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영화를 읽다

[WDN 여성감독 작업노트] 욕망과 절망의 망망대해에서 가망이라는 부표 찾기

<지옥만세> 임오정 감독

퍼플레이 / 2024-11-28


여성감독네트워크 WDN에서 지난 7월 28일 케이스 스터디 <여성감독 작업노트>를 진행했습니다. 감독의 발표 이후 대담과 자유로운 질의응답 시간을 가지며 생생한 제작 스토리와 실질적인 꿀팁을 나눴답니다. 서울국제여성영화제와 퍼플레이의 협력으로 진행된 이번 행사에서 나온 이야기들을 글로 함께 만나보시죠 :)
<여성감독 작업노트: 가장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영화만들기 A-Z>
-일시: 2024.7.28.(일) 오후 2~5시
-장소: 스페이스 합정
-발표: 임오정 감독

오늘 이야기할 제목은 [욕망과 절망의 망망대해에서 가망이라는 부표 찾기]이다. 영화를 생각하면 나는 기본적으로 망했다는 생각밖에 안 든다. ‘왜 하필 난 영화를 좋아해가지고 이 망망대해 같은 정말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그런 길에서 이렇게 헤매고 있지’라는 생각을 많이 하면서 ‘망’ 자로 라임을 살려봤다.

나는 단편 영화를 몇 편 찍었고, 여성 주인공의 이야기를 많이 다뤘었다. 필모그래피를 보면 첫 단편영화와 첫 장편영화 사이에 텀이 길다. 처음 영화감독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던 때와 첫 영화가 개봉하기까지 1995년부터 2023년까지 무려 28년이 걸렸다. 한 사람의 인생보다 긴 시간 동안 나는 이 망망대해에서 계속 헤맸던 것 같다. 첫 장편영화까지 긴 세월이 걸렸다. 영화를 찍겠다고 애쓰는 게 허망한 행위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원하는 행위를 한다는 생각을 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어떻게 그 가느다란 가망을 찾게 됐는지 나의 우당탕탕 영화 제작기를 얘기해보려고 한다.

단편영화
와 장편영화를 나는 시와 소설의 차이 정도로 굉장히 닮았지만 작법과 미학이 다르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단편영화를 보면서 좋다고 할 때의 머릿속의 그림들이 아마 장편영화에서 생각하는 것과 다를 거라고 생각한다. 단편영화는 좀 더 압축적이고 은유적이고 뭔가 질문을 더 던지는 것에 가까운 영화라면 장편영화는 훨씬 더 큰 이야기 안에서 많은 사건들과 캐릭터들이 움직이고 약간의 맺음말을 지어주는 이야기처럼 끝내게 된다. 그 두 개의 차이를 몸으로 인지하기까지 오래 걸렸다.

제작 시스템
우선 시스템이 달라진다. 단편영화는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의 예산으로 영화를 제작하곤 했는데 장편영화의 제작비는 훨씬 넘어선 단위가 된다. 어디서 그 자본을 찾아야 되는지를 모르겠다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됐다. 나의 경우에는 아카데미 장편 과정에서 아카데미 출신이 아닌 사람들도 장편영화 제작 지원을 받을 수 있다는 소식을 듣고 거기에 지원을 해서 4억이라는 예산을 받고 <지옥만세>를 찍게 됐다. 그 전에 찍었던 단편영화들은 지원을 받거나 개인적으로 무리해서 감당할 수 있는 정도의 예산이었고, 예산의 규모에 맞춰 경제적으로 찍을 수 있게 상상력이나 촬영할 범위를 제한시켰다. 그래서 처음에 4억이라는 예산을 듣고 못 할 게 없다고 기뻐했지만, 그것은 오판이었다. 제작비가 늘어나는 만큼 스태프, 일정, 장비 등등 전체적인 규모가 달라진다는 당연한 사실을 놓쳤던 것이다. 또 그만큼의 책임감, 만나야 할 관객의 수, 반응 등 모두 단편과 달라진다.

