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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아름의 잠시, 다시] 여성 영화(인)들의 증명의 서사, 이제야 도착했음에도

송아름|영화평론가 / 2021-01-14


송아름 평론가가 ‘또 다른 눈’으로 여성영화를 들여다봅니다. 지금보다 더 많은 여성의 이야기를 바라며, ‘잠시’ 멈춰 생각하고 ‘다시’ 또 생각합니다. 때로는 냉철하게 때로는 사려 깊게,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이야기.

〈벌새〉 김보라 감독, 디렉터스컷 어워드 ©다음영화

최근 4-5년간 한해 새롭게 주목받은 신인감독상 수상자 명단에 여성 감독들이 연이어 이름을 올렸다. <이태원>의 강유가람, <우리들>의 윤가은, <소공녀>의 전고운, 또 <벌새>의 김보라, <남매의 여름밤>의 윤단비 감독 등과 덮어뒀던 생리나 고부갈등, 여성의 노동, 꾸밈의 문제 등과 같이 마땅히 이야기되었어야 했지만 많은 이들이 사소하다 치부했던 소재들을 현실의 삶으로 풀어낸 여성 감독들도 도드라졌다. 이들은 영화가 다양한 이야기를 흘러넘치도록 할 수 있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었고, 국내 관객들뿐만 아니라 해외에서도 많은 관심을 받으면서 중요한 경향으로 설명되었다. 당연히 이에 대한 언론의 관심이 쏟아졌다. 여성 감독과 그들의 작품이 부상하는 것에 대해 많은 기사와 방송이 앞다투어 글과 인터뷰를 실어댔고 그만큼 이 경향은 매우 중요한 것으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한 가지, 이는 매우 큰 오해를 낳을 수 있다는 점에서 천천히 되돌아봐야 하지 않을까 싶다. 이들이 만들어간 이야기가 갑작스레 등장한 것처럼 호들갑을 떠는 것은, 그리고 그들의 작품을 세세하게 살피는 것보다 ‘여성’ 감독의 등장에 방점을 찍는 것은 마치 이들이 등장한 지금 영화계의 중심이 변화한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들〉 윤가은 감독, 최수인 배우, 베를린국제영화제 ©다음영화

단언컨대 여성 감독들의 약진은 영화계의 변화와는 상관없는 몇몇의 끈질긴 집념과 관객들이 만들어 낸 드라마이다. 이들의 약진이 이례적이라는 것은 반대로 말해 한국영화의 중심, 즉 수많은 상영관을 확보할 만한 이야기가 따로 있으며 그것에 따랐을 때에만 관객수를 올릴 수 있을 것이라 믿는 판 안에서 현재 여성 감독들이 하고 있는 이야기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실제로 이 영화들은 제작에 착수하는 데에만 상당한 시간이 걸렸으며, 개봉을 한 후에도 많은 수의 상영관을 확보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상영 기간도 짧아 작정하고 찾아가지 않으면 극장에서 결코 만나지 못할 작품들이었다. ‘메인’에 걸리지 못할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는 것은 관객들이 몇 안 되는 상영시간에 맞춰 극장을 찾아가는 불편함을 무릅쓰고서라도 객석을 채웠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현재 여성 감독들의 이야기가 주목받는 데에는 어떠한 영화적 기반도 뒷받침되지 않았다.

현재 영화인들이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단체들이 운영되고는 있지만 이것으로 아직 영화적 기반을 설명하기는 힘들다. 정말, 아주, 진짜 최근에 와서야 여성 영화인들이 목소리를 낼 수 있는 단체가 꾸려졌지만 영화의 제작 자체에 도움을 주는 것은 아직 계획을 통한 시도의 단계에 있을 뿐이다. 여성 영화인들에 대한 지원이 마련되기까지 제도권 내 정책의 설정을 위해 노력해온 이들의 활동은 영화진흥위원회(이하 영진위) 내 한국영화성평등 소위원회와 한국영화성평등센터 ‘든든’이 세워지는 것으로 이어졌는데, 영진위의 지원으로 든든이 공식화된 것은 2018년 3월, 소위원회가 만들어진 것은 2018년 9월의 일이었고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이는 영화계 내에서 여성 영화인들의 ‘보호’가 먼저였다는 것을 보여준다.

