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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아름의 잠시, 다시] 당신들은 힘들지 않나요?

송아름|영화평론가 / 2020-12-10


송아름 평론가가 ‘또 다른 눈’으로 여성영화를 들여다봅니다. 지금보다 더 많은 여성의 이야기를 바라며, ‘잠시’ 멈춰 생각하고 ‘다시’ 또 생각합니다. 때로는 냉철하게 때로는 사려 깊게,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이야기.

〈국제시장〉 스틸컷

영화 <국제시장>(윤제균, 2014)의 한 장면. 피난 중 막둥이 동생을 잃어버리고 울고 있는 아들 덕수(황정민)에게 아버지는 자신의 옷을 벗어 덮어주며 이야기한다. “내 없으면 장남인 네가 가장인 거 알지? 가장은 어떤 일이 있어도 가족이 제일 우선이다. 알았지? 시방부터 네가 가장이니 가족들 잘 지키라.” 고작 7살 남짓 되었을 아이에게 아버지는 ‘가장(家長)’이라는 짐을 지웠다. 아들인 네가 가족을 지킬 유일한 사람이라는 지시는 이 아이가 학교를 포기하게 했고, 파독 광부로 가게 했으며, 베트남 전쟁에 참전하게 했고, 이 힘듦을 등에 업은 잔소리와 독선으로 가족들과 멀어지게 했다. 나이 든 덕수는 외로워졌지만 아버지가 자신에게 맡긴 임무를 수행하고 ‘이만하면 잘 살았다’는 것에 스스로를 위로한다. 그리고 한 마디를 덧붙인다. “근데, 내 진짜로 힘들었거든예.”

덕수의 진심은 여기에 있을 것이다. 나는 괜찮다고 했지만 나보다 동생 시집보내는 게 우선이고, 어머니를 모시는 게 우선이고, 죄책감을 씻어내기 위해서라도 잃어버린 동생을 찾아야 한다는 생각이 우선하는 동안 그는 힘들었을 것이다. 미처 자라지 못한 이 아이가 남성이라는 이유로 한 가정을 책임져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힌 것은 그래서 폭력일 수밖에 없다. 덕수는 아버지의 한 마디 때문에 미군들이 던진 초콜릿을 동생에게 주려 발길질을 당하면서도 껍질 채 초콜릿을 입에 넣는 것으로 어린 ‘가장’의 역할을 시작했다. 이후까지 이어진 덕수의 고생은 마치 한국 현대사의 진통에 따른 희생처럼 보이지만 따지고 보면 이는 아들, 남성, 그리고 아버지가 옷을 덮으며 씌웠던 ‘가장’의 강박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도대체 덕구는 왜 맞아야 했고, 고생해야 했으며, 결국 자신을 잃어야 했을까? 남성들끼리 만들어 놓은 허구의 권위는 이렇게 많은 이들을 희생자로 만들었다.

〈국제시장〉 스틸컷

덕수는 아들이라는 호칭을 달기 전에 아직은 보살핌이 필요한 아이이다. 아버지가 아이를 두고 간 자리엔 그의 동생들뿐만 아니라 성인인 어머니도 함께 있었다. 미처 자라지 못한 아이가 성인이 된 이를 지킬 부담을 느낄 필요는 없으며 오히려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 맞다. 그럼에도 덕수는, 아니 많은 아들들은 오랫동안 힘들었다. 영화라는 허구, 흥남철수라는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이 아니더라도 이 폭력은 너무나 흔하게 지금까지 이어지기 때문이다. 출장 가는 아빠가 아들에게 건네는 말, 어느 날 갑자기 자리를 빼앗긴 것 같은 첫째에게 갓난아기 동생을 앞에 두고 부모가 건네는 말 속에는 흔히 이 폭력이 녹아든다. ‘아빠가 없으면 네가 아빠 대신이야’ ‘네가 형이니까 꼭 동생을 지켜줘야 해. 만약 엄마 아빠가 없으면 동생한테는 너밖에 없어’ ‘네가 부모나 마찬가지인데 동생을 잘 돌봐줘야지’와 같은 말들은 바로 어린 아들들에게 덕수의 삶을 강요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러나 예나 지금이나 이 말들은 쉽게 폭력으로 인지되지 않는다. 특별한 이유는 없다. 그저 아들은 듬직하게 가족을 챙겨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 굳이 이유를 찾아 붙이자면 이것 하나일 것이다. 남자니까. 사실 남성들은 다른 무엇도 아닌 바로 이 지점에 대해 억울함을 토로해야 한다. 여성의 권리를 주장하는 이들에게 종종 남성들은 말한다. 우리가 얼마나 힘든지 아느냐고. 가정을 꾸려가야 하고, 가족들을 지켜야 하고, 돈도 벌어야 하고, 힘도 세야 하는 게 얼마나 힘든 게 많은지 아느냐고 말이다. 따지고 보면 이 말은 아버지의 망령을 뒤집어쓴 채 자신의 삶을 고난으로 만들었던 덕수의 ‘힘들었다’는 고백과 다르지 않다. 허구의 권위를 고스란히 받아들인 채 그것을 실천하려는 발버둥은 힘들 수밖에 없다. 지지대도 없이 심지어 허상에 잡으려는 것이니까.

