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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쿠라우> 스틸컷

미지의 영화를 만나는 건 언제나 흥미롭다. 아직은 낯선 이름, 그러나 이미 중요한 이름이 된 브라질의 영화감독 클레베르 멘돈사 필류가 대표적이다. 운 좋게도 올해 무주산골영화제를 통해 그의 극영화 <네이버링 사운즈>(2012), <아쿠아리우스>(2016), <바쿠라우>(2019)를 보고 글을 쓸 기회가 있었다. (그 가운데 <바쿠라우>가 국내 개봉한다는 반가운 소식이 들린다.) 영화평론가로 먼저 활동을 시작했고 마흔을 넘긴 뒤 영화 연출을 시작한 클레베르 멘돈사 필류는 단숨에 브라질 영화의 현재가 됐다. (<네이버링 사운즈>로 41회 로테르담 국제영화제 국제비평가협회상을 수상했고, <아쿠아리우스>로 칸국제영화제 경쟁 부문에 올랐으며, 줄리아노 도르넬레스와 공동 연출한 <바쿠라우>로 칸국제영화제 심사위원상을 받았다.)

그는 영화로 자신의 고향인 브라질의 북동부 해안 도시 헤시피를 조망하고 파헤치고 재구성하길 거듭한다. 헤시피라는 살아 움직이는 구체적인 장소야말로 그의 영화의 주인공이자 캐릭터이며 이야기이자 이미지이고 리듬이자 운동성이라고 말하고 싶어질 정도다. (‘바쿠라우’라는 가상의 마을을 설정한 <바쿠라우>가 예외일 수는 있겠으나 이 역시 브라질 북동부 세라 베르드 지역을 염두에 두고 있으며 그곳의 지역적, 문화적, 인종적, 계급적 특성이 주요하다는 점에서는 전작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헤시피라는 지리적, 지정학적 좌표를 구체화하는 클레베르 멘돈사 필류의 방식은 흡사 민속지학자와 문화 인류학자의 접근법과 방법론처럼 보인다. 특정 동네로 깊숙이 들어가 그곳을 헤집고 다니고,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일상과 생활을 탐색한다. 영화라는 그물망으로 지금 그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 그곳 사람들의 다층적인 욕망은 무엇을 향하고 있는지를 기어코 낚아채 길어 올린다.

오래전부터 잠복해 있으나 가시화되지 않고 드러나지 않았던 누군가의 신경쇠약증과 성적 욕망, 불안, 권태, 과거의 일순간이 하나씩 그러나 동시에 수면 위로 떠 오른다. 이러한 방법론과 관심은 그의 영화에서 무정형적 인물 관계도와 흥건한 열기로 이어지곤 한다. 기승전결의 서사 전개보다는 구체적인 장소, 여기저기, 도처에서 벌어지는 일, 그에 연루된 인물들의 욕망이 그에겐 훨씬 더 매혹적이다. 그리고 이때 ‘지금, 이곳’이라는 영화의 현재성이 중요하다. 과거의 시간, 흔적, 물건, 인물과 연결되는 ‘지금, 이곳’이다. 다시 말해, 그의 영화에서 과거와 현재는 연대기적 지속으로서 의미 있다기보다는 ‘지금, 이곳’ 헤시피에 꿈틀대는 온갖 욕망의 실체를 더 정확히 바라보기 위한 이유이자 방편으로서 의미 있는 짝패다. 그리고 ‘지금, 이곳’의 시간과 장소를 구체화하는데, 이 욕망의 한가운데에 강렬하고 강력한 여성의 얼굴들이 있다고 말하고 싶다.

<아쿠아리우스> 스틸컷

그러한 측면에서라면 단연 <아쿠아리우스>(2016)부터 말해야 한다. 헤시피의 보아비아젱 해변 근처, 1940년대 지어진 아파트 아쿠아리우스. 개발 광풍으로 주변 건물이 하나둘 허물어져 가고 동네 사람들도 살던 곳을 떠나간다. 아쿠아리우스에 살던 이들도 마찬가지. 텅 빈 건물에 유일하게 남은 최후의 1인은 60대 중반의 은퇴한 음악 평론가 클라라뿐이다. 건축업자는 클라라에게 좋은 조건으로 보상해줄 테니 아쿠아리우스를 떠나라고 회유하고 협박하지만, 그녀는 꿈쩍도 하지 않는다. 아쿠아리우스를 떠날 이유가 없다. 자본과 주류의 이름으로 밀고 들어오는 힘 앞에서 그녀는 계속해서 아쿠아리우스에 ‘있기’를 자처한다. 그전처럼 그대로 ‘있기’야말로 클라라의 저항의 방식이다.

