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FIRST

나의 첫 영화 연출기

[여성감독 작업노트] 시스템 안에서 나를 지키는 영화 만들기

<교토에서 온 편지> 김민주 감독

퍼플레이 / 2024-04-25


여성감독네트워크 WDN에서 지난 4월 6~7일 케이스 스터디 <여성감독 작업노트>를 진행했습니다. 이번 프로그램은 극영화, 다큐멘터리를 연출한 여성 감독들이 장편영화 작업의 어려움과 문제해결 과정을 공유하는 자리였는데요. 감독의 발표 이후 대담과 자유로운 질의응답 시간을 가지며 생생한 제작 스토리와 실질적인 꿀팁을 나눴답니다. 서울국제여성영화제와 퍼플레이의 협력으로 진행된 이번 행사에서 나온 이야기들을 글로 함께 만나보시죠 :)
<여성감독 작업노트: 가장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영화만들기 A-Z>
-일시: 2024.4.6.(토) 오후 2~5시
-장소: 서울시여성가족재단 아트컬리지3
-발표: 김민주 감독
-사회: 유은정 감독


[발표] 

김민주: <교토에서 온 편지>는 한국영화아카데미(이하 KAFA)에서 만들어진 영화다. 그래서 ‘시스템 안에서 나를 지키는 영화 만들기’라는 제목을 지어봤다. KAFA의 장점은 투자-제작-배급을 학교에서 해결해준다는 거다. 개인이 돈을 끌어오지 않아도 되고, 수업 중에 교수의 피드백을 들을 수 있고, 배급사를 찾는다고 미팅할 필요도 없다. 그런데 이게 달리 보면 단점이라고 할 수 있는데 우리가 플랜을 짤 수 없다. 학교의 타임라인에 플랜을 끼워 맞춰야 한다.

영화 한 편당 제작비는 4억 내외로, 다른 데서 더 끌어올 수 없다. 5월에 입학해서 7월까지 시나리오를 수정하는데, 매달 수정고가 나와야 한다. 수정고가 나오지 않으면 제작비가 깎이는 페널티를 받을 수 있다. 한 달 안에 새로운 것을 써내야 한다는 심리적 압박이 심하다. 8, 9월에 프리프로덕션을 진행하고 무조건 10월 안에 촬영에 들어간 뒤 12월 안에 촬영이 끝나야 한다. 시스템이 공고할수록 개인의 자율성이 떨어지는 단점이 있다.

김민주 감독이 ‘여성감독 작업노트’에서 발표를 하고 있다. ©️WDN

제가 트리플 J라 효율을 추구하고 전체적인 그림을 짜는 걸 좋아한다. 정확한 예산과 타임라인을 잘 지키기 위해 시나리오, 스태프 구성, 캐스팅, 헌팅 등 각 단계에 대한 계획을 짰다. KAFA 영화는 가을에 촬영하기 때문에 가을 배경의 시나리오를 준비했다(KAFA 영화의 계절 배경이 똑같은 이유다). 프리프로덕션 기간에 작업 가능한 주요 스태프들도 미리 구해놨다. 캐스팅도 원래 계획이 있었는데 이 부분만 계획과 완전히 다르게 가게 됐다. 

다음은 헌팅인데, <교토에서 온 편지>는 부산 영도의 지역적 색깔이 잘 드러나야 하는 영화다. 게다가 일본이 굉장히 중요한 장소로 나온다. KAFA가 부산에 있어서 입학하면 부산에서 살아야 하는데, 저는 고향이 부산 영도라 집에서 등하교를 했다. 시나리오를 수정하는 5~7월에 틈만 나면 영도 이곳저곳을 다니며 헌팅 리스트업을 했다. 미리 프리프로덕션을 한 거다. 이후에 PD님이 섭외됐을 때 리스트를 드리면서 ‘여기, 여기 섭외해주세요’라고 부탁했다. 일본 분량에 투자하기 위해 시간을 아껴놓은 거다. 그런데 일본에 직접 가서 찍는 건 예산도 부족하고, 당시 코로나 상황이어서 불가능했다. 그렇다고 일본 장면을 뺄 수도 없어서 차선책을 찾아야 했다. 틈틈이 국내에서 찍을 만한 곳을 리스트업 했다. 원래 시나리오상에서는 일본 장면의 시작이 바다 옆을 지나가는 기차였다. 영도도, 일본도 섬이라 바다가 보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 바다가 보이는 노선을 타봤는데 바다가 보이는 구간이 1분 30초밖에 안 되더라. 그래서 ‘실제로 못 찍겠구나, CG로 가야겠다’는 판단을 빨리 내렸다.

