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영화를 읽다
[WDN 여성감독 작업노트] 재미 쫓다 어느덧 장편 7편
<오마주> 신수원 감독
WDN / 2025-05-09
여성감독네트워크 WDN에서 지난 4월 19일 케이스 스터디 <여성감독 작업노트>를 진행했습니다. 감독의 발표 이후 대담과 자유로운 질의응답 시간을 가지며 생생한 제작 스토리와 실질적인 꿀팁을 나눴답니다. 이번 행사에서 나온 이야기들을 글로 함께 만나보시죠 :) |
<4th 여성감독 작업노트 “영화는 기세다!”> -일시: 2025.4.19.(토) 오후 1시 -장소: 서울여성플라자 아트컬리지3 -발표: 신수원 회원 -사회: 이채민 회원 |
현장 사진 ©WDN
“난 소설을 쓰려고 했는데…”
2000년에 교사 생활을 하다가 소설을 너무 쓰고 싶었다. 그런데 소설을 쓰려면 시간이 필요하고 전업 작가가 되기엔 겁이 나고 그래서 휴직을 하고 소설을 썼었다. 그러다가 한예종 영상원 광고를 봤는데 2년제 시나리오 전공이 있더라. 그전까지는 그저 관객으로서 영화를 보던 사람인데 흑심을 갖고 여기 한번 내보기로 했다. 학교 다니면서 썼던 소설로 입학하게 됐고, 학교 생활이 너무 재밌었다. 선생을 하다가 갔는데 10살 차이까지 나는, 노랑 머리로 염색한 애들이 저랑 동기였고, 그 친구들하고 같이 영화를 찍으면서 이게 얼마나 재밌는 일인가를 느꼈다. (웃음) 그런데 나와 동기들은 사고방식이 많이 달랐다. 나도 교사 시절에 날라리 선생이긴 했지만, 영화는 그보다 훨씬 더 강렬한 충격이었다. 공동 창작이라는 건 소설을 쓰는 것과 완전히 달랐다. 처음엔 16mm 필름으로 영화를 찍기 시작했다. 근데 영화가 뭔지 정말 몰랐다. ‘레디, 액션, 콜’을 어떻게 외치는지도 몰랐다. 옆에서 스태프 친구들이 “콜 하라고!” 찔러줘서 겨우 “콜!” 외쳤다. 그렇게 만든 첫 작품이 <사탕보다 달콤한>(2002)이라는 10분짜리 단편이다. 학교에서 200만 원 들여서 만들었고, 전부 학교 안에서만 찍었다. 자신이 없어서 바깥 촬영은 아예 엄두도 못 냈다. 첫 상영을 강의실에서 했는데 사람들이 웃었다. 그때 사람들이 웃어준 그 쾌감이 너무 좋았다. ‘내가 뭔가 하나 해냈구나’ 하는 느낌.
그리고 그 작품은 졸업할 때 졸업영화제로도 상영됐다. 영상원 졸업작품들은 다들 너무 잘 만들었는데, 내 영화는 창피했다. 상영을 선재아트센터에서 했는데, 너무 부끄러워서 무대 인사 때 방어벽부터 쳤다. “저는 다음엔 잘 만들겠습니다.” 이 말에 객석이 빵 터졌다. 주변 친구들은 다들 수준 높은 단편을 내놨지만, 내 영화는 어디 영화제에도 들어가지 못했다. 유일하게 KBS 독립영화관에서 한 번 방영됐다. 영화제는 전부 떨어졌다.
근데 이상하게도 그 ‘영화를 만드는 행위’ 자체에 중독이 된 것 같았다. 그 후에 학교에 잠깐 복직했다가 결국 또 튀어나왔다. 나와서 두 번째 단편 <면도를 하다>(2003)를 찍었고, 그러면서 사표를 내게 됐다. <면도를 하다> 이후에는 거의 6년 동안 연출 준비를 하면서 시나리오 작가로 활동했다. 중간에 다 엎어졌지만. 그러다 결국 남아있던 퇴직금을 긁어모아서 만든 게 <레인보우>(2009)다.
<레인보우> 스틸컷 ©WDN
“7번 엎어지면? 그냥 죽을 거 같다. 근데 결국 만든다!”
