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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설이지 말고, 페미니즘 돋보기

[정지혜의 영화산책] 물이 되는 꿈

물의 속성을 탐색하는 영화 가까이

정지혜|영화평론가 / 2021-08-12


슬렁슬렁 힘을 빼고 산책하듯, 여성 감독의 영화 세계를 정지혜 평론가와 함께 거닐어봅니다. 그가 안내하는 산책로를 따라 가끔은 여성영화라는 휴식처에서 잠깐 쉬기도 하며, 미처 알지 못했던 또는 놓쳤던 세계의 구석구석을 관찰하고 또 사색해보시길.

<아쿠아리우스> 스틸컷

지난 글에서 클레베르 멘돈사 필류의 <아쿠아리우스>(2016)에 관해 얘기했는데 좀 더 말하고 싶고 또 말해야만 하는 게 있다. 이번 글은 거기서부터 시작하려 한다. <아쿠아리우스>의 매혹의 지점은 저항할 수 없는 클라라(소니아 브라가)의 에너지에서 오는 게 크다. 그랬을 때 떠오르는 이미지 가운데 유독 하나가 머릿속에 강렬하게 남았다. 누군가 이 영화의 결정적인 한 장면을 꼽아달라고 한다면 꼭 들어갈 장면은 아닐 수 있지만 나에게 <아쿠아리우스>라고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를 이미지인 것만은 분명하다. 클라라가 브라질 북동부 헤시피에 있는 보아비아젱 해변에서 이제 막 수영을 마치고 우리 앞으로 걸어 나올 때다. 그녀의 흑단 같은 검고 긴 머리가 바닷물에 젖어 그대로 몸에 찰싹 붙었다. 물기가 온몸을 타고 흘러내린다. 뭔가 형언할 수 없는 심경이라는 듯, 결연한 의지를 표현하는 듯, 그러면서도 또 외로운 듯 보이기도 한 얼굴과 눈빛이다. 클라라는 자기 앞을 응시한다. 60대 중반이라는 나이가 무색할 만큼 여전히 고혹적이고 아름답다. 클라라의 강렬한 현현이다. 바다 앞에 우뚝 서 있는 그녀의 존재가 그렇게 크게 느껴질 수 없다. 이 장면에서 그리고 이후에도 영화가 이미지와 배경과 무드의 지속과 기운으로 우리에게 넌지시 또 직접적으로 제시하고, 제안하고, 상기해오는 것이 있다. 바로 ‘물’의 존재감이다. 앞선 그 장면은 해변과 클라라의 완벽한 일체로 읽힐 만하다.

<아쿠아리우스>(Aquarius). 물병자리 성좌에 해당하는 별자리, ‘물병 운반자’라는 의미의 라틴어를 제목으로 가져온 영화는 태생적으로 물의 이미지와 기운을 품고 있다. 개발 광풍 속에서 모두가 떠난 아파트 ‘아쿠아리우스’에 오직 클라라만 남아 ‘아쿠아리우스’를 사수하려 저항한다. ‘아쿠아리우스’ 건물 밖으로 나가기만 하면 보아비아젱 해변이 펼쳐지고 그곳에서 오랫동안 살아온 사람들과 관광객들의 들끓는 욕망이 있다. 바다는 그것을 오랫동안 지켜봐 왔을 게 분명하다. 밤의 해변에서는 어둠을 틈탄 젊은 남녀의 섹스와 소년들의 축구 경기가 한창이다. 서로 다른 목적과 방식으로 그들은 물기를 머금고 흠뻑 젖어 든다. ‘물’로 표상되는 헤시피의 역사, 클라라의 기억, 아쿠아리우스라는 건물, 보아비아젱 사람들의 욕망, 이 모든 게 얽히고설킨 관계가 곧 <아쿠아리우스>라고 해도 좋겠다. 클라라가 살아온 ‘아쿠아리우스’는 그 모든 걸 지켜봐 왔다. 열어둔 창으로 해변의 욕망이 탐지되고, 소금기를 머금은 바다 냄새와 축축한 물기가 집 안으로 들어와 곳곳에 자리 잡는다. 클라라와 ‘아쿠아리우스’는 물 가까이에서 물과 함께 산다는 게 뭔지를 인물과 건물의 형태를 빌려 우리 앞에 그려내 보인다.

실은 ‘물’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물은 수많은 예술이 빚지고 있는 영감의 원천, 탐미의 주제이자 매개다. 클로드 모네의 연못, 호크니의 수영장, 엘레네 페란테의 나폴리 해변이 즉각 떠오른다. 그리고 거부할 수 없는 물에 관한 영화들. (모든 영화가 아닌) 어떤 영화는 물을 감상하는 차원을 넘어 물을 겪게 한다. 물의 표면과의 접촉과 감촉, 부력과 중력, 물의 부피감과 공간감, 물의 저항력, 유속과 파장. 고요의 상태와 리드미컬한 역동. 평정과 운동, 흐름과 고임. 파고와 소용돌이치는 충동. 이러한 물의 물성 내지는 속성이라면 영화가 오랫동안 감각하고 싶어 했고 영화가 구현하고 싶어 해온 상태이기도 하다. 영화는 지상의 감각으로는 도저히 겪을 수 없고 도무지 상상할 수 없는 속도와 무게와 상태를 꿈꾼다. 이러한 물과 같은 상태와 감각 앞에서 우리의 언어는 종종 갈 길을 잃고 한없이 작아진다. 