그런데 생각보다 CG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았다. 처음에 CG팀과 얘기할 땐 제가 요구한 게 다 된다고 했다. 그래서 걱정 안 해도 되겠다고 생각했는데, 기차 장면에서 창문의 배경 소스가 너무 짧았다. “이 정도 거리감에 가을 배경이어야 하고, 일본 집이 이 정도로 보이면서 바다가 보였으면 좋겠다”고 요청했지만 그들이 가진 소스는 한정적이었다. 그래서 그때부터 다시 찾아봤다. 다행히 일본에 굉장히 많은 기차 유튜버들이 있었다. 그들의 영상에 기차 배경인 라인에 전면, 후면, 전망, 왼쪽 진행, 오른쪽 진행 전부 있었다. 제가 설정했던 계절, 거리감, 속도에 맞는 영상을 찾아서 CG팀에 컨펌을 받고 해당 유튜버들에게 이용 허락을 구했다. 편집을 마치고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처음으로 영화를 상영했는데 큰 화면으로 보니까 로딩되는 화면과 뭉개지는 게 너무 잘 보였다. 유튜브 기차 영상을 통으로 잘라서 썼는데 영상 퀄리티가 많이 떨어지더라. 일본으로 넘어가는 첫 컷이라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기에 고민이 됐다. 근데 학교의 예산과 제작 기간 안에서 할 수 있는 건 다 끝난 상태였다. 

김민주 감독이 ‘여성감독 작업노트’에서 발표를 하고 있다. ©️WDN

결국 혼자 카메라를 들고 일본에 갔다. 시스템 밖에서 해결하기로 한 거다. 아무리 계획해도 시스템 안에서 안 되는 부분이 있었고, 그게 하필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 장면이었다. 제가 썼던 유튜브의 기차 영상은 도쿄에서 찍힌 장면이었다. 그래서 이왕 찍는다면 교토에 가서 찍고 싶었다. 바다가 보이는 장면을 찍을 수 있지 않을까 싶어 기차 영상을 다시 보기 시작했다. 라인별로 마음에 드는 거리감, 계절, 속도를 찾았다. 교토 북부 라인의 기차를 타면 원하는 풍경이 펼쳐지더라. 근데 막상 가니까 바다 앞에서 공사를 하고 있었다. 어쩔 수 없이 바다가 보이는 건 포기하고 일본의 시골 배경을 찍었다. 교토역 근처에서 숙박하며 3일 내내 다양한 렌즈로 찍어보고, 해의 방향도 다르게 찍어보며 컷을 건졌다.

시스템 안에서 만들어보려고 아등바등 노력했지만 가장 중요한 컷은 시스템 밖에서 얻었다는 게 아이러니다. 하지만 시스템을 파악하고 대비하는 것은 정말 중요하다. 리스크를 줄여놓으면 또 다른 리스크에 맞설 힘을 비축할 수 있다. 효율로 따질 수 있는 가치는 존재하며 선택과 집중이 최선이다. 현실적인 조언을 하자면, 저예산 영화에선 감독이 해야 할 일이 많다. 감독보다 열심히 할 스태프는 없다. CG를 할 거라면 공부해야 하고, 디테일한 것까지 물어보고 합의해야 최선의 결과를 얻을 수 있다.

[대담]

유은정(이하 유): 시나리오를 수정하면서 피드백을 받을 때 중심을 잡는 게 쉽지 않다. 어떤 건 수용하고 또 어떤 건 쳐내야 할 텐데, KAFA 시스템 안에서 어떻게 시행착오를 겪으며 노하우를 쌓았는지 궁금하다.

김민주(이하 김): 거긴 노하우를 쌓을 시간이 부족하지 않나?(웃음) 수정사항을 반영해서 원고를 내고 수업까지 병행하는 게 쉽지 않다. 보통 초고를 쓰고 나면 시나리오의 문제점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쓰레기란 건 본인도 안다. 그래서 저는 객관화하기 전에는 남들에게 시나리오를 안 보여준다. 틀린 게 확실하다는 걸 증명받는 식으로 피드백을 활용한다. 그래서 크리틱 시간에 선생님이 무언가를 지적했을 때 고쳐야 한다는 게 확실하다는 생각이 들면 무조건 고치려고 한다. 사실 학교 시스템에선 그것만 하는 것도 힘들다. 주어진 시간 안에 못 고칠 것 같은 건 빨리 포기했다.

