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FIRST
나의 첫 영화 연출기
[여성감독 작업노트] 할머니와 카메라와 나
<씨앗의 시간> 설경숙 감독
퍼플레이 / 2024-04-26
여성감독네트워크 WDN에서 지난 4월 6~7일 케이스 스터디 <여성감독 작업노트>를 진행했습니다. 이번 프로그램은 극영화, 다큐멘터리를 연출한 여성 감독들이 장편영화 작업의 어려움과 문제해결 과정을 공유하는 자리였는데요. 감독의 발표 이후 대담과 자유로운 질의응답 시간을 가지며 생생한 제작 스토리와 실질적인 꿀팁을 나눴답니다. 서울국제여성영화제와 퍼플레이의 협력으로 진행된 이번 행사에서 나온 이야기들을 글로 함께 만나보시죠 :) |
<여성감독 작업노트: 가장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영화만들기 A-Z> -일시: 2024.4.7.(일) 오후 2~5시 -장소: 서울시여성가족재단 아트컬리지3 -발표: 설경숙 감독 -사회: 박마리솔 감독 |
[발표]
설경숙: 다큐멘터리 <씨앗의 시간>은 옛날 씨앗으로 농사하고 계신 어르신 농부님들이 주인공인 영화다. 농사에 어렴풋이 관심이 있었고, 서울 교외에 살면서 텃밭을 가꾸기 시작하며 주변에 호미질을 하시는 할머니를 찍어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조사 도중 토종 씨앗이 없어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고 이걸 영화로 만들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씨앗을 수집하는 단체를 따라다녔다. 그러다 노년의 농부님들이 갖고 있는 씨를 수집해야 한다는 위급함을 알게 됐다. 2018년 가을에 단체를 따라다니다가 만난 분들을 섭외하려고 2019년 봄에 찾아갔더니 그중 절반 이상이 농사를 그만두시거나 돌아가시거나 밭이 없어져 있었다. 그래서 이 문제가 정말 시급하구나 싶어 얼른 찍어야겠다 생각하고 시작하게 됐다.
그러고 나서 보니 찍어야 하는 대상들이 제가 너무 모르는 것들이었다. 특히나 저는 할아버지도 안 계시고 어르신들은 말이 안 통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서 대화를 어떻게 하는지도 몰랐다. 시골에서 자라긴 했지만 집안이나 주변에서 농사하는 걸 본 적도 없었다. 결국 오랜 삽질이 시작됐다. 이 작업을 해야겠다고 생각한 게 2018년 말이었고, 인물들을 제대로 찍기 시작한 건 2020년이다. 2년간의 삽질이 있었던 거다.
‘카메라를 든 여자’에 대한 선입견을 깨는 게 가장 큰 일이었다. 저는 최대한 자신을 낮추려 노력했다. 그랬더니 많은 사람들이 할 일 없는 여자라고 생각하더라. 처음에는 편하게 보니까 좋기도 했는데 이게 쌓이다 보니 ‘남자가 똑같이 카메라를 들고 왔어도 이랬을까?’라는 생각이 들면서 전문직 여성을 인정하지 않는 사회적 분위기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됐다.
설경숙 감독이 ‘여성감독 작업노트’에서 발표를 하고 있다. ©️WDN
영화 제작의 ‘진짜’ 시작은 제작비를 받으면서였던 것 같다. 영진위 사업에 지원하면서 리서치 촬영본을 제출했는데 인터뷰에서 ‘촬영감독은 꼭 있어야겠다’고 하더라. 돈을 받았으니 제대로 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나중에는 그 돈이 딜레마가 됐다. 그전에 단편 작업을 했을 때도 대중성은 생각하지 않았고 그 작품은 비대중적인 영화제에서 상영됐다. 그래서 그런 것에 대해 별 생각이 없었는데 돈을 써서 제대로 만들어야 한다는 부담감이 생기니까 자꾸 외부에 포커스를 두게 되고 나는 이걸 혼자 하기에 모자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지원금을 받지 않는 게 좋겠다는 생각은 아니지만, 작품의 내용과 형식을 정하는 데 있어 갈팡질팡하게 만들기도 했다.
