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영화를 읽다
[WDN 여성감독 작업노트] 카메라를 멈추면 안돼!
<풀> 이수정 감독
WDN / 2025-05-09
여성감독네트워크 WDN에서 지난 4월 19일 케이스 스터디 <여성감독 작업노트>를 진행했습니다. 감독의 발표 이후 대담과 자유로운 질의응답 시간을 가지며 생생한 제작 스토리와 실질적인 꿀팁을 나눴답니다. 이번 행사에서 나온 이야기들을 글로 함께 만나보시죠 :) |
<4th 여성감독 작업노트 “영화는 기세다!”> -일시: 2025.4.19.(토) 오후 1시 -장소: 서울여성플라자 아트컬리지3 -발표: 이수정 회원 -사회: 김보람 회원 |
다시 일어나 카메라를 들기
황금 같은 주말 오후, 이 자리에서 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어 기쁘다. 이런 제안이 오면 망설이게 된다. ‘나는 너무 옛날 사람 아닌가?’, ‘내 이야기가 지금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지만 지나간 과거에 머문 사람이 아니라, 지금도 현역에서 버티고 있는 사람으로서 이야기해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 발표의 제목은 ‘카메라를 멈추면 안 돼’다. 일본의 좀비 영화 제목에서 따온 패러디이지만, 내 작업 방식과 맞닿아 있어 좋았다. 스스로를 좀비 같다고 생각한다. 죽었지만 죽지 않은 자, 언데드처럼 비틀거리면서도 계속 살아 움직인다. 고단한 삶 속에서도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다시 일어나 카메라를 든다. 때로는 그런 내가 좀비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85호 크레인에서 시작된 다큐멘터리
15년째 꾸준히 장편 다큐멘터리를 만들고 있다. 다들 놀라곤 한다. 이 연배의 사람이 다큐멘터리를 지속적으로 만든다는 게 흔한 일이 아니므로. 내 작업 인생의 변곡점이 된 건 2011년의 ‘희망버스’였다. 부산 한진중공업 85호 크레인 위에 김진숙 지도위원이 고공농성 중이라는 뉴스를 접했고, 나는 희망버스 탑승객으로 현장을 찾았고 카메라로 찍기 시작했다. 그전까지 극영화 PD로 활동하며 상업영화 감독 데뷔를 준비하던 중이었다. 다시 현장으로 돌아오려 애쓰는 시기였다. <깔깔깔 희망버스>는 여러모로 미흡한 점도 많고 오글거리기도 하지만, 그 당시에 느꼈던 절박함과 뜨거운 마음이 고스란히 담긴 내 첫 장편 다큐멘터리다. 1차 희망버스 때는 카메라가 없어서 남의 카메라를 잠시 빌려 들고 갔고 이후 2차부터는 본격적으로 카메라를 들고 다니기 시작했고, 그 이후로 쭉 다큐멘터리 작업을 하고 있다.
<깔깔깔 희망버스> 스틸컷 ©WDN
셀프 포트레이트 다큐, 나 자신을 주인공으로
<깔깔깔 희망버스>를 편집할 때, 이 이야기를 누구의 시점으로 풀어야 할지 고민이었다. 그러다 협력 PD의 제안으로 셀프 포트레이트 형식을 취하고, 나의 변화를 주된 축으로 삼았다. 내가 찍힌 장면, 내가 김진숙이라는 인물을 점점 더 사랑하게 되는 감정, 크레인 위의 그 사람을 땅으로 데려오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애쓰는 과정, 그리고 ‘날라리 외부세력’이라고 불리며 연대했던 박성미 감독의 이야기도 함께 담았다. 이걸 러브 스토리처럼 구성하면 어떨까 싶었다. 그 흐름 속에서 내가 어떻게 변해가는 지를 솔직하게 풀었다. 나레이션을 굉장히 급하게 썼고, 과잉된 표현이 많았다.
영화 속 번지점프 장면이 나오는데 우연히 체험하게 된 것이었다. 김진숙 지도위원의 고공농성과 맞닿아 있는 ‘높이’라는 상징을 떠올리며 영화에 넣게 되었다. 번지 점프 전에 자기 소원을 외치지 않나, “희망버스 파이팅!”을 외치며 같이 갔던 PD님들에게 부탁해 핸드폰 세 대를 동원하여 위아래에서 동시에 찍었고, 그것이 영화의 후반부에 사용되었다.