장편영화의 제작환경은 엄격한 편인데, 단편 작업할 땐 촬영 시간이 길어져도 늘어나도 용인해주는 분위기가 있었다면 장편영화 현장에서는 약속을 지켜야 한다는 압박감이 정말 컸던 것 같다. 무조건 맞춰야 하는 법적인 기준이 생겨버렸다는 게 나에게는 큰 난관 중에 하나였다. 시간 약속을 지키는 것이 감독의 엄청난 책임이라고 느꼈고 최선을 다해 약속을 지키려고 노력했다. 


<지옥만세> 포스터 ©WDN

시나리오 작업
나 같은 경우는 어떤 인물들을 떠올리고 그 인물이 어떤 상황에 빠졌다는 가정을 가지고 이야기를 찾아가는 편이다. 미리 계획하지 않고 이 인물들이 서로 어떻게 이야기를 주고받는지, 관계가 어떻게 형성되고 비틀리고 다시 화해하는지를 쓰면서 이야기를 발견해 나가는 스타일이었다.

그래서 영감을 받는 게 훨씬 중요했고 영감을 재빨리 놓치지 않고 채집했고, 내면의 다큐멘터리를 찍듯이 거의 채집하는 방식으로 단편을 썼다. 반면 장편영화는 계획하지 않고 쓸 수 없는데, 나 같은 파워 P인 사람들은 이 계획을 하는 게 정말 어렵다. 그래서 왜 시놉시스를 먼저 쓰고 왜 인물 전사를 개발을 먼저 하고 왜 트리트먼트 구조를 잡고 하는지, 많은 실패 끝에 그것이 맞다는 것을 깨닫고 서사 구조를 활용해서 쓰기 시작했다.

시나리오를 쓰는 사람들은 두 개의 특성이 있는 것 같은데 초고가 거의 절대 바뀌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초고의 핵심이 거의 한 번에 나오는 사람들이 있고, 계속해서 수정하면서 발전하는 사람들이 있다. 나는 완전히 전자인 사람이다. 초고의 완성도가 높다는 게 아니라 이야기 틀이 완성되면 그것을 정교하게 하기 위한 수정 방식을 택하는 사람이다.

<지옥만세>의 경우에는 제작사와의 관계, 예산 그리고 내가 가지고 있는 현실적인 한계에 의해 수정을 거쳤다. 영화 제작을 준비하면서 만나게 되는 새로운 사람들, 그들이 가져오게 되는 새로운 재능 혹은 특별한 공간을 받아들이면서 영화를 수정하게 되었다.

거울과 창
거울과 창은 내가 영화에 대해서 생각하는 이론이다. 특히 이야기는 결국에 자기 자신으로부터 출발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을 잘 찾아낼 수 있는 사람들이 좋은 재능을 가진 사람이다. 그런 식으로 접근해서 작업했던 단편영화들을 거울에만 집중했던 시절이라고 한다면, 거울의 네모난 프레임이 창으로 바뀌어서 소통의 창구가 되어 나와 하는 소통을 넘어서 관객, 인물, 스태프들과도 소통해야 하고 나 역시도 세상을 받아들이는 방식을 영화에 더 녹여야 한다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됐다. 이 질문에 대해 여러분들도 스스로 질문을 해보셨으면 좋겠다. 