이 영화를 상영하면서 가장 많이 받은 질문이 등장인물 섭외에 관한 것이었다. 그런데 다큐에서 섭외라는 말은 맞지 않는 것 같다. 섭외보다는 ‘관계 맺기’라고 하고 싶다. 노년의 농부들과 관계 맺기는 상상과 정말 많이 달랐다. 촬영에 응해주셨던 할머니가 한 분 계시는데, 제가 다른 할머니들을 발견하고 얘기를 하려고 하면 ‘그냥 가, 그냥 가’ 하시더라. 나중에 알고 보니 동네에 여성 농민 공동체가 있는데 본인만 주인공이 되는 게 민망했던 거다. 그걸 나중에야 깨달았다. 전라도 화법인지 모르겠는데, 찍고 나서 먹을 것도 주시고 잘해주시면서 ‘또 와~’ 하시더라. 그런데 알고 보니까 ‘또 와’가 ‘이제 가라’는 말이었다. 그런 식의 소통 방식을 알아가는 데 한참 걸렸다. 거의 1년이 지나고 알게 됐던 것 같다.
그분에게는 장면을 어떻게 찍고 무엇을 표현하는지보다도 이 사람이 지금 괜찮은 사람인가가 중요했다. 그래서 관계 맺기가 굉장히 필요했다. 개인이나 가족 혹은 마을이나 공동체에 스며들기 위해서는 씨앗 운동을 하는 모든 분들에게 받아들여져야 하는 게 있었다. 그래서 단체 대표님뿐만 아니라 단체 전체에 제가 갖고 있는 생각을 보여줘야 했다. 한 1년 정도 지나고 나니까 저도 반 농부가 되어서 진짜로 궁금한 것들을 물어보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그분들에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이 됐던 것 같다. 그것이 관계 맺기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됐다. 그때부터 할머니, 할아버지 농부님에게도 제가 이 일을 배우고 싶어 하는, 같은 일을 하려는 사람이라는 인식이 되면서 많은 걸 담을 수 있었다.
설경숙 감독이 ‘여성감독 작업노트’에서 발표를 하고 있다. ©️WDN
작업 과정에 PD님도 계셨는데 현장에서는 촬영감독과 둘이 다녔다. 촬영감독은 엉망이었던 제 촬영본을 모니터링하면서, 저는 실수라고 생각했던 이상한 것들을 골라내며 ‘이걸 왜 이렇게 하셨냐’고 물어봤고, 덕분에 무의식중에 이것을 이렇게 보고 있었다는 걸 깨닫게 됐다. 그리고 진짜 원하는 것을 향해 계속해서 좁혀가는 경험을 했다.
다만 촬영감독이 중간에 들어왔기 때문에 촬영감독과 등장인물들 간의 관계 맺기 시간이 필요했다. 한 번은 일정이 겹쳐서 촬영감독을 혼자 보낸 적이 있다. 그런데 다 찍고 와서는 할아버지 기분이 안 좋으신 것 같다고 하더라. 그래서 나중에 할아버지께 여쭤보니 기분이 안 좋으셨던 게 맞았다. 그분은 뭘 하더라도 사람 간의 관계를 맺은 후에 가능한 분이었고, 영화 촬영을 일로 생각하지 않으셨던 거다. 그걸 몰라서 실수한 경우였다.
영화 제작 과정에서 롱테이크를 많이 썼는데 농부님이 봄에 호박씨를 심는 장면을 편집하면서 생각했다. 이 장면을 참을 수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이 영화를 볼 수 있느냐 마느냐가 결정될 것이라고. 제가 피칭할 때도 해당 장면을 싫어하는 분이 계셨다. 할아버지가 호박씨를 심는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게 아니라 어떻게 씨를 꺼내고 깎는지를 보여줌으로써 인물이 가진 느낌이 나올 거라고 생각했다. 또 인물과 배경이 같이 나오길 바라는 마음에 이런 식으로 찍었는데,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그런 구도가 이상했던 거다. 이 구도가 제 영화에 계속 나오는데 주구장창 비판받았던 부분이다. 하지만 GV를 할 땐 가장 흥미롭다고 이야기된 컷이기도 했다.