아무도 시키지 않은 일을 계속하는 사람
극영화 PD로 일할 때는 누가 나를 불러주기를 기다렸다. 투자사에서 “이 작품 맡아봐”라고 말해주는 걸 기다렸고, 계속해서 방황했다. 나는 상업영화에서 잘 통하는 이야기를 쓰는 사람이 아니었다. 마이너한 면이 있다. 결국 아무도 시키지 않은 일을 스스로 자처하게 되었고, 독립 다큐멘터리 감독이 된 거다.
다큐멘터리는 보상이 많지 않다. 몸도 고생스럽고, 장비도 열악하고, 늘 허덕이며 만든다. 사랑이 없다면 절대 할 수 없는 일이다. 굉장히 힘든 현장 안에 들어가서 남들이 찍지 못하는 걸 내가 찍어낼 수 있을 때, 그때의 쾌감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사랑에 빠졌기 때문에 했던 거다. 영화를 만드는 게 사실 그런 거지 않나.
<깔깔깔 희망버스>를 찍으면서 잊을 수 없는 이미지가 있다. 우연히 발견한 영도의 조선소 앞, 빗물에 비친 85호 크레인의 그림자다. 공장 담벼락 바깥, 땅바닥에 고인 흙탕물에 크레인이 비친 그 장면이 지금도 생생하다. 나는 ‘영도’라는 섬의 이름처럼, ‘그림자의 섬’, ‘서로를 반영하는 섬’이라는 느낌에 사로잡혔었다. 그런 장면을 건져 올릴 때의 쾌감이 있었다. 다큐멘터리 작업은 그런 우연과 이미지, 감응의 순간들을 건져내는 일이다. 그것이 이 일을 계속하게 만든다.
생의 한가운데, 내 영화사의 이름
처음 사업자를 등록했을 때는 ‘영화제작소 다’라는 이름을 썼다. 지금 돌이켜보면 꽤 80년대스러운 이름이지만, 그 시절에는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이후 <시 읽는 시간>을 작업하면서 이름을 바꾸게 되었고, 지금의 ‘생의 한가운데’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이 이름은 루이제 린저의 소설 『생의 한가운데』에서 따왔다. 내가 중학생 때, 잘 알지도 못하면서도 그 책을 읽었는데, 주인공 니나 부슈만이라는 인물에 강한 인상을 받았다. 언니는 중산층의 삶을 살고 있었지만, 니나는 자신의 욕망대로 살고, 이혼도 하고, 사랑도 자유롭게 하며 거침없는 여성이었다. 그게 너무 멋있어 보였다. ‘나도 저렇게 살아야겠다’, ‘나는 늘 생의 한가운데에 있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 마음이 지금까지 이어져서, 결국 내 영화사의 이름이 되었다.
대학교 영화 서클에서 만난 사람과 연애를 하다가 결혼을 했다. 1991년에 아이를 낳았고, 그 당시 나는 스물아홉이었다. 모유 수유를 1년 넘게 하면서 아이를 키웠다. 그 시절에는 육아 지원도 없었고, 경제적 여유도 없었다. 인터넷도 활발하지 않던 때라 정보도 부족했고, 서울에서 조금 떨어진 인천과 부천에 살면서 커뮤니티와도 단절된 채 외롭게 지냈다. 아이를 낳기 직전까지는 민족영화연구소와 한겨레영화제작소에서 활동하고 있었지만, 아이를 낳고 나서부터는 영화 현장과 완전히 단절되었다. 하루하루 고립된 채로 버텨야 했던 시절이었다. 아무도 나를 불러주지 않는 그 시간들이 내 자존감을 무너뜨렸다. 하지만 그런 몰락의 경험이 결국엔 나를 다시 일으켜 세운 힘이 되었다. 실패의 역사들이 지금의 나를 만든 셈이다.