〈국제시장〉 스틸컷

남성이니 누군가를 지켜야 하고 보호해야 하며 누구보다 강해져야 한다는 것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이 기준은 모호할 뿐만 아니라 명확한 이유조차 찾을 수 없다. 어디까지 무엇까지가 지키는 것인가? 책임을 진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강해진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이것은 무엇 때문에 남성의 몫이 되어야 하는가? 종종 예능에서 볼 수 있는 ‘남자다움’ 레퍼토리들은 바로 이 의문의 극점에 있다. 남자니까 많이 (더럽게 보일 정도로) 잘 먹어야 하고, 남자니까 매운 음식까지도 아무렇지 않게 먹어야 한다는 상관관계는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인가? 이러한 남성성의 허구는 결국 자신들에 대한 채찍으로 작용할 수밖에 없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이 체계가 힘들고, 그러니 깨뜨리고 싶다는 것에서부터 새로운 이야기가 시작될 텐데 아직까지 이것은 그들의 입을 통해서는 시작되지 않는다. 신기한 일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해가 가기도 한다. 위 예능이 그런 것처럼, 다양한 곳에서 만들어 놓은 남성성이 이와 엇나가는 이야기가 나오지 못하도록 입막음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남성영화 등으로 명명되는 영화들의 주인공은 모두 ‘진정한’ ‘남성’인 것으로 인식된다. 이들은 모두 ‘남자’라는 키워드에 수많은 의미를 덧씌우고 강화한다. 그들의 면면을 살폈을 때 ‘진정한’ ‘남성’은 적절한 재산도, 권력도, 힘도 있어야 하며, 아무리 무서운 상황이 와도 이를 아무렇지 않은 것으로 생각하는 듯 보이는 배짱과 그에 걸맞은 가족까지 있어야 한다. 어느 정도의 욕심은 물론이고 악바리 같은 깡다구, 완벽하게 빼입은 수트가 아니라면 너무 깔끔 떠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 적절한 후줄근함이 필요하기도 하다. 이것은 ‘남자니까 괜찮다’는 포즈로 완성되면서 마치 남성들이 추구해야 할 어떤 것으로 인정받는다. 주목할 것은 이 영화들은 너무나 대단하게도 이 기준에서 벗어나는 남성들을 절대 허용할 수 없다는 듯 자신들의 세계로 포섭하는 데에 열심히 라는 점이다.

〈범죄도시〉 스틸컷

이 남성영화들에는 꼭 ‘남자다움’으로 설명되지 않는 인물이 등장한다. 주인공 곁에서 늘 주인공을 선망하거나 잘 따르는 어린 남성 캐릭터들이 바로 그들이다. 이들은 대체로 일에 익숙하지 않거나 갓 임무를 배정받은 이들로 완숙하지 않는 남성을 상징하며 영화 내 서브 플롯으로 자리 잡은 성장 서사의 주인공이 된다. 그리고 이들의 성장은 바로 어린 남성 캐릭터가 ‘진정한’ ‘남성’이라 믿는 주인공과 비슷해지는 모습으로 상정되면서 선배의 행동을 고스란히 이어 받는 것으로 귀결된다. 단적으로 <범죄도시>(강윤성, 2017)의 강홍석(하준), <악의 연대기>(백운학, 2015)의 차동재(박서준), 그리고 <청년경찰>(김주환, 2017)의 기준(박서준)과 희열(강하늘) 등은 정확히 이 위치에 서 있다. 이들은 지금 자신이 이 세계에 잘 맞지 않거나 적응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 고민들은 시간이 지나면 해결된다거나 ‘남자 새끼가 뭐 그리 겁이 많냐’는 식의 비아냥으로 일축된다. 그들의 고민을 별것 아닌 것으로 치부해버리는 이 말들은 어린 남성들에게 자신이 나약한 남성이라는 치욕을 만들어낸다.