첫 장편을 막무가내로 끝내고, 아직 끝나지 않은 것 같기도 하지만, 알게 된 것은 아무도 모른다는 것이다. 영화를 표현할 최선의 방법은 내가 가장 잘 안다는 것, 그리고 다큐 작업은 항상 이렇게 삽질의 연속일 것이란 걸 알게 됐다.
[대담 및 질의응답]
박마리솔(이하 박): <씨앗의 시간> 이전 작품이 <씨앗의 이름>인 것으로 알고 있다. 전 작품도 씨앗에서 시작했고 제작사 이름도 토란웍스이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 영화에 등장하는 씨앗들 이름이 사람 이름처럼 나오더라. 감독님에겐 씨앗이 대체 무엇인지 궁금하다.
설경숙(이하 설): 당연히 있다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없어진 것들. 우리도 모르게 빼앗긴 것. 이 작품을 해야겠다고 생각한 게 지방의 씨앗도서관을 갔을 때였다. 도서관 홍보 담당자님이 우리가 오늘 먹은 배추, 무 등이 씨가 나지 않게 개량되어 있는 것들이라고 말씀해주시더라. 이런 이야기는 어렴풋이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우리의 삶에 팽배해있다는 건 몰랐다. 씨앗 심는 게 지금 농사 과정에선 없다. 이 당연한 게 없다니.
박: 2020년부터 제대로 촬영을 시작하셨다고 하셨는데 ‘삽질의 시간’이 얼마나 걸렸나.
설: 2018년 하반기부터 조사하기 시작했으니까 2년 정도 됐던 것 같다.
박마리솔 감독(왼쪽)과 설경숙 감독이 대담을 나누고 있다. ©️WDN
박: 처음 촬영하실 땐 제작지원을 받는 상황은 아니었고 사비로 촬영하신 것 아닌가. 화순과 평택을 오가면서 촬영하셨는데 어떻게 1년이란 기간을 버틸 수 있었을까 궁금했다. 영화가 되겠다고 생각하게 된 계기가 있나?
설: 이건 되겠다기보다는 해야 한다는 생각이 강했다. 이 얘기를 꼭 하고 싶었다. 개인적으로도 공백이 많고 나이도 많아서 제작지원 받기가 힘든 상황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첫 장편은 죽이 되든 밥이 되든 혼자 하자고 결심하고 시작했다. 이거 안 되면 깨끗이 포기하자는 마음을 갖고 있었다.
박: 친인척이 있는 것도 아니고 모르는 사람에게 가서 ‘난 어떤 사람이고 무엇을 찍는다’는 이야기를 하는 건 쉽지 않은데, 어떻게 인사를 하고 시작했나.
설; ‘씨드림’이라는 단체가 큰 힘이 돼줬다. 그 단체 없이 혼자 갔다면 상황이 많이 달랐을 것 같다. 처음부터 어르신을 찾은 건 아니었고 어떤 상황인지 보기 위해 단체를 따라다녔다. 그 단체가 어르신들을 찾아다니면서 옛날 씨앗을 수집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거기서부터 시작했던 것 같다. 실제로 씨앗수집단원이 돼서 수집하러 다니기도 하고. 그중에서 만난 어르신을 다시 찾아가서 인사를 드렸다.
박: 일상이 반복되어 찍힌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반복되는 일상을 하나의 영화로 구성한 이유가 있나.
설: 씨앗과 관련된 이슈에서 꼭 담아야 할 것이 그것이라고 생각했다. 처음에는 씨앗이 많이 사라지고 있다는 이슈를 담아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어르신들을 보다 보니까 씨앗을 지켜온 건 그분들의 반복된 일상이었다. 그분들은 70년 동안 매일 해왔다. 우리는 ‘이거 하면 얼마 벌지?’ ‘뭘 얻을 수 있지?’라는 생각으로 하는데 그분들은 그런 생각 없이 나의 삶이라고 생각하면서 즐겁게 해오신 거다. 노동을 대하는 태도가 실제로 씨앗을 지켰다고 생각한다.