프로덕션
단편영화의 소통도 어렵지만 장편은 다른 어려움이 있다. 나는 운 좋게 배우분들이 나를 되게 응원해 줬던 편이어서 소통이 어렵지는 않았지만 아마 더 큰 규모의 현장에 간다면 대부분 나보다 경험이 많은 선배들과 만나면 아마 내가 하는 방식은 통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나는 리허설을 엄청 많이 하는 사람이라서 그렇다. 배우들을 자주 만나고 그분들의 얘기를 듣고 시나리오를 수정하고 다시 얘기하고 리허설하고 수정하고, 그들이 최대한 이 인물을 잘 연기할 수 있는 방식으로 시나리오를 수정하는 편이다. 하지만 경험이 많은 배우들일수록 바빠서 시간을 내주기 어려울 것이다. <지옥만세>에서는 그 중간 단계를 연습했던 것 같다. 원래 하던 만큼의 리허설을 하지 않았지만, 일반적인 기준보다 훨씬 더 많은 만남을 가지려 했고 다른 방식으로 배우와 소통하려고 시도했다. 나에게 맞는 방법을 찾아서 계속 방법론들을 수정해 나가는 실험 중 하나였다. 감독의 위치에서는 많은 사람들에게 의심을 받는다. ‘저 감독은 저걸 알고 하는 건가? 왜 저렇게 하지? 지금 신인 감독이라서 모르는 거 아닌가?’ 나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나를 의심하기 때문에 나 스스로도 결국 의심할 수밖에 없게 된다. 그때 중심을 잘 잡아야 한다. 나 같은 경우에는 캐릭터들을 응원하고 싶은 마음, 살게 하고 싶은 마음을 무게추로 두고 기준을 삼은 것 같다. 

현장에 있으면서 기억에 남는 순간이 있다면, 그런 의심들 가운데 하나의 순간이 우리를 이어줬다고 생각했다. 어떤 한 장면을 찍었을 때 고르게 모여 있는 사람들의 재능이 함께 들어갔던 날이 있었다. 첫 촬영 날이었는데 <지옥만세>의 장면 중 목욕탕 신을 찍을 때였다.

서로가 서로를 다 의심하는 그 상황에서 무언가 하나의 장면을 잘 찍었다고 모두가 느낄 때, 우리가 뭔가를 함께하는 게 괜찮은 걸 만들고 있구나, 이 확신을 주는 것 외에는 서로를 이어줄 수 있는 끈을 찾는 방법은 없는 것 같다. 아무리 말로 설득하고 술을 마시고 뭘 해도 일할 때 보람차게 할 수 있으려면 그 장면들을 어떤 순간으로 찾는지를 생각해보는 게 좋다. 


<지옥만세> 스틸컷 ©WDN

관객과의 소통
관객과의 소통을 계속 생각해야 한다. 언제나 관객들이 봤을 때 이 영화가 어떻게 다가갈지에 대해서 생각보다 고민을 많이 안 하는 걸 느꼈다.

그러니까 어떻게 해야 내가 여기서 이야기하려는 감정이 전달될지 꼼꼼하게 고민해 보고 주변에서 잘 모르겠다고 하는 의견에 귀를 잘 기울이셔야 한다. 촬영할 때 너무 좋다고 확신하면서 찍는 분은 잘 없을 것이다. 잘 모르겠다는 생각과 사람들이 내가 뭔가 얘기하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고, 난 좋은 감독인가? 라는 의심이 들기도 하는데, 내가 믿음을 회복할 수 있었던 건 내가 쓴 인물들을 지키고 싶다는 마음이 있었던 것 같다. 사실은 나의 일부이기도 한 그들을 지키는 방식이 결국 나를 지키는 방법이고 영화를 지키는 방법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지나갔던 것 같다. 

그 시간을 지나며 해오던 선택들이 비겁한 타협인가, 현명한 융통성인가, 카리스마 넘치는 독재와 민주적인 포용 사이의 밸런스를 많이 고민하게 된다. 이런 고민들을 사실 여전히 하고 있고 저의 경우에는 현명한 융통성이라고 믿는 비겁한 타협을 정말 많이 했다. 왜? 찍어야 되니까. 완성해야 되니까. 약속을 지켜야 되니까. 이외에 다른 기준들을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하면서 융통성을 발휘했다. 나의 기준은 가장 후회할 것 같은 선택을 하지 않는 것이었던 것 같다.