카메라로 운동을 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88년도에 민족영화연구소에 들어가서 영화 운동을 시작했다. 그 당시에는 언론이 막혀 있었기 때문에 노동자나 시민단체들이 내부 교육을 위해 영상 자료를 절실히 필요로 하던 시기였다. 우리는 비디오 테이프를 수백 장씩 복사해서 전국에 뿌렸다. VHS 테이프를 복제해 노동조합, 학교, 재야단체 등지로 보내는 방식이었다. 그걸로 어느 정도 수익도 나서, 돈을 모아 16mm 카메라도 살 수 있었다. 그 카메라로 <하늘 아래 방 한 칸> 같은 단편 영화도 찍었다.
그 시절에는 정말 ‘위험’을 감수하며 영화를 만들었다. 괜히 영상물 하나 잘못 엮이면 국가보안법에 걸려 고문당하고 잡혀가던 시대였다. 그래서 늘 조심스럽게 작업을 했고 그만큼 치열했다. 당시의 정치적 상황을 담은 속보 영상을 만들어 일주일이면 전국으로 퍼뜨릴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기도 했다.
나는 학생운동 조직에 있던 사람은 아니었지만, 카메라를 들고 현장을 기록했다. 지금도 그렇다. 운동의 당사자로 앞에 서는 사람이기보다는, 그 현장을 기록함으로써 운동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이다. 때로는 그게 비겁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그게 나의 방식이고, 나의 숙명 같은 것이기도 하다.
카메라를 들고 있는 순간에는 미친 듯이 찍는다. 그래서 때로는 일부러 카메라를 안 들고 가기도 한다. 찍는 사람으로만 존재하는 게 힘들 때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카메라가 없으면 허전하고, ‘이건 찍어야 하는데’라는 생각이 들어 다시 카메라를 들게 된다. 그렇게 지금까지도 카메라와 함께 살아가고 있다.
37년 전, 1988년 가을 민족영화연구소 ©한겨레영화제작소
남은 여성은 거의 없었다
88년, 민족영화연구소에서 활동하던 시절, 함께했던 동료들 가운데 지금까지 영화계에 남아있는 여성은 거의 없다. 당시 단체사진을 보면 모두 20대의 앳된 얼굴들이다. 지금은 감독이 된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은 영화계를 떠났다. 나는 그중 유일하게 지금까지 이 길을 붙들고 있다. 영화계에서 여성으로 살아남는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내 온몸으로 겪었다. 그 시절에 함께했던 동료 남성들은 충무로에 들어가 연출부를 하고, 감독으로 데뷔했다. 그에 비해 여성들은 결혼하고 육아에 집중해야 했고, 영화계에서 지워졌다. 나는 지워지지 않기 위해 끝끝내 붙들고 있었고, 지금도 작업을 붙들고 있다.
영화의 기술은 장비가 아니라 지속이다
8mm 필름부터 시작해 16mm, VHS, 베타캠, 6mm, 미니DV, HD 카메라까지 다양한 장비들을 다뤄왔다. 특히 GH4 루믹스 같은 소형 카메라는 세월호 다큐를 찍기 위해 구매했는데, 지금도 종종 사용하고 있다. 전문가 장비로 보기에 초라할지 몰라도, 나에게는 이 장비들이 가장 잘 맞는다. 들고 다니기 좋고, 부담도 적다. 나만의 방식으로 계속 촬영해왔다. 콜트콜텍 노동자들의 투쟁을 담은 <재춘언니>는 8년간 촬영한 다큐멘터리다. 인도네시아까지 찾아가 공장이 이전된 현장을 찍었고, 긴 시간 동안 관계를 이어가며 기록했다. 이런 지속적인 작업은 내게 기술보다 중요한 게 무엇인지를 끊임없이 묻게 했다. 그것은 결국 ‘지속’이었다. 이것이 나의 기술이자 자산이다. 영화는 장비가 아니라 시간과 기억, 기록의 힘으로 만든다는 걸 나는 오랜 시간에 걸쳐 배워왔다.