<세노테> 스틸컷

근래 본 영화 가운데 오다 가오리의 <세노테>(2019)는 아주 직접적으로 물의 물성을 느끼게 해줬다. 멕시코 유타칸 북부에 있는 거대한 물웅덩이인 세노테는 운석이 지구로 날아들어 만들어낸 석회암 지대로 그곳에 물이 흘러들어 깊고 너른 싱크홀이 생겼다. 고대 마야인은 그곳의 물로 삶을 일궈왔다. <세노테>에는 앞서 언급한 물의 속성뿐 아니라 산란하고 굴절하며 반사하는 빛의 상태와 속성도 함께 엿볼 수 있다. 또한 영화는 ‘세노테’를 통해 역사, 삶과 죽음, 기억과 시(時)적 발화를 잇는 시도를 해 보인다. 기억과 시간, 그 변화와 변이의 양상을 온전히 물의 공감각적 측면과 질감으로 전달하는 것이다. 

영화가 시작되고 전개되는 데 구체적인 계기가 돼주는 경우, 영화 속 사건의 추동과 이야기를 집어삼키는 블랙홀이 되는 경우 역시 무수히 많을 것이다. 니콜라스 뢰그의 <쳐다보지 마라>(1973)의 물과 죽음의 도시 베니스, 린 램지의 <쥐잡이>(1999)와 <스위머>(2012)의 죽음 충동이 봉인된 듯한 강, 안드레아 아놀드의 <피쉬 탱크>(2009)에서 주인공을 딜레마에 빠뜨렸던 무시무시한 물의 유속 같은 것이다. 이때의 물이 있는 장소의 출연은 영화의 전개 양상과 사태의 추이를 더는 물의 출연 이전으로 되돌릴 수 없게 만든다.

<비거 스플래쉬> 스틸컷

<워터 릴리즈> 스틸컷

물이 있는 구체적인 장소를 통해 물의 이미지를 차용하고 싶어 하는 경우도 있다. 소위 ‘수영장 영화’라고 불러도 좋을 영화들이다. 자크 드레이의 <수영장>(1969)을 시작으로 프랑수아 오종의 <스위밍풀>(2003), 루카 구아다니노의 <비거 스플래쉬>(2016)로 이어지는 수영장. 그곳은 삼각 혹은 사각 관계로 얽히고설킨 관계와 그들의 욕망의 환유처럼 보인다. 비교적 근래의 영화인 주순의 <그 여름, 가장 차가웠던>(2019)에서도 수영장은 주인공 소녀의 처지를 애 둘러 표현하는 구체적인 장소가 되고, 엘리자 페트코바의 <어 피쉬 스위밍 업사이드 다운>(2020)의 고립된 집과 야외 수영장 역시 비밀과 금기의 거점이 된다. 겉으로는 고요한 듯 보이지만 이때의 물은 들끓는 에너지의 용광로 그 자체다.

다른 누구도 아닌, 여성들, 그들이야말로 종종 물 앞에서 커다란 변화를 맞고,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며, 중요한 결단에 이른다. 마야 데렌의 <뭍에서>(1944)의 여인은 기기묘묘한 실내를 벗어나지 못했지만 성큼 내디딘 한 발을 통해 갑작스레 해변의 모래사장으로 순간 이동한다. 그리고 비로소 여인은 과격한 돌격과 해방의 몸짓으로 자기를 옥죄어왔던 구조의 틀을 깨뜨려 버린다. 해변으로 간 아녜스 바르다의 영화가 시도했던 갖가지 실험들도 기억할 것이다. 그의 영화 중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행복>(1965)에서 호수 산책길에 테레사가 보여준 결단은 충격적이다. <워터 릴리즈>(2007), <톰보이>(2011),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2019)을 거치며 매번 다른 형태로 우리를 물 앞으로 이끈 셀린 시아마도 있다. 

<카페 뤼미에르> 포스터

더 이상의 이유가 불필요해지는 순간도 있다. <카페 뤼미에르>(2003, 허우 샤오시엔)의 철교 위 기차의 지나감과 그 아래 흐르는 하천, 기다리고 만나고 어긋나는 에릭 로메르의 바다, 에로틱하고 위태롭고 신비로운 아핏차퐁 위라세탄쿤의 숲속 물가 같은 건 잊기 어렵다. 

아주 먼 과거부터 누군가는 해왔을 물에 관한 질문이 구체적인 나의 질문으로 도착한다. 물에 관해서라면, 물의 속성에 가까워지려는 영화에 관해서라면 더 많이 겪고 탐험해보고 싶다. 다른 그 무엇도 아닌 물이어야만 했던 이유를 찾아 헤매고 싶다. 무더운 여름 탓일까. 하루키의 달리기만큼 수영에 빠져 살기 때문일까. 물이 되는 꿈을 꾼다. 영화가 꿨던 꿈처럼. 이것은 거부할 수 없는 끌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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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디다큐페스티발 집행위원, 영화웹진 리버스 필진, 2018 부산국제영화제 한국단편 예심 진행, 공저 『아가씨 아카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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