고집 피워서 혹은 주장해서 영화 전체를 놓칠 것인가 그게 훨씬 더 큰 후회일 것 같다는 생각으로 돌이켜봤을 때 후회하지 않을 길을 택하려는 선택을 했고, 영화를 찍으면서 발견하고 유연하게 현장과 사람들의 의견들을 좀 흡수해서 영화를 다르게 만들려면 제 머릿속에서 생각했던 영화 말고 다른 영화로 만들고 싶은 욕심이 있다. 하지만 때론 스태프들은 빨리 일하는 걸 좋아하기도 한다. 확실하게 어떤 걸 그냥 던져주는 걸 일하기 편하다고 생각한다. 편리한 방식으로 일하는 것과 같이 창작을 하고 싶어 하는 욕망은 너무 다르지 않은가. 어떤 과정에선 피곤해하고 지치는 경우가 많았다. 나도 지금 이 밸런스를 어떻게 잡아야 되는지 되게 고민하고 있는데 그것도 실험해 봐야 될 것 같다. 그런 지난한 과정을 거쳐서 후반 작업을 시작하게 된다. 

후반 작업
단편도 마찬가지지만 장편은 내상이 진짜 크다. 주변에 사람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고 나에게는 엉망진창인 외장하드 하나만 남아 있다. 심폐소생술을 해야 하니까 후반 스태프들한테 이제 읍소하러 다니게 된다. 후반 작업하시는 분들은 가장 정확한 언어를 원한다.

그러니까 저기 소리를 조금 더 박력 있게 해주세요, 라고 요청하면 볼륨을 높이라는 얘기죠? 한다. (웃음) 작업자들마다 캐릭터들이 다르기 때문에 멘탈을 관리하면서, 어떨 땐 외향인처럼 보이면서 그들의 언어를 외국어 배우듯이 배워야 한다. 그래서 그분들이 원하는 언어를 쓰면서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이끌어낼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래서 많은 분들이 해오던 작업자들과 그다음 작업을 이어 하게 되는 것 같다. 나는 음악감독님이 같은 분이셨고 편집하셨던 분이 예전에 저랑 작업하셨던 분이었다. 영화가 생각보다 괜찮게 나올 수 있다는 그 믿음을 가지고 어떤 방식으로든 생명을 불어 넣어야 된다.

개봉
이 과정은 처음 겪어보는 과정이었다. 단편을 찍었을 때는 영화제에 가거나 어떤 플랫폼에서 상영되거나 하는 과정이었지만 장편영화 같은 경우 스크린 몇 개관에 걸려서 관객들을 만나고 관객들이 평하는 이야기들을 인터넷에서 찾아볼 수 있는 과정들이 나에게는 새로운 경험이었다. 배급은 영화 제작과는 다른 완전히 새로운 영역이었다. 이 부분을 반드시 이해하고 개봉 진행에 접근해야 한다.  각자의 역할을 가장 잘 이해하고 그 선에서 소통하는 방식을 나도 이번 기회를 통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기회가 되면 WDN에서 개봉과정에 대해 이해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주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감사하게 느껴지는 어떤 리뷰들이 있는 반면 차라리 안 봤으면 하는 참혹한 반응이 있는데 두 개 다 내 영화에 대한 반응이다. 머리로는 다 안다. 이 사람들이 화가 나서 영화관에 들어갔나? 
짜증난 일이 있었을지도 몰라. 아니면 그래 이 말은 맞지, 하지만 이렇게까지 쓸 필요는 있었을까? 많은 생각을 했지만, 그 의견들을 건강하게 받아들이는 데까지 개봉한 지 1년이 지났는데 아직도 머릿속에는 나쁜 말들만 남아있다. 그래서 나를 포함해 주변을 보면 좋은 말이 있으면 캡처해놓는다. 내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 반드시 한 명은 있다. 한 명은 너무 적고 그래도 두 명 정도는 내 영화를 내가 원하는 의도대로 봐주고 내가 생각했던 방식대로 느껴주는 사람이 있지 않을까 싶은데 분명히 있다. 나는 그 두 사람을 생각하면서 다음으로 넘어갔던 것 같다. 나는 세상에 용기 있게 자기 목소리를 내려고 애를 쓰는 사람들이 우리와 같은 창작자들이라고 생각한다. 반응들이 좋을 수만은 없지만 마주하기엔 무시무시하고 두려운 일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얘기를 하려는 의지를 가진 사람들은 이 과정을 잘 연습해야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캡처 말고도 좋은 방법이 생각난다면 나중에라도 말씀드리겠다.

