, 영화 곳곳에 거대한 시간의 구멍, 블랙홀, 틈새가 있다. 그는 이 틈을 메우거나 공백의 시간 동안 과연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를 설명할 마음이 없다. 아무리 많은 정보로 그 공백을 채운들 공백의 시간을 온전히 설명할 수 없다고 믿기 때문이다. 시간이 흐르는 것과 별개로 흐르는 시간 속에서 모든 것을 알 수 없다는 것, 바로 거기에 미아 한센 러브가 이해한 삶의 불가해함과 지속이라는 미스터리가 있다. 그사이 그의 카메라는 부단히도 움직인다. 이때의 움직임은 인물들을 앞서지도 않고, 인물들이 당도할 곳에 미리 도착해 있지도 않으며, 관객인 우리의 눈보다 먼저 영화의 행방을 인도하지도 않는다. 그의 영화에서 전지적이고 전능한 카메라의 자의적 움직임은 발견할 수 없다. 움직이는 인물을 일정한 거리를 두고 따르되 놓치지 않으려 주시하고, 인물들이 그들만의 시간을 보낼 때는 가만히 뒤로 물러날 줄도 안다. 여기에 미아 한센 러브가 세상을 이해하는 시선의 철학이 읽힌다. 삶은 언제나 우리 보다 앞선다. 우리가 인지하기도 전에 시간은 이미 흐르고 우리는 그 시간보다 항상 뒤늦게 당도한다. 이미 벌어진 사건과 이후에 비로소 우리 앞에 다가오는 것들. 미아 한센 러브의 시선은 언제나 그것을 향해 있다.

〈다가오는 것들〉 스틸컷

4. 
“위급한 일을 당해 절박한 심정으로 허둥지둥할 때 우리는 ‘시간’이 없다. 오직 문제와 엉킨 채 우리를 삼켜버린 ‘지금’만이 있다. ‘지금’은 뒤엉킨 힘의 덩어리다. 지금이 삼킨 시간의 지평은 광활하다. ‘지금’에 휘말린 자에게 10년 후는 100만 년 후, 혹은 20분 후와 다르지 않다. 절박한 ‘지금’은 미래에 속하는 것으로 막연히 여겨지던 시간의 윤곽들을 게걸스럽고 흉측하게 빨아들여 버린다. 이것이 바로 메시아적 시간이다. 지금이라는 종말. 지금 바로 해결해야 한다는 요구. 우리에게 더이상의 시간이 없다는 인식.” (『은둔기계』, 김홍중, 문학동네, 2020, 48쪽)

“이후(以後)가 모든 것이다.”
“존재한다는 것은 이전이 아니라 이후를 갖는 것이다.”
“이후로의 움직임 속에서 모든 것이 생성된다. 이전에 있던 것은 이후에 있는 것으로 변형되어야 한다. 이전에서 이후로 가는 것은 소실, 변형, 창조의 과정이다. 어떤 것도 이 과정으로부터 면제되지 않는다” (위와 같은 책, 321쪽)

5.  
미아 한센 러브의 영화로 ‘지금’과 ‘이후’ 그 사이의 시간을 겪고 느낀다. ‘지금’에 휘말리지 않기, ‘이후’의 것들과 그 당도를 담담히 감당하기. 불안의 밤, 미아 한센 러브가 그리는 세계, 그의 시선 속에서 잠시 머물기를 자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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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디다큐페스티발 집행위원, 영화웹진 리버스 필진, 2018 부산국제영화제 한국단편 예심 진행, 공저 『아가씨 아카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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