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FIRST

나의 첫 영화 연출기

[여성감독 작업노트] 쓰고 만들며

<비밀의 언덕> 이지은 감독

퍼플레이 / 2024-04-25


여성감독네트워크 WDN에서 지난 4월 6~7일 케이스 스터디 <여성감독 작업노트>를 진행했습니다. 이번 프로그램은 극영화, 다큐멘터리를 연출한 여성 감독들이 장편영화 작업의 어려움과 문제해결 과정을 공유하는 자리였는데요. 감독의 발표 이후 대담과 자유로운 질의응답 시간을 가지며 생생한 제작 스토리와 실질적인 꿀팁을 나눴답니다. 서울국제여성영화제와 퍼플레이의 협력으로 진행된 이번 행사에서 나온 이야기들을 글로 함께 만나보시죠 :)
<여성감독 작업노트: 가장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영화만들기 A-Z>
-일시: 2024.4.6.(토) 오후 2~5시
-장소: 서울시여성가족재단 아트컬리지3
-발표: 이지은 감독
-사회: 유은정 감독


[발표]

이지은: 무엇을 써야 할지부터 고민했다. 모든 것은 ‘쓰는 것’부터 시작이었다. 그때 내 마음속에 들어온 두 가지가 있었다. 이런 걸 한번 만들어 보고 싶다는 열망. 나에겐 그게 ‘가정환경조사서’였다. 부모님 직업과 사는 곳, 친한 친구 이름도 적어야 한다. 예전부터 그것을 다뤄보고 싶다는 생각이 항상 있었다. 종이 한 장으로 직업에 대한 편견도 다룰 수 있고. ‘나는 이걸 쓰는 게 왜 불편하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전전긍긍하며 자기 이름이 불리지 않길 바라는 사람을 그려보고 싶다는 생각이 어렴풋이 있었는데 진전되진 못했다. ‘사건’이라든가 ‘어떤 사람’이 나와야 할지 몰랐다. 그래서 항상 제 서랍 속에 있었다.

어느 날 또 한 가지 욕망이 생겼다. 새로운 10대 여성 캐릭터를 보고 싶다는 감독으로서의 욕망. 앞에선 이런 이야기를 해보고 싶다는 작가적 욕망이었다면, 이제 새로운 캐릭터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두 가지가 결합됐다. ‘가정환경조사서에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열두 살의 작은 인간’. 그때부터 가속도가 붙기 시작했다. ‘가정환경조사서를 불편해하는데 그걸 숨기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나는 누구에게 부끄러워할까? 우리는 왜 그 현상을 부끄러워하고 부모님을 부끄러워해선 안 된다는 금기가 생겼을까?’ 그렇게 <비밀의 언덕> 시나리오를 쓰게 됐다.

공교롭게도 당시에 초등학교 예술 강사를 나가고 있을 때였고, 1~6학년 초등학생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때 제 눈이 맑아졌다. 매스컴에서 봐왔던 10대들의 모습이 아니라 인간 대 인간으로 보게 된 것이다. 새로운 10대 여성 캐릭터를 쓰고 싶다고 해서 썼던 건 ‘성인의 시선’에서 썼던 것이었다. 아무리 ‘10대처럼 쓸 거야’ 해도 성인의 시선을 벗어날 순 없었다. 그래서 그 시기의 친구들을 실제로 만나면서 맑은 눈을 하나하나 대조해 봤던 것 같다. 

이지은 감독이 ‘여성감독 작업노트’에서 발표를 하고 있다. ©️WDN

프로덕션에서 가장 중요한 건 캐스팅이었다. 주인공 명은이를 찾는 일. 10대 배우에 대한 데이터가 없어서 4개월간 오디션을 봤다. 모든 창구를 이용했다. 에이전시, 추천, 오디션 공고 등. 이유는 하나. 찾고 싶어서. 그중에 문승아 배우가 있었다. 보는 순간 머리가 맑아졌다. 배우와 저만 있는 느낌이었고 ‘이 배우를 통해서 한 시대를 구현하고 싶다, 이 배우와 잘 만들면 해낼 수 있을 것 같다’는 확신이 있었다.