반성문
단편 때부터 계속 썼다. 그게 나한테 그 어떤 때보다 도움이 된 적이 많다. 이를테면 첫 단편에서는 배우가 이야기하는 것보다 내가 생각한 인물을 강요했었다. 이때 이렇게 느끼셔야 한다고 얘기했는데, 편집할 때 깨달음을 얻었다. 배우의 말이 맞았다. 인물을 나만큼이나 더 생각하고 감정의 흐름을 더 꼼꼼하게 이해하는 게 배우인데 왜 나는 내가 쓴 방식으로만 그걸 이해하려고 했지?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후로는 배우분들 얘기는 많이 신뢰하는 편이다. 그런 것들이 다 반성문을 쓰는 과정에서 나왔던 것 같다. <지옥만세>의 반성문은 너무 길어서 요약이 안 됐다. (웃음) 다음 영화가 나오면 뭐가 좀 나아졌는지 한번 보여드릴 기회가 있으면 좋겠다.

다음을 위한 마음가짐
초반에 찍은 단편영화들이 반응들이 좋았다. 좋아하시는 관객분도 많으셨고 굉장히 오래전 얘기지만 2009년에 찍었던 <거짓말>이라는 영화가 사람들한테 사랑을 많이 받았던 편이었다. 그다음 영화를 찍을 때 고작 그런 관심 때문에 되게 부담이 됐었다. 다음번엔 더 잘 찍어야 되는데, 이런 생각도 많이 들면서 나의 역량을 더 강화시키는 방향으로 갈 것인가, 사람들이 좋아해주고 내가 좋아하는 부분을 강화시키는 방향으로 갈 것인가, 아니면 그런 것을 틀을 깨고 도전하고 새롭게 모험할 것인가. 돌이켜보니까 나는 항상 이 실험과 모험했던 것 같다.


<거짓말> 스틸컷 ©WDN

누가 나를 어떤 틀로 바라보거나 내가 스스로 그런 틀로 규정하면 답답해서 계속 깨고 싶어 하는 게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지옥만세>의 경우도 단편들을 보셨던 관객분들에게는 ‘임오정이 왜 저런 영화를 찍었지?’라고 생각하실 수도 있고 실제로도 그런 반응들이 좀 있었다.

그렇지만 내가 그래야 계속 영화를 찍을 수 있는 동력이 생기고 새로운 곳을 모험해보고 싶고 도전하고자 하는 게 창작의 동력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이 다음을 생각할 때 굉장히 중요한 모토가 되었다. 

예전에 나에게 영화를 가르쳐 주셨던 선생님 중에 한 분이 나에게 자신을 너무 미워하지 말라고 한 적이 있었는데 그게 정말 도움이 되었다. 나는 나를 징글징글하게 미워하고 있구나. 그렇지만 다음을 생각하면 다시 한번 이런 나도 응원하고, 인정하고, 그때 최선을 다했다는 마음을 잊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우리가 영화 하나 찍고 그만둘 게 아니지 않나. 우리의 수많은 필모그래피 중 하나는 너무 좋을 수도 있고, 두어 개는 좀 그저 그럴 수도 있고, 하나는 완전 실패작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받아들여야지, 내 일생일대 마지막이라는 식으로 접근하면 부담스러워서 다음 발을 내딛기가 어려워진다는 생각을 한다. 