유은정 감독(왼쪽)과 김민주 감독이 대담을 나누고 있다. ©️WDN

유: 그전에 손발을 맞춰봤던 스태프들과 함께했다. 어떻게 만난 건가?

김: 학교에서 단편영화를 만들며 만났다. 영화 말고 이런저런 알바도 같이 했고, 그 친구들이 감독일 때 제가 스태프를 해주기도 했다. 익숙한 사람들과 오랫동안 작업을 해서 이제는 새로운 사람들과 해보고 싶다는 생각도 든다. 이번 작업에서 미술, 조명, 음악 감독은 새롭게 만난 분들이었다. 서로를 파악하느라 시간은 걸렸지만 새로운 시각을 제시해주셨다. 새로운 스태프들과의 시너지가 좋아서 다음 작품에서도 시도해보고 싶다.

유: 영화에는 어머니와 세 자매가 나오는데 인지도 있는 배우들을 캐스팅했다. 배우들과의 소통 방법은 어떻게 계획했는지 궁금하다. 

김: 처음부터 인지도 있는 배우들과 작업할 계획이 있었던 건 아니었다. 독립영화에서 활동하는 배우들을 캐스팅하거나 새롭게 발굴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그런데 제가 학교를 다닌 해에 KAFA에서 캐스팅 디렉터를 섭외해줘서 인지도 있는 배우들을 만나게 됐다. 시스템 덕을 본 거다. 근데 고민이 있긴 했다. 신인 배우들과 긴밀하게 시간을 보내면서 교감하는 로망이 있었는데, 아무래도 그분들은 소속사와 매니저가 있고 또 바쁜 터라 스케줄 맞추는 게 쉽지 않았다. 그래도 경험이 많고 큰 현장에서 작업해본 배우들과 함께하는 장점이 있었다. 앞으로 상업영화를 찍어보고 싶은데 크게 뻘짓하기 전에 미리 혼나보자는 마음으로 작업했다.

유: 자매들의 나이 차가 크지 않은데, 캐릭터에 개성을 줄 때 어떤 방식으로 주려고 했나. 또 배우들과 그것에 대해 어떻게 커뮤니케이션 했는지 궁금하다.

김: 자매들을 세 가지 타입으로 설정했다. 첫째는 고향을 떠나고 싶지만 못 떠나는 사람, 둘째는 떠났다가 돌아온 사람, 셋째는 떠나고 싶은 사람. 그리고 연애 얘기, 살아가는 얘기, 캐릭터의 전사를 배우들에게 공유하고 레퍼런스를 드렸다. 한채아 배우는 하나하나 자세히 말해달라고 주문하며 제가 한 말을 학생처럼 다 흡수하고 연기로 뱉어냈다. 한선화 배우는 질문이 많았다. 본인이 분석한 것과 제 생각이 다른 경우 사전에 많이 물어봤다. 송지현 배우는 신인이었고 배우 중 유일하게 부산 출신이 아니었다. 그래서 사투리와 춤을 많이 연습했다.

유은정 감독(왼쪽)과 김민주 감독이 대담을 나누고 있다. ©️WDN

유: 혼자서 편집을 다 했다고 들었다. 장편을 혼자서 편집한다는 게 상상이 잘 안 되는데 그 과정을 공유해줄 수 있나.

김: 제가 손이 느리거나 하진 않기 때문에 막연히 혼자 해도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편집감독에게 ‘여기 두 프레임만 옮겨주시고, 속도는 90% 정도로 해주세요’라고 하나하나 얘기하는 게 상상만 해도 스트레스더라. 그래서 편집감독과 함께 작업하는 것을 아예 생각하지 않았다. 근데 지나고 보니 편집감독이 왜 필요한지 알겠더라. 120분짜리를 계속 보다 보면 한계가 올 수밖에 없고, 아무것도 안 느껴지는 시점이 온다. 그때는 한 프레임도 보기 싫다. 편집감독이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싶다.

유: 주변에 J 성향을 가진 연출자들이 작업 끝나고 나면 오답노트를 만든다. 감독님도 그러나?

김: 오답노트보다는 반성문을 쓴다. 

유: 다시 돌아간다면 CG 작업 과정에서 어떻게 소통하고 계획할 것 같나.