스태프분들에게 많이 했던 말이 있다. 저는 명은이를 아이라는 프레임 버리고 한 여성으로, 더 나아가 복잡한 내면을 가진 인간으로 그리고 싶다고 했다. 사실 이 하나의 컨셉이 크게 좌지우지한다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으면 멋있는 것들을 모두 넣고 길을 잃어버릴 수 있다. 명은이의 행동이 누군가에게는 이해가 안 될 수도 있고, 너무 과할 수 있고, “영악해 보이니까 귀여운 음악을 넣어서 나빠 보이지 않게 만들어줘야 하지 않아?”라고 할 수 있지만 그럴 때 중심을 잘 잡아야만 했다. 저는 명확하게 입체적인 인간을 보여주고 싶고, 명은이란 인물을 잘 보여주고 싶었다. 

영화의 시대 배경은 1996년이다. 이 시대를 세팅하려면 시간과 자원이 많이 들기 때문에 무엇을 취해야 할지 아는 게 중요했다. 제가 중요하게 생각했던 건 그 시대의 인물상을 고증하자는 것이었다. 그 시대에만 있을 법한 인물. 가령 학부모들이 학교에 와서 커튼을 달아주는데 선생님은 그걸 가만히 본다. 그게 지금은 이상한 풍경이지만 당시에는 통용됐었다. 이처럼 캐릭터가 걸친 것을 디테일하게 보여주자고 생각했다. 그래서 주어진 예산과 회차 내에서 무엇에 집중할까 했을 때 배우의 연기와 배우가 푹 빠져들 수 있게 만드는 현장 분위기에 집중하자고 생각했다. 함께 호흡을 맞췄던 스태프들과 ‘여기선 배우가 집중할 수 있게 해주는 분위기가 중요하구나’라는 게 공유가 됐다. 하나하나 세세하게 신경 쓰자면 연출이 신경 써야 할 게 많지만, 나는 그 두 부분에 집중했다. 

이지은 감독이 ‘여성감독 작업노트’에서 발표를 하고 있다. ©️WDN

[대담 및 질의응답]

유은정(이하 유): 단편을 공식적으론 3편, 비공식적으로 4편을 하셨다고 했는데 그때의 경험이 다음 작업을 하는 데 영향을 주지 않았나. 장편을 만들려고 할 때 중심을 단단하게 잡고 가자고 결심하게 된 경험이 있는지? 

|이지은(이하 이): 단편을 찍으면서 마치 개봉하는 사람처럼 힘들게 작업했다. 근데 그때 많은 시행착오를 겪었다. 세 번째 찍은 단편에선 저도 많은 공간과 인물이 나오는 걸 찍어보고 싶었다. 그래서 원 없이 찍었다. 찍고 나서 보니 그때 놓친 게 있었다. 모든 걸 다 보여주자고 결심하고 나서 놓쳤던 건 배우의 컨디션이었다. 왜냐면 저는 제 그림만 생각한 거다. 사실 관객에게 가닿는 건 배우이고, 배우가 장면에 대해 충분히 생각하고, 다음엔 어떻게 호흡을 맞출지 예상해보고, 충분한 시간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는 걸 알았다. 그런 과정을 거치다 보니 ‘내가 이 작품에서 중점을 둬야 하는 게 무엇이지?’라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다. <비밀의 언덕>은 시나리오가 가장 중요했고, 그다음 배우의 연기가 중요했다. 그래서 이것을 중심으로 가져가자는 결심을 했다.

유: 한정적인 예산 안에서 내가 보여주고 싶은 것들을 해낼 수 있는 팁이 있다면?

이: 중요한 건 그 회차 안에서 무리하지 않는 것이다. 무리하지 않아야 연출할 수 있다. 냉정하게 내가 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알아야 하고, 그게 선택과 집중이라고 생각한다. 저희가 투 캠을 썼다. 촬영 감독님이 먼저 제안 주신 것이었는데, 이 현장에서 중요한 건 배우의 연기였다. 그래서 한번 포착할 때 투 캠으로 찍어서 배우가 완전히 집중할 수 있게 했다.

유은정 감독(왼쪽)과 이지은 감독이 대담을 나누고 있다. ©️WDN

질문자: <비밀의 언덕> 캐릭터들이 다 너무 좋았다. 조연들도 등장할 때부터 재밌고, 인물 하나하나에 캐릭터성을 부여하면서도 가짜처럼 보이지 않게 하는 비결은 무엇인가? 