“7번 엎어져도 다시 시작한다”는 건 거짓말이다. 그냥 7번 엎어진다. 진짜 엎어지면 죽을 것 같았다. (웃음) 그렇게까지는 안 갔지만, 나는 입봉을 준비하면서 직장을 그만뒀다. 뭐 대단한 수상 경력이 있는 것도 아니고, 단편으로 이름을 알린 사람도 아니었다. 나이도 많았다. 영상원을 다니던 시절이 30대 후반이었으니, 작가로도 감독으로도 유리한 조건은 아니었다. 이미 결혼도 한 상태였고. 그런데 고맙게도 나를 좋게 봐준 제작자들이 있었다. “한번 감독해봐” 하고 기회를 줬다. 문제는 내가 쓰는 시나리오가 상업성이 없었다. 결국 1년 뒤에는 책상을 빼야 하는 상황이 찾아왔다.
40대 초반쯤이었을 거다. ‘이제 진짜 영화 못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그게 너무 억울했다. 그래서 그냥 내가 하기로 했다. 시나리오를 쓰고, 친구들에게 보여줬다. 친구들이 재밌다고 했다. 십시일반으로 도와주겠다는 친구들이 생겼다. 그런데 막상 지원을 넣으니 다 떨어졌다. 영진위 지원 같은 것도 다 안 됐다. 돈이 없었다. 결국 마지막까지 손대지 않고 남겨놨던 퇴직금을 꺼냈다. 일부는 생활비로 썼고, 남은 돈으로 영화를 만들기로 결심했다.
가장 두려웠던 건 ‘나’를 못 믿겠다는 거였다. 장편을 처음 찍는 데다, 20명 넘는 스태프를 끌고 가야 했다. 내가 이 사람들에게 믿음을 줄 수 있을까, 실패하면 어떡하지. 그게 제일 무서웠다. 그럼에도 영화를 만들었고, 그렇게 <레인보우>가 만들어졌다. 빠듯한 일정 속에 겨우겨우 완성했다. 도와준 친구들도 있었고, 중간에 나를 못 믿고 떠난 친구들도 있었다. 내가 신인이었고 경험이 없으니 서툴렀던 건 사실이다. 그렇게 만든 영화가 서울독립영화제에서 첫 상영됐다. 그걸 본 전주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가 영화를 가져가 상영했고, 상도 받았다. 이후 도쿄에서도 상영 기회를 얻었다. 그러면서 나한테 하나의 길이 열린 것이다. 이후 개봉까지 이어졌는데, 개봉 날에 연평도 사건이 터져서 폭격 소식이 뉴스에 도배됐다. 뭐 그것 때문만은 아니겠지만, 결국 관객 수는 5천 명도 안 됐다.
그래도 <레인보우>는 내게 길을 열어준 작품이었다. 이 영화를 보고 몇몇 분들이 나를 다시 찾아줬고, 그 인연으로 MBC 다큐멘터리 <여자 만세>를 만들게 됐다. 그리고 또 다음 작품 <명왕성>으로 이어졌다. <명왕성>하기 전에 이채민 조감독이 열심히 일을 해준 <순환선>이 의뢰가 와서 찍기도 했다. 그건 원래 <가족시네마>라는 옴니버스 중 한 편이었다. 특히 지하철씬의 경우, 이채민 조감독과 연출부 친구가 여러 장소를 찾아다닌 덕에 정말 아름다운 장면을 만들 수 있었다.
“교사였기에 만들 수 있었던 영화”
<레인보우> 이후에 <명왕성>(2012)을 만들었다. 두 작품은 스타일이 완전히 다르다. 그래서 <레인보우>를 좋아했던 관객 중 일부는 <명왕성>을 보고 “이건 아닌데…” 하며 낯설어했다. 갑작스러운 스타일 변화처럼 보였겠지만, 사실 내가 정말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처음부터 <명왕성> 쪽에 가까웠다. 오랫동안 학교에서 교사 생활을 하며 느꼈던 입시 중심 경쟁 시스템에 대한 환멸, 그 감정을 언젠가는 꼭 영화로 만들어야겠다고 마음먹고 있었다. <명왕성>은 그 오랜 생각의 결과물이다.