김: 그땐 CG를 통해 원하는 것의 몇 퍼센트까지 구현할 수 있는지 감이 전혀 없었다. 다시 돌아간다면 원하는 그림이 명확하니까 ‘이 나무는 이 빛에 맞춰서 이렇게 거리감을 줬으면 좋겠다’까지 미리 합의하겠다. 가능한 구체적으로 나무 한 그루까지. 그렇게 얘기해야 기술적 오류를 줄일 수 있겠구나 싶다.

유은정 감독(왼쪽)과 김민주 감독이 대담을 나누고 있다. ©️WDN

[질의응답]

질문자: 배우들과 작업할 때 디렉팅을 어떻게 했는지, 배우의 분석과 연기에 대한 만족도는 어땠는지 궁금하다.

김: 결론부터 말하자면 만족도가 높았다. 제일 걱정했던 건 한채아 배우였는데, 이미지 캐스팅이었기 때문이다. 처음 인물에 대해 설명할 때 꼼꼼히 다 받아 적으며 할 수 있다고 하시더라. 그리고 첫 대본 리딩 때 제가 원했던 톤으로 연기하는 걸 보고 깜짝 놀랐다. ‘역시 프로!’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채아 배우는 흡수를 정말 잘하고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게 연기한다. 엄마 역할의 차미경 배우는 테이크마다 다르게 연기하는 분이다. 그래서 그중에 제가 원하는 테이크를 선택하게끔 만들어주신다. 한선화 배우는 <창밖은 겨울>, <영화의 거리> 등의 독립영화를 찍은 경험이 있는데 그걸 보고 캐스팅했다. 두 영화를 보며 연기에 진심이란 생각이 들었다. 혜영이 주인공이자 관찰자라서 중심을 잡아주는 동시에 엄마, 언니, 동생, 남자친구와의 다양한 관계도 드러내야 하는 캐릭터인데 그것들을 잘 표현해줬다. 막내 역할의 송지현 배우는 신인이라 좀 더 탄력적으로 이렇게도 해보고 저렇게도 해보며 같이 만들어갈 수 있어서 좋았다. 

질문자: 차미경 배우와 어떻게 소통했는지 궁금하다.

김: 배우 자체의 캐릭터를 파악하는 게 중요했다. 차미경 배우는 애교도 많고 사교적인 분이라 밥을 같이 먹으며 대화도 많이 나눴다. 경험이 가장 많으신 분이라 단순한 문장으로 표현한 지문도 정말 풍부하게 연기해주셨다. 그러다 보니 디렉팅하는 게 의미가 있나 싶더라. 그럴 정도로 많은 것을 채워주셨다. 

유은정 감독(왼쪽)과 김민주 감독이 참여자의 질문을 듣고 있다. ©️WDN

질문자: 일본에 가서 직접 촬영했는데, 허가 부분에서 문제가 없었는지 궁금하다.

김: 일본 유튜브에 기차에서 찍은 영상들이 워낙 많아 저도 그냥 찍어도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혼자 카메라와 렌즈를 들고 탔으니 ‘오덕’으로 보이지 않았을까. 전문적으로 촬영하는 사람으로 보이진 않았을 거다. 처음엔 사람들 있는 데서 30분 동안 카메라를 펼쳐놓고 있으려니 부끄러웠다. 하지만 매일 가다 보니 출근하는 것처럼 느껴졌고, 제일 좋은 자리에 앉아서 카메라 딱 펼치고 있었다. 

질문자: 일본에선 어떤 카메라로 찍었나?

김: 영화 카메라로는 못 찍었다. ‘블랙매직’이라고 제가 운용할 수 있는 것 중에 가격과 크기가 적절한 것을 빌려서 촬영했다.

질문자: 시나리오 쓸 때 루틴이 있나?

김: 시놉시스를 쓸 때 보통 노션을 이용한다. 캐릭터 페이지, 이야기 페이지, 브레인스토밍, 자료조사, 레퍼런스 페이지가 있다. 각각 작업을 하다 시놉시스 페이지에서 버전을 만든다. 버전 1, 2, 3이 있는데 버전 1이 러프한 시놉시스, 2는 좀 정리된 시놉시스, 3은 가장 정제된 버전이다. 이런 패턴으로 진행하다가 트리트먼트로 나아간다. 그다음엔 시나리오 단계로 넘어가는데, 자료조사를 해놓은 게 많으면 많을수록 뒤의 단계들이 수월해진다. 이런 식으로 쓰다 보면 대사도 트리트먼트에 거의 다 들어있기 때문에 시나리오 작성도 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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