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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시내의 안부묻기] 이야기 듣기와 이야기 하기, 배우 김혜수의 어떤 순간들
손시내|영화평론가 / 2021-02-18
“잘 지내고 있나요?” 손시내 평론가가 여성 영화인들을 향해 건네는 따스한 인사. 오래된 앨범을 넘겨보듯 애정 어린 시선으로 영화와 캐릭터를 들여다보고, 잊고 있었던 혹은 기억해야 할 이름들에게 안부를 묻습니다. ‘여성’과 ‘영화’를 오가는 이야기들 사이 사이 손시내 평론가가 전하는 ‘안녕’들을 포착해보시길. |
〈국가부도의 날〉 스틸컷
올해로 35년, 김혜수가 배우로서 살아온 시간이다. 급하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느긋하다고도 할 수 없는 걸음으로, 그는 영화와 드라마를 부지런히 오가며 아직 꺼내 보이지 않은 얼굴과 오래 단련된 능숙하고 노련한 몸짓을 여전히 영상 매체 속에 새겨 넣고 있다. 아마 그 필모그래피를 잘 정리하기만 해도 든든한 글이 하나 나올 것이다. 혹은 관점에 따라 그가 연기해온 인물 유형, 매혹의 지점, 배우가 다종다양하게 섭렵해온 스타일의 역사 같은 것들을 되짚어보는 재미난 글을 쓸 수도 있겠다. 장르의 틀 안팎을 넘나들고 여성 캐릭터의 전형과 위치를 갱신해온 경로도 흥미롭다.
최근엔 기민함과 신뢰감이 퍽 눈에 띈다. 드라마 <시그널>(2016)의 차수현이나 영화 <국가부도의 날>(최국희, 2018)의 한시현 같은 인물은 캐릭터의 직업적 전문성을 과장하지 않으면서도, 주어진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일하고 그 과정의 괴로움을 감당하며 자신의 책임을 무겁게 받아들이는 이들이다. 언젠가부터 인간적 결함을 과시적으로 바닥에 깔고 사이다 같은 정의를 부르짖는 유형의 소영웅들이 미디어를 장악하기 시작했는데, 김혜수의 여자들은 그와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번민하며 서서 필요할 땐 민첩하게 움직이기에 반갑고 믿음직스럽게 느껴진다. 특히 앞서 언급한 차수현과 한시현은 픽션적 틀 안에서 창조된 인물이지만, 미디어가 상상하는 한국 현대사 속 현실적이고 전문적인 여성의 초상을 넓혔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물론 그는 여전히 누아르와 코미디의 세계 또한 부단히 누비며 쓸쓸하면서도 강렬한 표정과 특유의 기분 좋은 웃음소리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들려주고 있다.
〈내가 죽던 날〉 스틸컷
기민함을 떠올렸던 건 지난해 말 개봉한 <내가 죽던 날>(박지완, 2020)의 현수 때문이다. 영화의 중심 사건과 제목의 의미를 압축한, 비바람이 부는 절벽 위에 선 소녀의 모습을 담은 오프닝이 지나고 나면 영화는 화면 가득 현수의 눈을 클로즈업하며 본론으로 들어간다. 태풍이 몰아치는 섬의 풍경을 닮은 눈물이 차오른 얼굴은, 그러한 표면적 정황이 무색하게도 한껏 메말라 있다는 말로밖에 표현할 수 없는 모습이다. 물기 가득한 마른 얼굴, 그것이 <내가 죽던 날>의 현수를 이를만한 표현이다.
몇 가지 제시되는 상황을 종합할 때, 이 인물은 지금 정상적인 궤도에서 약간 비껴나 있는 상태다. 그는 경찰이지만 징계를 받을만한 사고로 인해 잠시 일을 쉬었고, 유능한 변호사라는 남편과는 이혼 소송을 앞두고 있다. 어디서부터 무엇이 잘못된 건지 끊임없이 복기를 해봐도 아직은 매 순간이 모호하고 멍할 때가 많은 상태, 그러한 상황에서 정식 복귀를 앞두고 수사 종결 보고서를 작성하는 것이 지금 이 인물에게 주어진 일이다. 비리를 저지른 아버지와 사고를 치고 감옥에 있는 오빠를 둔 세진(노정의)이라는 아이가 증인 보호 차원에서 섬에 보내졌는데, 태풍이 섬을 강타하던 날 벼랑에서 스스로 몸을 던졌다는 것이 사건의 골자로, 현수는 사건의 형식적인 마무리를 맡게 된 셈이다.