설경숙 감독(오른쪽)이 질문에 답변을 하고 있다. ©️WDN
박: 촬영감독을 섭외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게 무엇이었나. 감독은 자신이 찍고자 하는 바를 촬영감독에게 공유해줘야 하는데 소통 과정은 어땠는지 궁금하다.
설: 제 영화가 뚜렷한 내러티브가 있는 게 아니라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촬영감독님은 그것을 이해했다. 고양이 다큐멘터리를 연출한 감독이기도 해서 말로 소통되지 않는 고양이를 오랫동안 찍은 사람이라면 이 작업에서 필요한, 상황과 하나가 되는 걸 잘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박: 촬영감독님과 사전에 어떤 이야기를 주고받고 촬영에 들어갔나?
설: 처음에 몇 회차를 찍으면서 제가 원하는 게 뭔지 구체적으로 얘기했다. 촬영감독이 처음에는 ‘오늘은 깨를 심는다’고 하면 깨 심는 걸 위주로 찍었다. 그런데 저는 깨를 심는 과정보다는 할아버지가 깨를 꺼내기 전에 주섬주섬 준비를 하고, 신발을 다 신고 나서 앉아있는 등의 움직임이 더 중요하다고 얘기했다.
질문자: 관계 맺기에 대해서 말씀해주셨는데, 출연자분들마다 성격이 다르시지 않나. 어떤 분은 화도 냈다고 하셨는데 어떻게 풀었는지 궁금하다. 그리고 친해진 후에 와이드샷을 찍는 것이 불편하지는 않았나.
설: 처음에는 어려운 기간이 있었다. 대부분 1, 2년 찍을 거라고는 생각을 안 하신다. 본인이 아는 얘기를 다 해주고 나면 “찍을 게 또 있나?” 그러신다. 근데 그때 철판 깔고 계속 가야 한다. 어르신들의 주변 분들에게 신뢰를 얻는 게 중요했다. 처음에는 출연자 선물만 준비해갔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출연자 분이 선물을 받고 나면 항상 친한 이웃 분들과 나눠 드셨더라. 커피 한 잔이 있어도 세 잔으로 나눠 함께 드시는 식이었다. 그걸 알고 난 뒤 출연자 분 것만이 아니라 주변의 친한 이웃 분에게도 선물을 드렸다. 그러다 보니까 출연자와 주변 분들에게 신뢰를 얻게 됐다.
거리에 대한 건 일반적으로 알고 있던 것과 좀 달랐다. ‘보통 멀리서 찍는 게 더 편하지 않나. 가까이 갈 때까지 시간이 필요했겠다’는 질문을 전에도 받은 적이 있는데 저는 그렇지 않았다. 발표 초반에 보여드린, 할아버지가 나무 깎는 장면은 아주 초기에 찍은 것인데, 그런 식으로 제가 인물 바로 앞에서 쭈그린 채 카메라를 대고 있는 게 그분에게는 더 편했다. 미디어에 익숙한 사람들은 내 얼굴이 스크린에 크게 나올 것이라는 생각에 불편해하지만, 그분들은 그런 인식이 있으신 게 아니었다. 또 제가 바로 앞에 있을 때 말도 더 편하게 할 수 있고 컨트롤이 가능했다. 그래서 초기에 찍은 컷은 인물들에게 바짝 붙어서 찍은 것이 대부분이다. 오히려 친해지면서 언제 카메라를 들어도 편해진 상태가 됐고, 그러면서 멀리서 찍을 수 있었다.
박마리솔 감독(왼쪽)과 설경숙 감독이 참여자의 질문을 듣고 있다. ©️WDN
질문자: 영화를 다 찍고 난 후 출연자와의 관계도 궁금하다. 이 아이디어에서 나아가 다른 걸 또 찍어볼 생각이 있나.