<재춘언니> 스틸컷 ©WDN
집이라는 공간에서 다시 시작하는 기록
남가좌동의 15평짜리 빌라에서 30년 가까이 살고 있고, 아들이 독립한 뒤부터는 그의 방을 작업실로 바꿨다. 그렇게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작년 봄, 짐 정리 도중 오래된 박스 하나를 열었고, 그 안에는 1980년대 후반 내가 찍었던 8mm 필름과 16mm 릴들이 들어 있었다. 그중엔 국가보안법에 저촉되었을 법한 영상도 있었다. 남편이 만들었던 <부활하는 산하> 같은 작품이 그 예다. 집안에서 발견한 아카이브를 모아 <집>(가제)이라는 새로운 프로젝트로 연결하고자 한다. 내가 살아온 공간, 우리 가족의 시간, 그리고 우리가 어떻게 흘러왔는지를 돌아보는 작업이다.
잃어버린 줄 알았던 자료였다. 그 자료들은 단순한 물건이 아니었다. 내 삶과 영화의 궤적, 그리고 여성 영화인이 살아남기 위해 붙잡아온 시간들이 응축된 것이었다. 이번 작업은 나의 영화 인생에 또 다른 축이 될 것이다.
나는 영화다. 나는 주름이다.
페데리코 펠리니 감독의 책 제목이 떠오른다. ‘나는 영화다’. 우리 모두의 삶이 이야기이고 영화이지 않은가? 그런 생각을 하며 살아간다. 내 삶은 영화이고, 나는 늘 그 안에 있다. 나는 궁동산을 산책하면서도 나뭇잎 그림자를 찍고, 철학과 정신분석을 공부하며 내 작업과 연결 지으려 한다. 들뢰즈의 문장에서 말하는 것처럼, 글쓰기는 지도 제작이고, 삶은 주름이다. 삶은 주름을 접었다 펴는 일의 반복이다. 주름이 완전히 펼쳐지면 그건 죽음이다. 나는 아직도 접고 펴고 있으니, 살아 있는 셈이다. 우리의 영화 작업은 그런 주름을 만드는 일이라고 믿는다.
최근 장편 다큐 <풀>을 완성했고, 6월 개봉을 앞두고 있다. 그리고 후속작으로 <만물은 서로 돕는다>(가제)라는 제목의 다큐멘터리를 구상 중이다. 크로포트킨의 아나키즘에서 영감을 받았다. 사람뿐 아니라 식물, 무생물까지 감응하는 존재로 다루는 작품이 될 것이다. 앞서 말했던 <집> 프로젝트도 여전히 진행 중이다. 모든 존재는 서로 돕는다. 나의 영화도 그 속에서 생겨난다. 주름을 폈다 접었다 하면서 아름다운 음악을 내는 아코디언처럼, 우리는 영화로 계속 주름을 만들어가는 것 아닐까 생각한다.
이수정 감독 X 김보람 감독 대담
김보람
감독님은 영문학을 전공했고 이후 소설가가 되고 싶어 하셨다. 문학 소녀로서 쌓아온 자산이 영화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궁금하다.
이수정
어머니가 문학적인 분이셨고, 못다 이룬 꿈을 내가 이어받겠다는 마음이 있었다. 어렸을 때는 백일장에서 장원도 받으며 당연히 작가가 될 것이라는 꿈을 꾸었지만, 막상 대학에 가니 글이 써지지 않았다. 그러다가 85년도 ‘작은영화 상영회’에서 선배들이 만든 어설픈 8밀리 영화들을 보며 ‘나도 이런 영화를 만들고 싶다’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것이 영화 작업의 시작이 되었다.
김보람
그래도 그런 문학적인 토대가 지금의 영화 작업에도 녹아 있는 것 같다.
이수정
20대 이후 많이 깨졌다. 결혼하고 아이를 낳으며 몰락의 경험을 했고, 자존감이란 것은 그렇게 다르게 형성되는 것임을 느꼈다. 실패의 역사들이 결국 지금까지 나를 이끌고 온 힘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여러분들도 제 실패의 역사를 듣고 용기를 얻으셨으면 좋겠다. 만약 지금 힘든 상황이라도 끈질기게 버티면, 그리고 계속 꿈을 꾼다면 언젠가는 된다고 꼭 말씀을 드리고 싶다.