〈내가 죽던 날〉 스틸컷
다시 괜찮아지기 위해서 자신의 직업적 세계에 복귀하려는 그는 배를 타고 섬에 들어가 마무리를 위한 조사를 시작한다. 섬사람들을 만나고 자료를 재검토하며 세진이 남긴 물건을 정리하는 일련의 동작은 직업인으로서 몸에 밴 효율적이고 정확한 몸짓이다. 삶의 많은 부분이 흔들리는 여자인 것과 눈앞에 주어진 일을 제대로 수행해내는 것 사이에는 물론 어느 정도의 상관관계가 있겠지만, 그것이 마냥 한데 뭉쳐 뭉뚱그려지지 않는다는 점이 현수라는 인물을 그리는 흥미로운 점 중 하나다. 그런데 앞서 말한 기민함이 단지 이것만을 이르는 건 아니다.
사건의 중심에 좀 더 깊게 다가가면서, 현수의 감정적 기민함이 영화에서 일종의 동력이 된다. 영화는 섬에서 지내던 세진의 나날들과, 섬과 도시를 오가는 현수의 현재를 교차시킨다. 경찰이 세진을 주요 증인으로 여겼던 데에는 세진이 아버지의 비밀스런 자료를 가지고 있거나 알고 있을 거라는 판단이 작용했기 때문이었다. 한편 실종이든 사망이든 세진이 사라진 지금에 와서 중요한 것은 수사의 종결인데, 현수는 표면적으로 그 업무를 수행하면서도 이 아이가 어떤 삶을 살았고 어째서 죽음을 선택했는지를 궁금해한다. 남아있는 건 세진이 사용하던 물건과 그의 모습이 담긴 CCTV 화면뿐. 폐쇄회로 카메라를 노려보는 세진의 얼굴을 현수는 이따금씩 물끄러미 쳐다본다. 단지 그가 알고 있을지도 모르는 비밀에만 관심이 있을 뿐, 누구도 세진의 이야기는 궁금해하지 않는 세상에서, 현수는 바로 그 이야기 자체를 궁금해하는 사람이다. 그러한 예민함은 또다시 누구도 묻지 않았던 순천댁(이정은)의 이야기에로 현수를 데려다준다. 세진의 삶을 돌보고 자신만의 방법으로 섬 바깥의 세상을 세진에게 선물해준 순천댁. 현수는 CCTV 화면 속 세진에게서 자신의 표정을 보듯이, 별다른 말 없이도 순천댁이라는 사람이 어떤 인물인지를 알아본다.
〈내가 죽던 날〉 스틸컷
영화는 주인공인 현수를 따라 주된 시간과 공간을 옮겨가고, 그의 얼굴과 독백하는 목소리에 많은 부분을 기대고 있다. 그렇지만 이 영화에서 그의 얼굴과 목소리는 존재감을 마구 뿜어내는 것이기보다는 타인의 이야기와 목소리를 흡수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는 감춰진 증거를 찾아내고 진실을 밝혀내는 수사물의 문법에서 비껴나 있지만, 타인의 존재에 힘껏 반응하고 삶을 발견하고 누군가를 구하는 서사를 쓴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결국 현수 자신의 삶까지도 변화시키고 구해낸다. 그 중심에서 여전히 새로운 얼굴과 목소리를 보여주는 김혜수는 또다시 알맞은 자리에 이르러있는 것 같다.