예산은 <레인보우> 때보다 훨씬 넉넉했다. <레인보우>가 약 20회차에 소규모 예산으로 촬영됐다면, <명왕성>은 약 3억 5000만원 정도에 30회차 규모로 진행됐다. 스탭도 늘고 그립 장비도 처음 제대로 사용해봤다. 당시 출연진 중엔 지금 보면 놀라운 이름들이 많다. 김꽃비 배우를 비롯해서 주연 이다윗은 당시 19살, 성준도 20살 정도였고, 요즘 주목받는 류경수 배우도 군 입대 전이었던 20살 시절이었다. 조성하 선배님과 함께 나오는 형사 역할의 박해준 배우 역시 지금은 굉장히 잘 나가지만 그땐 거의 첫 출연에 가까웠다. 지금 보면 함께했던 배우들이 모두 왕성하게 활동 중이라 개인적으로 굉장히 뿌듯하다. <레인보우>가 내 자전적인 이야기였다면 <명왕성>은 교사로서의 체험을 영화라는 형식 안에 녹여서 창작해본 첫 시도였다.
“저 친구는 왜 여기 와 있을까?”
<명왕성> 이후 다큐멘터리를 하나 만들었는데 그보다 앞서 써둔 시나리오가 있었다. 그게 바로 <마돈나>(2014)였다. 시작은 아주 사소한 장면에서였다. 시나리오 작업 중이던 어느 날, 동네 카페에서 한 젊은 여성 노숙자를 보게 됐다. 여름이었는데 해진 파카를 입고 커피도 주문하지 않고 앉아서 자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저 친구는 왜 여기 와 있을까’ 하는 생각이 계속 맴돌았다. 그 잔상이 오래도록 떠나지 않아서 결국 시나리오를 쓰게 됐다. ‘미나’라는 인물을 만들고, 미나를 돌보는 ‘혜림’이라는 간호조무사와의 이야기가 VIP 특수 병동을 배경으로 벌어지는 영화다. 미나 역은 원래 통통한 체형의 배우를 캐스팅하고 싶었지만 그런 이미지에 맞는 배우가 많지 않았고, 결국 신인 배우 권소현을 캐스팅했다. 그녀는 현장에서 엄청나게 열심히 했다. 영희 씨처럼 이미 활약 중인 배우들과 연기 호흡도 전혀 뒤처지지 않았고 폭발적인 연기를 보여줬다. 지금은 아주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배우다.
<마돈나>도 예산은 4억 원. 지금도 4억으로 영화를 만드는 게 쉽지 않지만 당시도 마찬가지였다. 넉넉한 예산이 아니었기 때문에 현장은 빠듯하고 팽팽했다. 지금 봐도 연출적으로도 아쉬운 지점이 있고 조금만 더 여유 있게 찍었으면 좋았을 장면들도 있다. 한 번은 촬영 기간 중 내가 쓰러져서 응급실에 실려 간 적도 있었다. 그만큼 우여곡절이 많은 작품이다. <마돈나>가 2015년에 개봉했으니 벌써 10년이 됐다. 내 골동품이다. (웃음)
“식물도 동물 같지 않을까”
<유리정원>(2016)은 <마돈나> 이후에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했는데, 뭔가 식물에 관한 영화를 하고 싶어서 시작했다. 예전에 한 번 숲에 간 적이 있었다. 해외에 있는 숲이었는데 우리나라 숲과는 달랐다. 훨씬 울창하고 거대한 숲이었다. 그 안에 들어갔을 때 무서웠다. 저 안에 뭔가 있을 것 같은 공포감이 들었다. 그 기억을 떠올리면서 ‘식물도 동물 같지 않을까’ 하는 상상 속에서 <유리정원> 시나리오를 썼다. 사실 이 작품은 여주인공이 연기하기 어려운 영화였다. 그런데 다행히 문근영 배우가 나무를 좋아한다고 했다. 어릴 적에 뒷산에 가서 나무와 대화도 하고 나무 앞에서 노래도 불러줬다고 했다. 그래서 이 어려운 작품을 보고 흔쾌히 수락했고 함께 영화를 찍게 됐다. <유리정원>은 내 인생에서 가장 많은 예산이 들어간 영화다. 10억짜리 영화였다. 하지만 예산이라는 건 항상 그런 것 같다. 많아 보여도 항상 부족하다. 상업영화를 하는 분들도 똑같이 그렇게 느낀다고 한다. 아무래도 이 작품은 컴퓨터 그래픽으로 고목나무 같은 요소들을 표현해야 했기 때문에 CG 영역이 많았다. 그래서 예산적으로 좀 힘들었지만 CG팀에서 많이 도와줘서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유리정원> 촬영 현장(왼쪽)과 스틸컷 ©WDN
“그냥 쓰고 있던 영화”
<젊은이의 양지>(2019)는 아마 많은 사람들이 알겠지만 실습생들이 사망했던 사건들을 계기로 구상하게 된 작품이다. 그 기사를 보고 나서 쓰기 시작했는데 주변에서는 다들 말렸다. “어두운 얘기 이제 그만해라”.