아쿠아리우스는 클라라와 그녀 가족의 역사가 깃든 곳, 그녀의 삶과 생각, 감정의 총체, 현재의 생성 중인 아카이브다. 아쿠아리우스 안팎, 헤시피의 보아비아젱 해변을 통해 우리는 클라라라는 한 여성을 구체적으로 알아가게 될 것이다. 이것은 단지 비유적 표현이 아니다. 영화가 그것을 강렬하게 원하고 있다. 영화의 카메라는 역동적으로 움직이며 클라라가 미처 보지 못했거나 뒤늦게 보는 것, 그러나 클라라의 시선 너머에 이미 존재하는 사건, 사물, 인물들을 강하게 환기하며 클라라에게로, 클라라의 공간으로 들어선다. 이를테면 카메라는 아쿠아리우스 클라라의 집 창밖으로 보이는 해변에서 사랑을 나누는 이들을 지켜보고, 고개를 돌려 근처에서 축구를 하는 아이들을 훑은 뒤, 후방으로 움직여 클라라의 창문으로 들어서 조금은 피로한 듯 누워 있는 그녀의 얼굴을 보여주는 식이다. 클라라는 지금 어떤 곳에 있는가, 그녀를 둘러싼 주체할 수 없는 열기는 어디에서 기인하는가를 다층적으로 보여준다. 캐릭터를 구축하는 이 영화의 방식이기도 하다.

<아쿠아리우스> 스틸컷

클라라라는 인물은 단순하지도 단조롭지도 않다. 60대 중반을 넘긴 여성 캐릭터라고 하면 많은 경우 누구의 엄마, 아내, 할머니로 불리기 일쑤다. 가족극 안에서의 제한된 역할 놀이로부터 클라라는 멀찍이 떨어져 자유롭다. 클라라는 클라라다. 그녀는 복잡하고 다층적이며 구체적인 욕망을 가진 한 사람이며 그런 의미에서 영화 내내 누구보다 살아 있다. 클라라는 여전히 생의 활기와 성적 욕망과 관능의 에너지로 출렁인다. 길고 숱 많은 머리를 풀어 헤쳤다 묶어가며 보아비아젱 해변으로 수영을 하러 다녀오고, 또래 친구들과 음주와 가무를 즐기며 새로운 만남을 가져 보고, 성적 관계를 할 젊은 파트너를 집으로 부르기도 한다. 클라라는 이 젊은 남자가 유방암으로 가슴 절제 수술을 받아 납작해진 자신의 한쪽 가슴을 더듬다 당황하자 아무렇지 않다는 듯 갈 곳 잃은 그의 손을 다른 쪽 가슴으로 이끄는 여자다. 음악에 관한 전문 지식을 바탕으로 인터뷰를 하기도 하고, 사별한 남편의 묘지를 찾기도 하고, 바쁜 딸 대신 손자를 돌보는 할머니가 되기도 한다. 단단하고 강인하며 아름답고 매혹적인 단독자. 클라라가 우뚝 서 있다. 그리고 마침내 클라라는 아쿠아리우스와 자신을 지키기 위해 최후의 일격을 가할 것이다. ‘있기’ 위해 그녀 식의 ‘하기’를 해 보이는 것이다.

‘바쿠라우’라는 가상의 마을에서 살아가는 다양한 인물들(성적 지향, 인종, 연령 등등)의 저항의 이야기인 <바쿠라우>에도 ‘지금, 바쿠라우’를 살아가는 구체적인 여성들이 있다. 실질적으로 또 영적으로 바쿠라우를 이끌어온 94세의 카르멜리타다. 사실상 그녀의 장례식에서 시작하는 영화는 그녀의 영적 자장 안에서 마을을 위협하는 외부 세계에 저항한다. 모든 저항과 복수를 마친 뒤 영화는 카르멜리타의 손녀 테레사의 얼굴로 끝을 맺는다. <아쿠아리우스>의 클라라로 등장해 실로 놀라운 면모를 보여준 배우 소냐 브라가가 이번엔 마을의 유일한 의사 도밍가스로 등장해 그야말로 분기탱천한다. <아쿠아리우스>, <바쿠라우>보다 훨씬 느슨한 형태로 도시를 조감한 <네이버링 사운즈>에서도 불면과 불안에 시달리며 욕망의 흐름을 외면하지 않던 여인 아나는 다른 누구보다 오래 기억될 만하다. 

<아쿠아리우스> 스틸컷

클레베르 멘돈사 필류의 영화로 ‘지금, 그곳’에 ‘있는’ 여성들과 만났다. 물론 이것은 그의 영화로 이르는 여러 갈래의 길 중 하나일 것이다. 어떤 방향과 우회로로 접근하더라도 한 가지는 말해두고 싶다. 만약 그의 영화를 두고 정치와 혁명의 영화라고 한다면, 그것은 그의 영화가 현실 정치와 포갠 듯 닮아 있어서라거나 영화를 저항의 방편으로 삼기 때문은 아닐 것이다. 가장 구체적인 개별의 인물들, 그 개개인의 시공간과 역사를 무화하지 않는 방식으로, 현재를 더 정확하게 직시하기 위해 과거와 미래를 분주히 응시하는 그의 영화적 시선에서 정치와 혁명을 말할 수 있는 게 아닐까. 다른 길은 그곳으로부터 시작되는 게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