〈이층의 악당〉 스틸컷
이야기라는 테마 때문인지, 현수를 보고 나서는 <이층의 악당>(손재곤, 2010)의 연주를 떠올리게 됐다. 어쩌면 현수와 정말 먼 곳에 있을 인물인 연주 씨, 그는 애정을 품을만한 독특한 캐릭터임에도 그리 자주 말해지지는 않았던 것 같다. 코미디이자 범죄물인 <이층의 악당>은 사고로 남편을 잃고 사춘기 딸과 함께 매일을 짜증과 우울과 히스테리로 보내는 여자와 그 여자의 집에 세 들어 살 게 된 남자의 사연을 담는다. 그런데 그 남자 창인(한석규)은 사실 그 여자, 연주의 집에 숨겨진 값나가는 작은 찻잔을 훔치기 위해 그 집에 온 것이다. 실은 골동품 밀매상이지만 자신을 작가라고 속이고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는 창인과 아무것도 모른 채 자꾸만 그의 걸림돌이 되는 연주, 둘 사이에 언젠가부터 생겨나는 묘한 기류, 어느 정도는 예상 가능한 서사의 궤도는 세밀하게 묘사된 현실적인 코미디로 인해 익살스럽게 굴곡지기 시작한다.
하루 이틀 정도 집에 머물면서 모녀의 눈을 피해 찻잔만 얼른 훔쳐 나가려던 창인의 계획은 번번이 어그러진다. 그러는 데에는 연주의 의심과 짜증과 화 같은 것들이 영향을 주는데, 영화의 재미도 그로 인해 벌어지는 상황, 인물들의 대사와 반응 같은 것들로부터 나온다. 연주는 그 자신도 표현하듯 전형적인 히스테릭한 ‘과부’ 캐릭터이지만, 그가 주는 웃음이란 것이 전형성이나 우스꽝스러운 희화화로부터 비롯되는 건 아니다. 어떠한 필터도 거치지 않는 솔직한 말들은 오히려 세상이 이런 유형의 여성을 그간 어떤 틀 속에서 봐왔는지를 드러내기에 웃음을 터뜨리게 한다. 한편 차라리 이 로맨스를 이용해먹자는 생각에 고군분투하는 창인에게 연주는 자기 이야기를 털어놓고 싶다. 세상 아무도 내 이야기는 궁금해하지 않는 것 같은데, 이 남자는 내 이야기를 듣고 그걸 소설로 쓴다고 하니, 어디 다 털어놔 보자는 마음이다.
〈이층의 악당〉 스틸컷
그러니까 이 영화는 두 가지 행동이 얽히면서 빚어내는 재미로 인해 앞으로 나아간다. 한쪽에는 무언가 훔치려는 창인이 있다. 그리고 다른 한쪽에는 내 이야기를 하고 싶고, 우울과 분노를 표출하고 싶고, “되고 싶은 것도 많았고 하고 싶은 것도 많았”던 지난날을 더는 슬프게만 기억하기 싫은 연주가 있다. <내 아내의 모든 것>(민규동, 2012)의 정인(임수정)을 떠올리게도 하는 이 인물은 어쩌면 여성의 경험과 감정과 이야기를 온전히 듣고 담지 못하는 서사 예술의 한계를 은연중에 일러주고 있는 건 아닐까. 깔깔 웃다 보면 씁쓸하게도 그런 생각이 뇌리를 스치곤 한다. 물론 연주 씨는 그런 정황들 앞에서 갑자기 정색하며 문제점을 또박또박 말하는 사람은 아니다. 그저 최선을 다해 솔직하고, 부대끼는 감정을 모조리 말해버린다. 들어준다고 해놓고 자기 생각만 떠벌리는 ‘우리나라 아저씨들’을 입 다물게 하면서 말이다.
〈내가 죽던 날〉 스틸컷
배우 김혜수가 연기하고 표현해낸 다양하고 폭넓은 인물 중 극히 일부만을 말했을 뿐이지만, 그것만으로도 나름의 이야기를 떠올리고 선을 그어보게 된다는 점이 흥미롭게 느껴진다. 자기만의 존재감을 뿜어내기를 넘어서 넉넉하게 품을 벌려 타인의 사연과 이야기를 안아주고 흡수하는 얼굴, 세상이 듣기를 거부하는 이야기는 온몸으로 표현해내는 몸짓, 그 모두를 두루 넘나드는 목소리, 2021년 지금 배우 김혜수를 떠올릴 때 생각나는 몇 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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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한국영화평론가협회 영평상 신인평론상 수상, 영화웹진 리버스 필진, 한국독립영화협회 비평분과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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