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영화를 읽다

태양의 흑점 폭발 같은 기세

< It Is My Fault >

김승희|영화감독 / 2020-03-12

< It Is My Fault > 스틸컷

2020년이면 1995년에 만들어진 영화 <12 몽키즈>(12 Monkeys, 감독 테리 길리암)의 배경까지 15년밖에 남지 않은 시점이다. 그리고 1989년 작 TV만화 <2020 우주의 원더키디>의 배경이 되는 해이다. 2000년이면 지구가 종말하고 2020년에는 포스트 아포칼립스 세계에서 살 게 될 줄 알았건만, 아직도 세상은 참으로 건재하다. 이쯤 되면 온 인류가 마음을 합쳐 지구를 멸망시킨 바이러스나 정체불명의 외계인과 맞서 싸울 줄 알았는데 말이다.

2020년 현실에선 영화와 달리, 인간이 만들어낸 새로운 지옥이 있다. 디지털 시대에 살면서 벗어날 수 없는 스크린과 소비의 지옥. 가상에만 존재하는 우리들의 디지털 아이덴티티는 진작에 스크린을 넘어 실제 삶에 영향을 미친 지 오래다. 이제 인류는 스크린에 의존하지 않고서는 자립할 수 없고, 고립될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되었다. TV 스크린에서 데스크톱, 노트북, 휴대폰 심지어 손목시계의 스크린까지, 스크린 너머 스크린을 벗어날 수 없다. 

새 인류의 시작을 보여주는 포스트 아포칼립스 영화의 희망적인 엔딩과는 달리 2020년에 우리는 벗어날 수 없고 오히려 의존할 수밖에 없는 디지털 세상에 더욱 갇힌 듯한 기분마저 든다.  

< It Is My Fault > 스틸컷

여기 이 풍경을 강렬한 에너지로 풀어낸 작품이 있다. 리우 샤 감독의 < It Is My Fault >(2016)이다. 약 5분간의 러닝타임 동안 스크린을 주시하고 있으면 뜨거움을 견디다 못해 타 녹아내려 버리는 플라스틱 용기를 보고 있는 기분이 든다. 이 작품은 오디오 비주얼 애니메이션으로 지금까지 소개했던 작품들과는 달리 뚜렷한 스토리라인이 없기에 이미지와 사운드로 그 감각을 전달하는 데 집중한다. 로우폴리 아트워크와 8-bit 사운드 그리고 일상적이면서도 동시에 파괴적이고 아이러니한 이미지들의 나열과 반복이 의외로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특히 영상 작업자들은 ‘렌더링’과 ‘FAIL’이라는 단어가 나올 때 그 지옥의 기분을 다시 느낄 수 있을지도. 혹은 실제로 울고 싶은 기분이지만 이모티콘으로는 하트를 날려야만 하는 그때의 그 기분을 다시 상기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마지막에 나오는 머리를 다독이는 두 손의, 위로해주는 것 같으면서도 ‘그래, 네 탓이야’라는 듯한 중의적 표현과 그것마저 윈도우 창에 갇혀버리는 마무리는 감정 역시 스크린을 통해 전달되는 물질화 돼버린 지금을 보여주는 것만 같다. 

오디오비주얼 작품의 장점이란 작품 속에서 각자가 반응하게 되는 요소를 발견해 개개인의 서사를 만들어 낸다는 점에 있다. 그런 면에서 이 작품은 보는 사람에 따라 다른 디지털 지옥도를 보게 될 거라 생각한다. 

< It Is My Fault > 스틸컷

리우 샤 감독은 중국 베이징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감독으로 해당 작품은 2017년 슬램댄스 단편 경쟁에 올랐으며 플로리다 국제영화제, 오타와 애니메이션 페스티벌, 안시 애니메이션 페스티벌 등 주요 영화제와 애니메이션 페스티벌에 소개됐다. 내가 이 작품을 보게 된 것은 페스티벌 서킷이 끝난 후 비메오 스태프픽에 프리미어로 풀렸을 때였다. 언제나처럼 비메오에 아시아 여성 감독의 애니메이션이 주요 플랫폼에 소개되면 그 기쁜 마음은 더할 나위 없다. 

성공적인 영화제 서킷을 돌고 있는 작품은 영화제에 가지 않는 이상 온라인 공개를 기다릴 수밖에 없다. 더욱이 이 작품은 국내 영화제에서는 상영된 적이 없어 감독의 온라인 공개 여부에 따라 관람 가능 여부가 갈리는 경우였는데, 감사하게도 감독이 비메오에 온라인 프리미어로 공개했다. 

< It Is My Fault > 스틸컷

처음 이 작품을 봤을 때가 기억이 난다. 플레이 버튼을 누르고 머지않아 갈 길을 잃은 감탄사가 입 밖으로 삐져나왔다. 마지막까지 본 뒤에는 쾌감이 올라왔다. 그 쾌감의 이유는 여성 감독이 그려낸 여과 없는 디지털 지옥도가 강렬하다 못해 컴퓨터 스크린이 폭발할 지경이었기 때문이다. 로우폴리 아트워크와 8-bit사운드 컨셉은 사실 과거 데이빗 오렐리(영화 에서 에일리언 꼬마가 나오는 홀로그램 게임의 애니메이션을 맡은 감독)의 스타일을 떠올리게 했지만, 이 작품의 힘은 가히 그를 능가한다고 느껴졌다. 

그의 작품은 폭발 후 버섯구름 같은 느낌이라면, 이 작품은 태양 흑점 폭발 같은 기세다. 멀리 있는 지구의 전파 통신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그런 기세. 

2040년쯤 되면 이 작품의 풍경은 지옥도가 아니라 일상의 풍경을 그린 민화 정도가 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 작품이 내포하고 있는 그 파워를 능가하는 작품을 만나기에는 당분간은 어렵지 않을까 싶다. 


*해당 작품은 비메오에서 볼 수 있습니다. 참고로 작품 후반부에 나오는 스트로보효과 때문에 광과민성 발작을 일으킬 수 있으니 관람에 주의를 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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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메이션 <심심> <심경> 등 연출, <피의 연대기> 애니메이션 작업 참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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