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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혜의 영화산책] 긴긴밤을 지나 우리는 함께 너에게로 간다

봄에 만난 『긴긴밤』과 <너에게 가는 길>

정지혜|영화평론가 / 2021-05-27


슬렁슬렁 힘을 빼고 산책하듯, 여성 감독의 영화 세계를 정지혜 평론가와 함께 거닐어봅니다. 그가 안내하는 산책로를 따라 가끔은 여성영화라는 휴식처에서 잠깐 쉬기도 하며, 미처 알지 못했던 또는 놓쳤던 세계의 구석구석을 관찰하고 또 사색해보시길.
0.

각자의 길이 있다. 각자의 운명이 있다. 각자의 별이 있고 각자의 밤이 있다. 그 길과 운명과 별과 밤 속에서 우리가 함께했던 긴긴밤을 생각한다.

1.
어린이 문학이라는 말이 만들어내는 경계와 규정을 가뿐히 뛰어넘는 작품을 만날 때가 있다. 한껏 좁아져 있던 시야각이 일순간 확 열리고 쓸데없는 욕심으로 가득 찼던 번잡한 마음은 산뜻해진다. 아찔하고 청량한 기분마저 드는 것이다. 올봄 그 길로 이끌어준 책이라면 단연 『긴긴밤』(루리, 문학동네, 2021)이다. 마지막 장을 넘기고도 한참을 붙잡고 있었고 읽는 내내 충만했다. 종의 멸종으로 이제 세상에 단 하나 남은 흰바위코뿔소 노든과 불길한 징조라고 그 누구도 쳐다보지 않던 버려진 알에서 나온 어린 펭귄 ‘나’의 기적 같은 만남과 작별이 있다. 이들의 여정에 짧게 또 길게 함께했던 노든의 아내와 딸, 코뿔소 앙가부, ‘나’를 품고 온기를 나눴던 펭귄 치쿠, 오른쪽 시력을 잃은 치쿠의 오른편을 내내 지켰던 윔보까지. 그들과의 이별은 매번 슬펐지만, 그것을 새드 엔딩이라 부르지는 않겠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모든 것이 다른 우리가 서로밖에 없다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그때는 몰랐었다’는 책 속 한 줄처럼 그들은 각자 너무 달랐지만, 그 덕분에 살아낼 수 있었다. 완벽히 다른 너와 나, 어느 것 하나 닮은 구석 없는 너와 나는 죽음 같았던 수많은 긴긴밤을 보내왔다.

소설 『긴긴밤』

시작부터 그랬다. 노든은 코끼리 보육원에서 자랐고 그곳이 노든의 세계였다. “눈이 멀어 이곳에 오는 애도 있고, 절뚝거리며 이곳에 오는 애도 있고, 귀 한쪽이 잘린 채 이곳으로 오는 애도 있어. 눈이 보이지 않으면 눈이 보이는 코끼리와 살을 맞대고 걸으면 되고, 다리가 불편하면 다리가 튼튼한 코끼리에게 기대서 걸으면 돼. 같이 있으면 그런 건 큰 문제가 아니야. 코가 자라지 않는 것도 별문제는 아니지. 코가 긴 코끼리는 많으니까. 우리 옆에 있으면 돼. 그게 순리야.” 이런 게 순리가 될 수 있는 곳이 세상에 얼마나 있을까. 각자가 가진 것과 각자에게 없는 것이 누군가에게 결핍이 되거나 과시의 대상이 되지 않은 채 그저 함께 살 이유가 되는 세계란 어떤 곳일까. 노든은 그곳에 있었다. 그러나 영원한 것은 없었다. 노든도 곧 그곳을 떠나야 했다. “너에게는 궁금한 것들이 있잖아. 네 눈을 보면 알아. 지금 가지 않으면 영영 모를 거야. 더 넓은 세상으로 가. 네가 떠나는 건 슬픈 일이지만 우리는 괜찮을 거야. 우리가 너를 만나서 다행이었던 것처럼, 바깥세상에 있을 또 다른 누군가도 너를 만나서 다행이라고 여기게 될 거야.” 노든에게 이토록 다정한 말을 건네는 코끼리들은 자신의 앞날을 직접 선택해왔다. “여기, 우리 앞에 훌륭한 한 마리의 코끼리가 있네. 하지만 코뿔소이기도 하지. 훌륭한 코끼리가 되었으니, 이제 훌륭한 코뿔소가 되는 일만 남았군그래.”

자신을 두고 ‘무엇’이라고 규정하려 들지 않고 코끼리이기도 하고 코뿔소이기도 하다고 말해주는 코끼리들의 지지를 받고 자란 노든이라면 어디든 갈 수 있다. 그런 노든과 함께한 어린 펭귄 ‘나’는 노든과의 마지막 순간이 찾아왔을 때 그에게 자신의 이름을 붙여 달라고 했다. “날 믿어. 이름을 가져서 좋을 거 하나도 없어. 나도 이름이 없었을 때가 훨씬 행복했어. 게다가 코뿔소가 키운 펭귄인데, 내가 너를 찾아내지 못할 리가 없지. 이름이 없어도 네 냄새, 말투, 걸음걸이만으로도 너를 충분히 알 수 있으니까 걱정 마.” 우리는 끝내 어린 펭귄 ‘나’의 이름을 알지 못한다. 하지만 우리와 노든이 ‘나’를 기억하는 한 언제 어디서든 우리는 ‘나’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다.