나를 지탱해준 동아줄
영화 하면서 제일 화가 나는 건, 이 일에 대해 산을 겨우 하나 넘어서 올라갔는데, 그다음 산을 가기 위해서 다시 바닥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무조건 망망대해에서 헤매고 터널을 겪을 수밖에 없다는 점이 그렇다. 그 과정에서 우리가 어떻게 스스로를 단련하면서 버텨야 되는지 나의 경험을 이야기해보고 싶다. 나는 맨날 마지막일지도 모른다고 얘기하는데, 라스트라는 말이 마지막에 그리고 가장 최근이라는 뜻이다. 나는 이 두 개의 심정을 같이 가지고 만드는 것 같다. 진짜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심정과 잘하고 싶은 생각과 동시에 내 인생 필모그래피의 궤적 중 하나일 거라는 심정. 그런 마음을 자주 떠올리는 편이다. 

시나리오 쓸 때마다 플레이리스트를 만들어 구상하거나 이야기의 흐름과 감정의 흐름을 잡기 위해 음악 모음을 만들어 놓는다. 나는 특수한 경우가 아니면 OST를 많이 활용한다. OST는 전체적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들으면 영화의 흐름이 담겨 있는 경우가 많다. 지금은 싱글 앨범이 훨씬 익숙하지만 10곡 정도가 들어있는 정규 앨범을 들어보면 기승전결로 전체적인 흐름을 설계한 것이 느껴진다. 기승전결의 흐름을 내 몸에 체화하기 위해서 주인공마다 테마를 정해 그 테마에 맞는 음악을 들으며 대사를 쓰거나 힘을 낸다. 작은 팁을 주자면 운전은 꼭 배워두는 게 좋다. 차가 있으면 더 좋다. 플레이스트를 짜고 스트레스 받을 때마다 고함지르고 소리 지르면 스트레스가 뻥뻥 뚫린다. 

섀도우 복싱 훈련
이 과정은 내가 최소 다섯 번 이상 해본 훈련들이다. 글이 안 써질 때 나는 오늘 지나가다 본 어떤 한 사람이 돼서 그냥 무작정 쓴다. 글이 안 써질 때 타자라도 쳐야겠단 마음으로 그렇게 한다. 캐릭터를 위해 상상하고 계속 개발하고, 시나리오나 이야기를 만드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은 관찰이었다. 내가 제일 관심 있는 것은 인물이기 때문에 최소 일주일에 몇 번은 캐릭터를 쓰려고 해봤다. 저 사람이 사는 환경, 오늘 있었던 일, 그리고 이 사람이 겪게 될 어떤 심리적인 무게, 우울함 같은 것들을 쓰면서 하나의 작은 이야기를 만들어 가는 연습을 인물을 통해 출발했던 적이 많은 것 같다. 

이야기의 사건을 쓰는 데 약했다. 상황과 사건을 풀어나가는 방식이 장편영화를 하기 약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명확한 사건이 있는 이야기들을 찾아봤다. 잘 찾아보면 굉장히 훌륭한 여류 추리소설 작가들이 많다. 이렇게 명확한 사건이 있는 것들로부터 사건을 찾아 나가거나 구성해 나가며 연습했던 편이고, 신문 기사를 보고 짧은 이야기를 하나 만들어보는 연습도 했었다. 새로운 공간을 관찰하는 것도 방법이다. 한 달에 한 번 낯선 공간에 가려고 한다. 한 번도 가지 못한 곳을 가서 모험을 떠나 보는 것이다. 경마장, 이혼 법정 같은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곳들을 직접 가서 경험하는 건 큰 도움이 된다. 

심상을 관찰해야 하는데, 영화로 다른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려면 일단 자신의 마음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꺠달아야 한다. 내가 어떨 때 웃긴지, 다른 사람을 웃기고 싶으면 내가 언제 웃는지 알아야 하고 내가 어떨 때 슬픈지도 알아야 한다. 감독이 감정의 논리를 인지하고 있어야 된다는 생각을 한다. 그 이미지 구성은 하루에 한 번씩 좋아하고 인상적인 사진을 찍는 것이다. 한 달 정도의 시간을 잡고 내가 어떤 이미지나 사진 작가나 미술을 좋아하게 되는지, 그리고 왜 좋아하는지를 고민해 봐야 한다. 