어린 남성들은 자신들의 솔직한 심경을 말할 때 늘 죄인인 양 고개를 숙이며 웅얼대며, 선배들을 동경하듯 바라보는 것으로 그들과 거리를 설정한다. 선배들이 일하는 방식은 우격다짐에 폭력이 상당 부분을 차지하지만 그것을 가지지 못한 어린 남성들은 그 행위를 그저 우러를 남성의 것으로 위치 짓고 자신을 기준 미달이라 비하해버린다. 가령 <범죄도시>에서 홍석은 처음으로 자진해서 나선 현장에서 큰 사고를 당하고, 공포를 이기지 못해 강력반에서 정보과로 전출하겠다고 이야기한다. 선배는 괜찮다고 홍석을 달래지만 이때 홍석을 사로잡은 것은 부끄러움이다. 자신이 남성으로서 ‘강력반’을 끝까지 견디지 못했다는 것이 도무지 용서되지 않는 것이다. 이후 홍석은 정보과의 업무를 바탕으로 선배들을 돕다가 함께 범죄를 소탕하는데, 그가 당당한 모습을 보이는 순간은 선배들이 그랬던 것처럼 범죄자들을 때리고 욕하는 장면에서이다. 그런 홍석을 뿌듯하게 바라보는 선배들의 시선은 그가 ‘진정한’ ‘남성’이 되었다는 것을 승인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악의 연대기〉 스틸컷

홍석의 모습에서 볼 수 있는 강요된 남성성은 비단 누군가가 그들을 내리누르지 않는다고 해도 스스로 자책할 만큼 강력한 것이다. ‘진정한’ ‘남성’이라는 무게는 이에 동의할 수 없거나 따라가지 못하는 이들을 ‘남성이 아닌 것’으로 끌어내릴 만큼 강력하다. 도무지 알 수 없는 무수한 것들을 ‘그래도’ ‘남자아이가’ ‘다, 응? 알잖아’와 같은 말들을 앞세워 남성성이 왜 그런 것이냐는 질문 자체를 봉쇄한다. 의문조차 품을 수 없는 절대 진리, 하지만 텅 비어 있는 기호. 바로 그 중심에 남성성이 있는 것이다. 아마도 이런 시선 안에서 남성성에 대한 논의는 쉽게 시작될 수 없을지 모른다. 꼬치꼬치 캐묻고 따지고, ‘이렇게 멋있는 것들’을 의심하는 자체가 남자다운 것이 아니니까. 이에 기대어 영화를 비롯한 다수의 미디어는 이 무의미한 기호를 꾸준히 재생산하면서 남성성의 허상에 대한 논의를 더욱 가로막게 될 것이다.

논의의 시작 자체가 남자답지 못한 것이니 아마도 그들이 겪게 될 괴로움은 상당히 오래 이어질 것이며 억울한 이들은 계속 늘어날 것이다. 남자라면 그렇게 되어야 한다는 무논리 속에서 남성들은 가장이 되고, 적당히 거칠어질 것이며, 이를 넘어선 많은 것들을 강요받게 될 것이다. 이것이 억울하다면 그 이유는 다른 무엇도 아닌 남성들이 뒤집어쓰고 있는 혹은 씌우고 있는 정체 모를 ‘남자다움’이라는 것 때문이다. 남성임에도 술을 못 먹는 것이, 매운 음식을 못 먹는 것이, 눈물이 많은 것이, 거친 말과 행동을 하지 않는 것이, 몸이 왜소한 것이 못내 자신을 움츠러들게 했다면, 도대체 이것이 고민할 가치가 있는 일인가에 대한 질문을 먼저 던져 볼 필요가 있다. 현재가 괴롭고 억울하다면, 그 억울함을 호소할 방향은 분명하게 정해져 있다. 다른 곳이 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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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한국영화평론가협회 영평상 신인평론상 수상,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시네마 크리티크 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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