<너에게 가는 길> 스틸컷

3.
노든과 펭귄 ‘나’가 자신들을 떠나간 이들의 이야기로 긴긴밤의 두려움을 이겨내던 것을 떠올리게 하는 영화 한 편이 있다. 올봄 전주국제영화제에서 만난 변규리 감독의 <너에게 가는 길>(2021)이다. 영화는 한국의 성소수자부모모임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목소리, 자신의 성정체성을 가족에게 알린 이들의 분투, 자신과 다르다는 이유로 혐오와 차별과 폭력을 행하는데 거리낌 없는 현실, 그 앞에서 되레 당당하게 웃으며 성소수자들의 안부를 묻고 그들에게 따뜻한 포옹을 건네는 성소수자부모모임의 활동이 있다. <플레이온>(2017)에 이은 감독 변규리의 두 번째 장편이자 성적소수문화인권연대 연분홍치마의 열 번째 작품이며 무엇보다 성소수자부모모임이 제작 협력에 참여해 함께 만든 첫 영화라는 점에서 한국 퀴어영화사를 논할 때 기념할 만한 귀한 작품이 도착했다. 영화도 생물과 같아 저마다의 길이 있고 그 길을 내며 가는 것이라면 <너에게 가는 길>은 영화 그 자체로 성소수자의 존재 증명이자 지금도 홀로 분투하고 있을 성소수자를 향해 내딛는 커다란 한 걸음이다. 영화는 성소수자라는 당사자성을 지우지 않으면서도 당사자의 부모를 통해 성소수자로서 살아간다는 의미를 당사자성 너머로 확장해나간다. 어쩌면 성소수자에게 가족이란 가장 먼저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고 싶은 존재일 테지만 혹여 그 바람이 좌절됐을 때 가장 크게 상처받을까 두려운 존재일지도 모른다.

<너에게 가는 길>은 자신으로 살기 위해 부모에게 제 정체성을 말하고 서로가 서로에게 용기가 돼주기로 한 부모와 자식을 통해 같이 살아가보자고 하는 뜨거운 끌어당김이기도 하다. 이들을 괴롭고 힘들게 하는 대부분의 이유는 그들 외부에서 온다. 법원에 성별 정정 신청을 하기 위해 감내해야 했던 지난하고 무례한 과정, 동성애 반대 집회 현장에서 들어야 했던 모욕적인 혐오 발언, 트랜스젠더 여성이 최종적으로 대학 입학을 포기했다는 소식, 동성혼과 파트너십 권리를 위한 성소수자 집단 진정을 하기까지의 현실 같은 것들이다. 이 모든 순간 <너에게 가는 길>의 성소수자는 성소수자부모모임 사람들과 함께하고 심지어 어떨 때는 당사자보다 먼저 부모모임 사람들이 목소리를 내야 할 현장으로 달려가기도 한다. “내 자식을 내가 잘 모른 거지”, “왜 내 아이가 그럴 수 있다는 걸(게이일 수 있다) 생각지 못했는지. 너무 몰랐다”는 자각에서 시작해 성소수자 부모들은 서로의 경험과 생각을 나누고 퀴어 퍼레이드와 집회 현장으로 가 본인의 생각을 말과 행동으로 전한다. <너에게 가는 길>은 자식이 평등한 시민으로서 이 사회에서 인정받길, 더는 외롭지 않길 바라는 그들의 부모가 변화를 위해 시도하는 활동, 그들 자신의 변화의 기록, 여태까지와는 다른 삶의 궤적을 그려가려는 분투기이기도 하다. 

<너에게 가는 길> 스틸컷

4.
‘너’에게 가는 길이라 했다. ‘너’를 뭐라고 부를까. “젠더 퀴어, 에이섹슈얼, 에이스플럭스 폴리아모리스트. 그게 어떤 내용인지는 너무 어려워서 잘 모르겠고요. (웃음)” 영화에서 한결의 엄마 나비는 자식을 소개하는 말들을 하나씩 열거해본다. 이분법에 의한 표현이나 명징하고 짧은 단어로 누군가를 설명하는데 익숙했던 경우라면 이 긴 수식이 상당히 낯설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누군가를 설명할 때 간단명료한 단어로 충분하다는 것 자체가 가능할까. 동시에 나비가 그랬듯 이 수식의 말 하나하나를 다 정의하고 설명하지 않아도 된다. 나비 앞에 있는 한결, 한결 앞의 나비면 그것으로 충분하니까. “배짱이 생긴다. 내 삶을 살겠다는 마음을 먹은 거 같아서, 같이 할 수 있는 부모와 자식 간이라서 다행이다.” 한결을 생각하며 나비가 했던 이 말을 적극적으로 읽어보려 한다. ‘너’와 함께할 ‘나’, ‘나’와 같이 할 ‘너.’ 더는 혼자가 아니라는 경험과 감각이 우리 안에 있다. 긴긴밤 홀로 아파했을 너에게 간다. 그 길은 어쩌면 ‘나’에게로 가는 길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긴긴밤을 지나 미지에서 우리를 기다릴 너에게로 간다. <너에게 가는 길>을 더 많은 ‘너’와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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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디다큐페스티발 집행위원, 영화웹진 리버스 필진, 2018 부산국제영화제 한국단편 예심 진행, 공저 『아가씨 아카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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