이: 인물을 다루려고 할 때 원칙이 있었다. 모든 인물은 장점과 단점을 가지고 있을 것. 주인공, 조연, 심지어 단역까지. 앞에선 괜찮은 사람일 수 있지만, 어딘가 모난 구석이 있고. 인간은 앞뒤가 다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 인간을 그대로 보여주고 싶다. 입체적이지만 사실은 내가 보는 사람을 영화 안에서 녹여내 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질문자: 초등학교에서 일하면서 영화 일을 중단하셨는데 그때 불안하거나 힘들진 않았는지? 저는 영화에 대한 꿈이 있는데 프리랜서로 일하면서 다시 영화를 할 수 있을까 불안하다.

이: 영화 일을 중단했다기보다는 예술 강사 일을 하면서 시나리오 작업에 전념할 수만은 없는 상황에 두려움이 있었다. 그런데 영화를 만들겠다는 의지가 강했다. 지금 내가 뭘 써야 할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만들고 말 것이라는 의지는 항상 있었다. 수업 끝나고 집에 들어오면 늘 녹초가 됐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쓸 것이다, 쓰고 싶다’는 의지가 늘 있었다.

유: 만들고 싶은 작품이 있다면 고립되는 느낌에 중심을 두지 않아도 괜찮다. 이 영화는 꼭 찍고 싶다는 명확한 의지가 있다면 영화 현장에서 떨어져 있다는 마음이 들더라도 그것에 집중하지 마시고 내가 만들고 싶은 것에 집중하는 것이 좋은 것 같다.

질문자: 저는 아직 단편을 만들고 있다. 감독님은 향후 장편을 꼭 만들겠다는 목표가 있으셨는지 궁금하다.

이: 장편을 만들겠다는 꿈은 10년 전부터 꿨다. 하지만 단편을 만들 땐 그 생각은 안 했다. 지금도 단편, 장편 제작에 있어서 차이는 없다. 단편이기 때문에 그것에 맞춰 집중해야 하는 것들이 있다. 농밀하게 녹여내야 한다는 것. 무게는 똑같다고 생각한다. ‘장편을 찍을 거야’라기보다는 ‘인생의 하나뿐인 작품이야’라고 마음을 먹고 찍으면 그 안에서 배우는 게 많았던 것 같다. 이게 나의 전부니까 모든 걸 쏟아 붓게 되고, 시행착오가 뇌리에 깊게 남는다.

유은정 감독(왼쪽)과 이지은 감독이 대담을 나누고 있다. ©️WDN

유: 영화를 하면서 ‘내가 영화에 재능이 없는 건 아닐까?’라든가 실패를 겪었을 때 좌절하는 마음이 안 생길 수 없다. 그럴 때 동료들의 에너지나 영화를 하고 싶은 마음이 동력이 돼서 나아가게 해주는데, 또다시 일어나게 되는 마음을 어떻게 갖게 되시는지 궁금하다. 

이: 단편 작업을 할 때 제작 지원에 너무 많이 떨어졌다. 떨어질 때마다 마음이 아프고 자괴감이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들고 싶다는 마음과 의지가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제작 지원에서 떨어지면 이틀간 아파하고, 동료가 있으면 같이 아파했다. 제때 안 아파하면 나중에 터질 테니까. 그리고 다음 날엔 다시 노트북을 켜고 작업에 집중했다. 

질문자: 저는 영화를 만들면서 이 영화가 만들어져야 하는 이유, 세상에 존재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이고, 이걸 찍으면 누가 볼 것 같냐는 얘기를 많이 들었다. 가족 이야기라 저에겐 참 중요한데 그런 질문을 들으니까 말문이 막혔다. 감독님이라면 어떻게 대답하실지 궁금하다. 

이: <비밀의 언덕>이 ‘왜 만들어져야 하는가?’라는 질문과 같은 것 같다. 그때는 언어가 없어서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인물의 심리, 가정환경조사서가 아무렇지도 않지 않은 사람을 잘 구현하면 그분들에게 위안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 일단 저에게 위안이 됐다. 주인공은 모든 수치심을 겪는다. 이 인물을 통해 우린 어떤 시절을 겪어왔는가, 어떤 어른이 될 수 있는가를 생각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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