다섯 컷으로 이야기 구성을 해보는 연습을 한다. 이건 내가 수업을 진행할 때 꼭 내는 과제이다. 짧은 이야기를 다섯 컷으로 구성해보는 훈련을 한다. 영화를 볼 때 연출적으로 훌륭하다고 생각하거나 인상적인 장면들을 캡처해서 메모를 한다. 글쓰기 연습을 하는 방법으로는 일기를 쓰거나, 영화 줄거리 정리, 이미지로 영감을 얻거나 사진 하나로 이야기를 출발하는 연습을 하곤 한다. 가장 좋아하는 훈련법은 스토리의 구조를 분석하는 건데 좋아하는 영화가 있고 그 영화를 내가 좀 더 잘 알고 싶다면 영화를 틀어놓고 노트북으로 보이고 들리는 걸 받아 적는 것이다. 묘사 없이 객관적인 정보들로 이야기가 어떻게 흘러가는지 쭉 적는다. 이 훈련을 하다 보니 깨달았다. 장편영화는 대체로 많으면 130개, 짧으면 80개의 장면으로 이루어진다는 걸. 이렇게 쓰다 보면 영화가 대체적으로 스토리 라인이 어떻게 넘어가는지 나눌 수 있게 된다. 이야기가 대체로 8장으로 나뉘고, 이야기의 굵은 흐름들이 하나씩 지나갈 때 요약해서 장을 나눠보면 이렇게 데이터가 쌓인다. 이런 훈련들을 시도해보면 좋을 것 같다. 혼자 얼마나 많이 했던지, 혼자 히치콕 특별전, 코엔 특별전을 하면서 논문을 써보기도 했다. 여러분들도 기회가 되면 좋아하는 감독의 회고전이나 스터디를 해보며 분석하길 바란다. 


임오정 감독 ©WDN

실험 그리고 변신
나는 언제나 다음에는 다른 것을 해보자, 다른 실험을 해보자, 변신해보자는 정신으로 이어간다. 나는 문제적 캐릭터들에 관심을 갖는 편이다. 입체적이라고 묘사할 수도 있지만 그것을 넘어서 위험한 사람들이 있지 않은가. 그런 사람들에 대해 많이 떠올리는 편이다. 그 캐릭터들에 대한 관심으로 그들을 어떻게 보여줘야 하는지에 대해 중심을 잡는 편이고 그렇게 하면 결국에 기존의 틀과는 벗어난 새로운 모험을 하게 되는 것 같다. 

용기가 된 질문과 말들
‘무엇에 관한 것인가? 누구에 대한 것인가? 당신이 담고 싶은 가장 중요한 감정은 무엇인가?’ 

캐릭터를 쓸 때나 시나리오를 개발할 때, 영화를 찍게 됐을 때 이 세 가지 질문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다. 이 질문들이 작품을 찍게끔 해줬다. 

‘어떤 일이 두려울 때 해야 할 일은, 그냥 그 일을 하는 것.’

이 말을 어디선가 봤는데, 이 말은 캐릭터를 생각했을 때 내게 가장 용기를 준 말이다.

‘행동을 해야 한다, 아무 행동도 하지 않으면, 계속 처음으로 돌아가 같은 결정을 되풀이할 것이다.’

장편영화를 찍는 건 너무 두려운 일이다. 계속 뒷걸음질 치거나 다른 방법을 찾지 못했다는 핑계들을 대기도 하지만, 가장 두려운 일이니 도전해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객관적인 시각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성장하도록 하는 것도 장편영화를 쓰게 하는 좋은 동력이 된다는 생각을 한다. 

자빠져도 일어나서 냅다 뛰며 함께 생존합시다. 그리고 가끔씩 생존신고하듯 서로의 영화를 응원하고 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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