“투자도 안 되는데 왜 또 이런 얘기를 하냐”. (웃음) 근데 그냥 저는 쓰고 있더라고요. 어려운 이야기지만 꼭 해보고 싶다는 마음이 강한 작품이었다. 당시 구의역 스크린도어 사망 사고와 전주 콜센터 실습생 사고가 뇌리에 박혀있었고, 작품 촬영 직전에 고 김용균 씨 사고가 발생했었다. 그 기억들이 안고 이 영화를 만들게 됐다. <유리정원> 이후에 만든 작품이고 2019년 상반기에 촬영했다. 개봉은 코로나 시기인 2020년에 했다. 이 영화가 개봉했을 때 어떤 분이 “올해 가장 어두운 영화다”라고 하셨다. (웃음) 특히 코로나 때 개봉을 했으니까. 용산 CGV에서 기자시사회를 하는데 충격적이었다. 모두가 마스크를 쓰고 앉아 있는 장면. 그 비주얼은 지금도 초현실적인 장면처럼 선명하게 남아 있다. 그리고 이 영화 이후에는 좀 밝은 걸 찍어야 하나…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된 작품이다. 특히 <젊은이의 양지>를 찍고 나서는 영화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됐다. 영화를 만든 지 굉장히 오래됐는데 과연 영화란 나에게 무엇일까 이런 질문을 하며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졌다.
“기세를 몰아 다음 영화로!”
그 시간을 거치면서 자연스럽게 <오마주>를 쓰게 됐다. 사실 쉬는 걸 잘 못 하는 것 같다. <젊은이의 양지> 끝나자마자 그해 겨울에 <오마주> 트리트먼트를 완성하려고 짐 싸들고 동해로 갔다. 식음을 전폐하진 않고 잘 먹고 잘 자면서 한 4일 정도를 숙소에서 지내면서 이거 진짜 끝내고 돌아가자는 생각으로 작업을 했었다. 그러고 제작지원을 냈는데 처음엔 떨어지다가 각 지역영상위에서 지원을 좀 받고 2차 영진위에서 지원을 받아서 찍게 됐다. 이 작품은 정말 힘들었던 게 코로나 때 촬영했다는 점이다. 한 명이라도 코로나에 걸리면 올 스톱을 해야 되니까. 특히 저예산 영화는 스톱이 되어버리고 며칠 딜레이가 되면 거의 못 찍는 거나 마찬가지다. 그래서 또 빚더미에 앉게 되려나 조마조마했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이정은 배우 등 많은 스탭들 덕에 무사히 완성을 했다.
신수원 감독 X 이채민 감독 대담 및 질의응답
현장 사진 ©WDN
이: 이번 작업노트를 준비하면서 감독님 영화를 다시 한번 연달아 보게 됐는데 <명왕성>, <마돈나>, <유리정원> 세 편을 이어서 봤더니 정말 어둡다는 걸 체감했다. <젊은이의 양지>도 마찬가지로 영화 속 캐릭터들이 뭔가 상상할 수 있는 어둠의 끝까지 가는 것 같았다. (웃음) 보통 시나리오를 쓸 때 이 인물은 어떨까 상상하고 추적하면서 쓰지 않나. 감독님은 이 어둠 속 캐릭터들을 어떻게 끝까지 밀고 나가는지 그 과정이 궁금하다.
신: 그동안 GV 하면서 질문을 많이 받아봤는데, 이제까지 받아본 질문 중에 제일 어려운 것 같다. (웃음) 저도 잘 모르겠는데… 만약 끝까지 안 갔다면 관객 수가 더 많이 들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했었다. (웃음) 그래도 생각해 보자면, 인물을 상상할 때 현실 속에서 단서를 많이 찾으려고 하는 것 같다. <명왕성> 같은 경우 개봉 당시에는 비현실적이라는 소리를 들었는데, 지금은 오히려 현실 같다는 소릴 듣기도 한다. 내가 선생을 했다 보니 학교폭력은 늘 현실에서 마주하는 것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입시 경쟁 등 여러 아이들의 군상을 봐왔던 기억을 떠올리면서 아이들이 겪었던 상처를 이야기로 드러내고자 했던 것 같다.