한국영화성평등센터 든든 로고 이미지 ©든든

이 단체들의 설립 역시 따져 보아야 한다. 이는 오랜 시간과 노력을 들인 것만으로 당연하게 생긴 것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지금까지 여성 영화인들이 얼마나 열악한 환경에 있었는지에 대한 ‘증명’이 필요했다. 2017년에야 ‘처음으로’ 영화계 내 여성 영화인들에 대한 조사를 바탕으로 한 여러 통계산출이 시작되었고, 이들이 당해왔던 각종 차별, 그리고 약 10퍼센트에 불과한 여성 영화인들의 활동이 집계됐다. 이 조사는 임순례 감독이 1996년 <세친구>로 데뷔한 것이 1919년부터 따져 6번째 여성 감독의 장편영화라는 뻔한 척박함에도 불구하고 한국영화 역사 100년에 가닿아서야 이뤄진 일이었다(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영화진흥위원회 편, 월간 《한국영화》, 2018년 11월호, 22-33면; 조혜영 책임연구, 「한국영화 성평등 정책 수립을 위한 연구」, 영화진흥위원회, 2020 참조). 이와 함께 앞서 언급한 여성 감독들과 그 작품들이 관객을 끌어 모은 것도 여성 영화인들의 가치를 ‘증명’하는 방법의 하나였을 것이다. 이 새로운 이야기의 소구력은 영화를 넘어 여성 영화인을 지원할 수 있을 만큼의 가치를 가진 것으로도 인식될 수 있었을 테니까. 

한국영화성평등센터 든든과 영화진흥위원회가 2018년 10월 9일 개최한 ‘한국영화 성평등 정책 포럼’ ©영화진흥위원회

그러니까 여성 영화인들에 대한 관심과 그에 대한 지원은 이렇게 오랫동안 온 힘을 다해 보여주고 난 후에 쟁취한 결과이다. 부족분을 채우려 당연하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 너무도 긴 시간 끊임없는 피로와 피해, 그리고 배제를 겪은 후 이제야, 여성 영화인들의 이야기가 중요하다는 것을 증명해 낸 지금에 와서야 지원의 영역으로 들어간 셈이다. 그러나 지금 여성 영화에 대한 관심이나 지원 등을 마치 갑작스레 혹은 유행에 따른 결과인 듯 부각시키는 것은 이 긴 증명의 시간과 크게 바뀌기 힘든 이후에 대해 잊게 한다. 여성 감독들의 영화가 작은 영화의 영역에서 언급되는 것은 사실 선택이 아닌 필연이다. 이러한 이야기들이 소위 ‘대박’이 난다 해도 이들이 그 이후의 작품을 더 쉽게, 그리고 더 크게 찍을 수 있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한 손으로 꼽을 때조차 관객을 더 많이 만날 수 있는 영역에서 차기작의 기회를 얻는 여성 감독의 이름을 미처 다 채울 수 없는 현실은 이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2020년 양성평등주간 공식 행사 '벡델데이 2020' 포스터 ©한국영화감독조합

그러나 억울함을 앞세운 말들을 등에 업고, 사실상 지원이라기보단 보호를 위해 만들어진 지원책들조차 여성 영화인들이 엄청난 기득권을 갖게 된 것처럼 부풀려진다. 여성 서사를 지원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표현의 자유 침해로, 여성 영화인들의 숫자를 늘리는 것은 역차별로 늘 비슷한 비난이 따라붙으며, 지원을 받기 위해 영화계가 한쪽으로 편중될 것이니 이는 곧 한국영화 발전에 적합하지 않다는 비약으로까지 이어진다. 여기에는 여성 서사라는 것이 그저 여성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이야기하는 것으로 한정하는 몰이해뿐만 아니라 누구나 쉽게 그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오만함까지가 들러붙어 있다. 게다가 이러한 시각은 관객들이 여성을 앞세웠던 영화들에 대해 무조건적인 옹호가 아닌 분명한 판단과 시각을 가지고 평가해왔다는 점까지도 무시한다. 여성 서사가 없어 ‘표현이 자유가 보장’되는 동안 한국영화에 얼마나 다양한 영화가 나왔는지 10퍼센트도 안 되는 여성 영화인들에 대한 지원이 역차별이라면 왜 한 성별이 90퍼센트를 차지하는 동안 역차별을 이야기하지 않았는지 모르겠지만, 여성 영화인들은 그 어떤 것도 당연하게 받아본 적 없으며, 앞으로도 그럴 확률은 없다. 이들에 대한 지원이 기득의 문제가 아니라 생존인 이유,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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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한국영화평론가협회 영평상 신인평론상 수상,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시네마 크리티크 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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