김보람
임신, 출산으로 혼자 집에 고립되어 있을 때도 오랜 시간 영화 자료를 탐독하며 영화 만들기를 벼르고 계셨다고 들었다. 그게 지금도 감독님이 영화를 할 수 있게 하는 원동력이 되는 것 같다. 그런 연구와 탐구의 원천은 어디서 비롯된 것인지 궁금하다.
이수정
내가 틈만 나면 이야기하는 것이 있다. 나는 WDN 소모임들도 너무 좋다고 생각한다. 소모임이든 뭐든 인간은 공동체를 만들어야 한다. 혼자 있으면 우울해지고 삶이 무너지는 것이 우울증이다. 나도 그런 시절이 있었고 일부러 공부 모임도 만들고, 춤 동호회도 다녀보았다. 생산적이지 않더라도, 그런 경험들이 다 영화 작업의 재료가 되더라. 결국 모든 것이 영화로 연결된다고 느낀다.
‘나는 왜 이러고 있을까? 나는 어떤 사람일까?’ 같은 고민들을 안고 철학 공부를 시작했다. 처음엔 어렵게 느껴졌지만, 오히려 그 어려움이 공부를 계속하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처음부터 100% 이해하려고 하지 않고, 10%, 20%라도 이해해보겠다는 마음으로 공부하다 보면 조금씩 변화하는 자신을 느끼게 된다. 그러다 보면 이상하게도 힘이 생긴다. 요가도 마찬가지였다. 10년 넘게 요가를 하면서 안 되던 동작도 조금씩 되기 시작했고, 몸이 유연해지고 면역력이 커지는 걸 느끼게 되었다.
지금은 루틴처럼 요가를 하고, 1시간 이내 거리는 걸어서 다니고 있다. 동시에 여러 세미나 모임을 하고 있다. 글쓰기 모임, 책 읽기 모임 등 타자들과 함께 공부하는 자리를 일부러 만들고 있다. 인간은 혼자서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라 무리의 동물이라는 걸 다시금 깨닫게 된다. 서로 상호부조를 하면서 살아가는 존재다. 그런 공부의 자리에서 도전과 아이디어가 샘 솟고, 타인에게 자극받고, 또 내가 타인에게 영향을 주면서 다시 나에게 힘이 돌아온다. 그렇게 서로서로 돕고 살아간다.
김보람
보상 없는 일을 지속한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감독님은 어떤 마음가짐으로 작업을 이어가는 걸까?
이수정
예전에는 상도 받고 싶고, 사회적으로 인정받고 싶었다. 하지만 그런 기대는 서서히 사라졌다. 하고 싶은 일을 하다 보면 보상은 다른 방식으로 온다. 결국 중요한 건 사람들과의 관계이고, 지금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이다. 그것이 곧 삶이라 생각한다.
김보람
그렇다면 지금 감독님에게 영화란 어떤 의미인가? 계속해서 영화를 만든다는 건 어떤 감정일까?
이수정
영화가 전부는 아니지만, 내가 가장 하고 싶은 일이다. 하지만 영화가 아니어도 괜찮다고 생각할 수 있는 마음가짐도 중요하다. 힘들어도 버텨야 하고, 내가 했던 말을 지켜야 한다는 책임감도 있다. 그래서 운동도 하고 건강을 챙기며 계속 작업을 이어가고 있다.
김보람
마지막으로, 지금처럼 영화 제작 환경이 어려운 상황에서도 장편 작업을 꾸준히 이어가는 원동력은 무엇일까?
이수정
극장 개봉까지 갈 수 있었던 작품들은 제작 지원이 없이는 불가능했던 것들이다. 그런데 지금 작업 중인 프로젝트가 세 편 정도 있다. 제작 지원이 줄어든 현실에서 초조한 마음도 들지만, 여전히 해보려는 노력을 하고 있다. 편집도 독학으로 툴을 익혀가며 해오고 있고, 할 수 있는 만큼 계속해볼 생각이다. 다큐멘터리를 찍겠다고 말해놓고, 각 프로젝트 별로 연루된 사람들이 있는데 그것을 완성해야 한다는 책임감이 계속 영화를 만들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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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감독네트워크는 여성감독들이 모여 서로를 지지하고, 연결하고, 돕는 모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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