이: 지금까지 얘기를 들어보면 작품들 간에 제작 시기의 간격이 굉장히 타이트하다. 거의 2년 간격으로 저예산 영화를 꾸준히 개봉시켜왔는데 정말 부지런한 것 같다. 이번 작업노트 해시태그로 #루틴이없는게루틴 이라고 했는데, 이런 제작 일정을 감행하려면 감독님만의 시나리오 루틴이 있는 게 아닌지 궁금하다.
신: 정말 루틴이 없다. 그러니까 어떤 분은 하루에 꼭 몇 시간씩 앉아 있는다거나 그런 규칙을 정해놓는 경우도 있는데, 사실 되게 존경스럽다. 나는 놀 때는 거의 계속 논다. 예를 들어 시나리오가 안 써질 때 있지 않나. 그럴 때 괜히 가구 옮기고 청소하고 사람들 만나러 다니고 그런다. 그런데 머릿속에 구상은 많이 하는 것 같다. 그러니까 공상을 많이 하는 스타일이다. 어떤 날에는 아침에 정신이 제일 맑을 때 (전날 술을 안 먹었으면) 일어나자마자 컴퓨터 앞에 앉아서 뭔가 떠오르면 다이어리처럼 써놓고, 그다음에 폴더별로 아이템을 나누어 놓기도 한다. 그러고 간간이 메모들을 하면서 뭔가 머릿속에서 구상이 되면 시놉시스를 쓰기 시작한다. 근데 대부분 막힌다. 그래서 예전에는 그냥 시나리오부터 막 쓴 적도 있다. 시놉은 없는데 그냥 “아~ 이 씬 너무 좋아~” 이러면서 신나서 쭉쭉 써서 10씬까지 쓰는 거다. 근데 그 다음이 안 풀린다? 그러면 이제 덮어버린다. 그럼 그 이야기는 이제 ‘무제’ 폴더에 남아버리는 거다.
<마돈나>도 쓰는 데 상당히 오래 걸렸다. 다른 프로젝트를 동시에 구상하면서 썼었는데, 처음에 시나리오 초고를 쓰고 나서 맘에 안 들어서 고민하던 중 MBC에서 미혼모 다큐멘터리 제안이 들어와서 그걸 만들었다. 원래 <마돈나> 주인공으로 미혼모를 생각하고 있었어서 소재가 비슷하니까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그때 연출료로 받은 돈으로 후배 작가에게 계약금을 주고 각색을 시킨 후 나는 다큐를 촬영했다. 그 다큐를 만들면서 실제로 미혼모들을 많이 만났고, 다큐 작업이 끝난 다음에 <마돈나>를 다시 수정했는데 그때 시나리오를 많이 바꿨다. 영화의 패턴이 그려지면서 자신감이 붙었다. 자신감이 붙으니까 밖에 보여주기 시작했고 투자를 받았다. 근데 어두운 이야기이다 보니 일반 상업영화 메이저 투자사에는 거절당할 게 뻔해서 안 가져갔다. 대신 중소 벤처 투자사에 가져갔고 그 중 <명왕성>을 좋게 본 분들 덕분에 4억 정도 투자를 받게 됐다.
아무튼 나는 시나리오 쓰는 데는 루틴이 없고, 대신 진짜 진짜 잘 지키는 루틴이 하나 있다. 바로 아침에 일어나서 커피 마시는 거. 그거는 커피 떨어지면 큰일난다. (웃음) 빈 속에 커피 마시는 거 안 좋은데 커피에 빵 먹는 거는 한 번도 어긴 적이 없다. 안그래도 작업노트 사전 회의할 때 루틴 얘기가 나와서 집에 돌아가는 길에 막 반성이 되더라. 그래서 루틴을 가져보려고 시도를 했는데 딱 세 번 지켰다. (웃음)
이: 영상원 입학에서 <레인보우>를 만들기까지 10년이 걸렸다. 말이 10년이지, 그 시간을 어떻게 지나왔을지 궁금하다. 10년 동안 안 되면 스스로를 의심하게 되지 않나. 그런데 어떻게 계속 버티고 붙들 수 있었는지?
