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영화를 읽다
슬픔에게 곁을 내어주기
<뼈>
정다희 / 2020-04-02
<뼈> 스틸컷
우리는 얼마나 충분히 슬퍼하고 있을까? 행복, 성취, FLEX가 시대정신이 되어버린 2020년, 우리는 슬픔의 자리를 충분히 마련하고 있는가. 영화 <뼈>(최진영, 2017)는 드러나지 않지만 여전히 생생한 아픔을 향해, 표면에선 보이지 않지만 ‘뼈’처럼 깊숙한 기억을 향해 우리를 유영하게 한다.
<뼈>의 주 무대인 현대의 제주4.3평화공원은 평화로워 보인다. 한적하고 새가 지저귄다. 즉각 드러나지 않는 아픔이란 얼마나 나약한지 쉽게 없는 것처럼 취급당한다. 속에 찬 아픔을 증명하려 해도 언어는 미끄러진다. 등장인물 중 한 명인 하루코(이영원)는 일본어를 사용하는데, 이는 제주4.3 당시 일본으로 피신한 수많은 사람들의 삶을 짐작하게 하면서 어떤 고통은 정확히 말해질 수 없음을 드러내는 듯하다. 평화공원에는 공식적으로 채택된 기록이 전시되어 있지만 하루코는 구획된 공간 밖을 향한다.
사람들이 이해할만한 단어로만 기억을 이야기하는 한정된 증언자들만이 공식 기록 안에 있다. 제주4.3을 겪은 이들 중 많은 수가 가해자였던 이웃이 두려워, 자식에게 이런 일을 당했다고 말하기 부끄러워 이해받기를 포기하고 기억을 가슴에 묻었다. 기록 바깥의 사람들은 말없이 귤을 따거나, 굿을 하거나, 단지 눈물을 쏟으며 그 기억을 가리고 산다. 하루코는 바깥으로, 숲으로 향하고 그제야 주인공들은 과거에 접속한다. 화면은 71년 전으로 이동한다. 과거와 현재가 한 공간에서 만난다. 산속을 느리게 걷는 장면은, 그 자체로 70여 년 전 사람들과 함께하는 걸음이면서, 기록 바깥의 공간, 죽음의 흔적, 진실을 탐색하는 여정이기에 특별하다.
<뼈> 스틸컷
제주4.3은 아직 정명 작업이 진행 중이다. 민중항쟁, 무장봉기, 학살 등 여러 사건이 일어났기 때문에 한 가지 이름을 정하지 못했다. 1947년 4월 3일부터 1954년까지 전체 제주도민 10분의 1인 3만여 명이 학살되었다. 모두 어떤 끔찍한 일-서로가 서로를 죽인 일-이 일어났다는 걸 알고 있지만 이것을 어떻게 해석할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나뉘어왔다. 세월호 참사를 모두 먼 곳에서 목격하고 있었음에도 어떤 이는 참사를 ‘교통사고’라 치부하고 어떤 이는 어른들의 잘못이라 말하며, 어떤 이는 무능한 정부 탓이라 말하는 것처럼, 비극은 단지 일어나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무엇이라 말하느냐에 따라서 살아남은 사람들이 어떻게 할지를 바꾼다.
제주4.3은 오랜 시간 교과서에서 폭동이라 불려왔다. 분단 반대 운동이면서 민중 항쟁이기도 했던 제주4.3의 이름은 누가 어떻게 부르냐에 따라 슬퍼할 수 있게 되기도, 아니게 되기도 한다. 진실이 뚜렷한 모습을 하고 있지 않더라도 더 많은 이들의 고통을 탐색해가는 과정에서 밝혀질 사건의 면면은 우리가 현재 견딜 수 있는 것 이상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기꺼이 현재 기록물의 바깥으로 향하고, 이해되지 않는 고통을 정면으로 마주하는 일은 무엇보다 용감한 행동이다. 때로는 고통을 피하는 것보다 고통으로 가는 것이 더 나은 위로를 준다. 고통을 직면한다는 점에서 <뼈>의 주인공들이 산속으로 걸어가는 장면은 하나의 훌륭한 은유다.
<뼈> 스틸컷
이 영화의 미덕은 과거와 접속하는 것에서 끝나지 않는다. <뼈>는 동희(류아벨)와 하루코의 만남에 대한 영화이기도 하다. 둘은 나이도 국적도 다르지만 과거에 같은 곳에서 만난 이들의 후손이다. 동희는 처음에 하루코와의 만남을 달가워하지 않는 듯 보인다. 동희에게 중요한 건 전화 통화로 등장하는 어떤 선배를 돕고, 하루코를 제시간에 데려다주는 것뿐이다. 표면적이고 명확한 목표를 가진 동희와 달리, 하루코는 모호하지만 무언가 해결하고자 하는 감정을 갖고 있다. 해결해야 할 것은 하루코에게도 영향을 미친, 이해할 수 없는 과거-제주4.3-이기도 하다. 동희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마법처럼 하루코에게 딱 맞는 운동화를 선사하기도 하고 굴속으로 들어가기도 하면서 하루코의 여정에 빠질 수 없는 사람이 된다. 자발적인 계기는 아니었지만 동희는 결국 하루코와 자신이 동일한 과거를 공유했음을 알게 된다. 하루코의 울음을 목격함으로써 동희는 그 눈물의 의미, 과거의 의미를 다시 새기는 사람으로 변화하게 된다.
우리는 서로에게 언제나 딱 맞는 조각처럼 곁에 있을 수 없다. 내 곁에도 수많은 친구들이 명확한 이유를 알 수 없는 슬픔과 절망 속에 있지만 나도 언제나 그들 곁에 있을 수는 없다. 우리는 동희처럼 서로에게 딱 맞는 운동화를 가져다주지도 못하고, 하루코처럼 가방에 마침 동전 파스가 있지도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뼈>를 보고 곁에 있음에 대해 다시 생각한다. 슬픔은 혼자 파고들면 어떤 존재를 없애버릴 정도로 한없이 무거워진다. 하지만 울음이 통제되지 않고 곪은 상처가 터져 나올 때, 서로 이해할 수 없더라도 진실을 말하고 곁에 있기를 선택할 때, 슬픔은 누가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견딜만한 것이 된다. 인간은 약하다. 누가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위로받는다. 너무 약해서, 우연일지라도 곁에 있는 존재로 인해 슬픔이 쉴 자리를 마련하는 일을, <뼈>는 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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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4.3 관련 참고 자료: 강은주, 영화 <레드헌트> 인권해설 “제주4·3-지금 여기 현재진행형인 역사”, 2018년 23회 서울인권영화제 인권해설책자,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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