설: <씨앗의 이름>은 삽질하던 기간에 찍은 푸티지로 만든 비디오 설치 작업이다. 관계에 대해선 작업이 끝나기 전부터 걱정했다. 내가 언제까지 이렇게 올 수 있나 싶었기 때문이다. 계속 찍다가 영화에 안 들어간 분이 있는데 평택에 살고 계신다. 저는 서울로 이사를 왔지만 지금도 2주에 한 번씩 가고 있다. 한 열흘 있다 가면 너무 오랜만이라고 하시기도 한다. 화순에 계신 분과는 가끔 전화 통화를 하고 있다. 그런 식으로 촬영 때보다는 느슨하지만 꾸준히 관계를 이어가고 있다. 그렇게 관계 맺은 분들 중 편집 때 들어가지 않았던 분을 주인공으로 하는 짧은 작업을 해볼까 하고 있다.
박: 사계절의 흐름대로 이야기가 구성되는데 그 흐름 이전에 다른 구성이 있나. 어떤 이유로 그 흐름을 선택하게 됐는지 궁금하다.
설: 코칭 토론에서 “어떤 사건이 있으면 좋겠다”는 얘기를 들었다. 근데 제가 찍는 동안에 드라마틱한 사건이 없을 거라는 걸 알았다. 그런데 멀리서 볼 때는 농촌이 평화롭고 한적해 보인다고 생각할 수 있는데, 사실 한적함과는 정반대이고 정말 치열하더라. 날씨에 엄청 영향을 많이 받는 일이기 때문에 어떻게 될지 알 수 없고 한시도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그런 것들이 굉장히 드라마틱하다고 느꼈다. 그래서 그것들을 어떻게 전달할까 고심했다.
박: 다른 사람들은 별로라고 했지만 결과적으로 GV에서는 “이 컷이 좋았다”는 이야기가 많이 나왔다고 하신 것처럼 결국에는 내가 좋고 중요하게 생각하는 걸 끝까지 밀고 나가는 게 중요한 것 같다. 그것 말고도 모니터링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피드백을 주셨을 텐데 어디까지 어떻게 수용하셨는지도 궁금하다.
설: 처음에는 다 수용했다. 하지만 다시는 다른 사람들의 말을 다 받아들이지 않을 거다. 물론 촬영할 때 그 말들을 모두 수용한 건 아니지만 굉장히 흔들렸던 게 사실이다. 내가 경험이 부족하다는 인식이 깔려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제가 처음에 하고 싶었던 것들을 다 반영하지는 못했다. 그래서 다시 작업하게 된다면 누군가의 조언을 듣고자 할 때 그 사람이 머릿속으로 어떤 영화를 생각하고 있는지 구체적으로 들여다봐야 할 것 같다. 물론 조언해주시는 분이 경험도 더 많고 아는 것이 많겠지만 내 프로젝트의 장점에 대해서는 내가 더 잘 안다. 그러니까 다른 이들의 일반적인 조언을 다 들을 필요는 없다. 그 생각을 뒤늦게야 하게 됐다. 내 표현 방식에 대한 조언은 충분히 받아들이되 그 이외의 것은 유연성 있게 받아들여도 되지 않을까.
설경숙 감독(오른쪽)이 질문에 답변을 하고 있다. ©️WDN
박: 촬영과 편집 과정에서 무엇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나?
설: 체력이 많은 것과 연결된다. 뚝심을 갖고 원하는 것을 계속 추구하는 힘도 체력과 연관된다. 그리고 결과물에서 내가 상상하는 어떤 느낌적인 느낌. 그걸 구체적으로 말은 못 하더라도 자기만의 정답을 갖고 있는 게 좋다.
박: 사계절이 지나야 이 영화가 끝나는 거니까 영화가 끝난 지점은 꽤 명확했을 것 같은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이라고 정의하는 건 정말 어렵다.
설: 사계절 촬영한 걸로는 끝이 안 났다. 작업해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한 달을 담아야겠다’ 하면 한 달 찍어선 절대 안 된다. 이건 특히 농사였기 때문에 한 번 놓치면 다음 해로 넘어간다. 2년을 찍어도 모자랐다. 그래서 DMZ에서 프리미어 상영한 후에 다음 해까지 촬영했다. 편집하는 기간에 가보니까 달라지는 게 있기도 해서 좀 더 찍으면서 1년을 풍성하게 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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