신: 2000년에 영상원 입학하고 한 1년은 즐겁게 학교 생활을 하다가 나이 먹고 학교 다니니까 되게 불안하긴 했다. 그래서 어떤 영화사에서 작가를 모집하는 거에 지원을 했었다. 거기서 공동 작가를 구성한다고 해서 들어갔었고, 또 어디서 각색 작가 구인한다고 소개해주면 또 돈 벌어야지 하고 들어가고. 그러다 보니 학업에 소홀해졌던 것 같다. 근데 아무리 각색 작업을 해도 당시엔 아마추어니까 좋은 조건으로 작업을 할 수가 없었다. 일을 했는데 돈을 제대로 못 받는 경우도 있었다. 그때 스스로 작가로서 능력이 없는 건 아닌지 자괴감이 들기도 했다.
그러다가 졸업할 때가 되니까 아무것도 남는 게 없는 것 같아서 차라리 학교라도 충실히 다니면서 내 작품을 만들자고 생각해서 외부 활동을 그만두고 학교로 돌아갔다. 당시에 송길한 감독님과 홍상수 감독님이 지도교수였다. 학교로 다시 돌아가서 막 학기에 시나리오 두 편을 기획했는데 그중 하나는 신생 영화사에 팔려서 투자도 받았다. 그때 처음으로 천만원 가량의 계약금을 받았었다. 근데 그동안 작가 생활이 너무 힘들었기 때문에 저절로 연출을 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왜냐하면 남의 거는 마음에 안 든다고 하면 작가 입장에서는 잘리면 끝이기 때문에. 근데 당장 연출을 맡기에는 단편 경력뿐이니 제작사에서 다른 감독을 찾아보겠다고 하면서 1년이 그냥 지나갔다. 그러다가 감독이 없어서 나보고 직접 연출하라고 했었는데 그때 영화 시장이 좀 안 좋아지고 있었다. 그래서 작품을 준비만 하다가 2,3년이 후딱 지나버렸다.
그러고 나서 이제 음악 영화를 해보겠다고, <레인보우> 안에 등장하는 어떤 밴드의 이야기를 시나리오로 썼었다. 내 어두운 영화들만 보면 이해가 안 되겠지만, 그건 10대 성장물의 코미디였다. 그걸로 또 어떤 회사에 들어갔다. 그랬는데 역시나 1년 동안 투자는 안 되고 결국 다시 회사를 나오는 속 쓰린 경험을 했다. 그 시나리오를 들고 1년을 돌아다닌 때가 2008년이다. 그땐 한국 영화 산업이 거의 사양길로 들어섰을 때다. 충무로 투자사나 제작사들이 다 무너질 때. 그렇게 거절에 거절을 당하고 그때 내가 40대 초반이었는데 도저히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당시에도 회사에서는 나왔지만 답답한 마음에 홍대와 합정, 펜타포트 락을 떠돌면서 인디 밴드들을 취재했었다. 당시 울산에서 밴드 하겠다고 상경한 <토닉>이라는 밴드가 있었는데 원래 국카스텐 공연을 보고 취재를 하러 갔다가 그 친구들의 일상을 캠코더에 담기 시작했다. 이채민 감독도 그때 알게 되었고 노유난이라는 드러머는 <레인보우> 이후 연출한 MBC 다큐 <여자만세>에 출연한다. 인디 밴드 친구들을 취재하면서 이후, 음악영화를 준비하는 감독 이야기를 다큐로 만들려다가 자연스럽게 시나리오로 이어졌다. 그게 <레인보우>의 시초가 되었고 ‘이제는 진짜 끝장을 보자!’는 억울한 마음으로 만들게 되었다.
질문: 작가와 연출은 서로 다른 역량을 요구한다고 생각한다. 작가는 어쨌든 혼자 글을 쓰면 되지만, 연출은 협업이기 때문에 필요한 자질이 다르지 않나. 감독님이 생각하는데 현장에서 감독의 자질이 무엇인지 궁금하다. 그리고 이전에 교사라는 안정적인 직업을 갖고 있었는데 어떤 확신으로 퇴직을 선택하게 됐는지도 궁금하다.
신: 감독으로서의 자질이 뭐가 필요한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 이전 작품에서 했던 실수를 다음에는 안 해야지 하는 것도 실천이 잘 안 되더라. 다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소통’이다. 배우와의 소통, 스탭들과의 소통이 중요하고, 현장에서 감독으로서 내가 이건 꼭 해야지 하는 것들을 지키는 힘. 현장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내 편이 될 수는 없기 때문에 내가 찍고 싶은 걸 설득하는 것도 중요하다. 그리고 감독의 에너지에 한계가 있기 때문에 눈앞에 처한 상황에서 우선순위를 두는 것도 방법이다. 예를 들어 ‘나는 이 장면에서 배우만 볼 거야’라고 한다면 다른 스탭들에게 다른 부분을 알아서 잘 맡아달라고 소통하고 설득하는 거다. 현장을 많이 겪어도 계속 스스로의 부족함을 느끼지만 그건 인간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통하려는 노력이 가장 중요하다고 본다. 왜냐하면 거기서 나만 예술가가 아니기 때문이다. 사실 모두가 영화를 만들기 위해 모인 아티스트들이니까.
질문: 감독님의 영화들은 주로 자전적인 경험에서 출발하는 것 같다. 나 또한 자전적인 이야기를 많이 쓰는데, 가끔 앞으로도 나는 내가 보지 못한 것, 겪지 못한 것을 시나리오로 쓰지 못하게 될까 봐 걱정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내 이야기가 아닌 것들로 시나리오를 쓰는 연습을 해야 하나 그런 고민이 있다.
신: 나는 정답이 없다고 생각한다. 사실 <레인보우>를 쓰기 전에는 남의 이야기로 시나리오를 썼다. 특히 제작사에서는 기획 아이템을 던져주니까. 근데 그때 홍상수 감독님이 해준 얘기가 있다. 내가 ‘왜 감독님은 늘 술자리에서 벌어지는 그런 일들, 아주 자전적인 것들만 영화로 찍냐’고 질문했던 것 같다. 감독님은 자전적인 것이 내가 가장 잘 아는 것이고 그게 가장 강한 이야기이자 진솔한 이야기라고 답했던 게 기억이 난다. 내 경험만 해도 <레인보우> 전에 어떤 사이클링 선수 이야기를 쓴 적이 있는데, 제작사에서 이거 당신이 잘 아는 이야기냐고 묻더라. 그때 나는 선뜻 대답할 수 없었다. 자신이 없었으니까. 근데 <레인보우>는 진짜 마지막 카드였으니까 그냥 내 얘기를 한번 써봐야겠다고 결심했다. 근데 온전히 내 얘기는 재미가 없으니 내가 주변에서 보고 들은 것들을 조합해서 픽션으로 쓰게 되었는데, 그 과정이 재밌었다. 내가 경험한 것과 경험하지 않은 것을 어떤 화합물처럼 만들어가는 과정. 그 시나리오를 쓰면서 좀 새로운 공부를 하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이후에 누가 시나리오가 잘 안 풀린다고 하면 당신 얘기를 먼저 써보길 권고한다.
이: 기다림의 10년과 장편 데뷔 후 20여 년 동안의 이야기를 쭉 들어봤는데, 개인적으로 감독님과 작업했을 때 좀 낭만적으로 기억하고 있는 말이 있다. 감독님과 오랫동안 작업한 PD님이 감독님과 했던 대화인데. 자기는 원래 상업영화 PD만 하다가 영화판을 보고 ‘아 이제 여기 다 똥밖에 없어’ 하면서 하산을 하고 있는데 누가 거길 올라오고 있었다고 했다. 근데 그게 신수원 감독님이었다고. 그래서 PD님이 감독님에게 여기 똥밖에 없다고 했더니 감독님이 ‘나는 똥 치우러 가는데?’라고 대답해서 그때 만남을 계기로 <명왕성>을 찍게 되었다고 하더라. (웃음) 그렇게 지금 20년을 걸어왔는데 오는 길에 진짜 똥이 많았는지, 아니면 감독님이 똥을 좀 치웠는지. 그리고 이제 또 똥 치우러 가려고 여기 앉아 있는 분들도 많으니까 마지막으로 후배 감독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
신: 치울 똥이라도 있으면 좋겠는데 요즘은 전멸했잖아요. 그래서 너무 안타까운데, 그럼 뭐 우리가 똥을 싸고 또 치우면 어떨까요? 우리가 똥을 싸러 가죠 뭐. 그러면 좋을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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