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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코리오그래피
셀린 시아마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정지혜|영화평론가 / 2020-02-06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스틸컷
‘사랑의 초상’에 관해서라면 우리는 지금 가장 뜨거운 이름 하나를 기억해야 한다. 지난해 칸국제영화제에서 각본상과 퀴어 종려상을 받은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2019)의 셀린 시아마다. 프랑스의 감독이자 시나리오 작가인 셀린 시아마는 줄곧 소녀들과 여인들의 ‘사랑의 역학’을 그리는 데 집중해왔다. ‘사랑의 초상, 사랑의 묘사, 사랑의 역학’이라는 말은 단지 그를 묘사하기 위한 수사적 표현이 아니라 ‘사랑의 정치’와 더불어 셀린 시아마가 자신의 영화를 두고 자주 쓰는 말이라는 점을 주목하고 싶다.
그에게 사랑은 사려 깊은 관찰과 시선의 주고받음 끝에 세밀하게 그려나가는 초상화 그리기 작업과 유사하며 시선, 관계, 감정의 역동적인 자리바꿈과 그로부터 발화하는 활기, 그 유동하는 활동의 순간이다. 동시에 이 활동은 지극히 정치적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때의 ‘정치적인 것’이란 셀린 시아마가 그리는 퀴어멜로가 당대 사회에 제기하는 흥미롭고 아름다운 파열음과 균열을 직접적으로 의미한다기보다는 그의 영화가 기꺼이 천착하는 여성들 간의 관계 상호성, 쌍방의 감정 동학 그 자체에 더 가깝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 개념들은 셀린 시아마가 또한 자주 언급하는 ‘사랑의 코리오그래피(Choreography)’라는 말로 한데 모일 수 있을 것 같다. 춤, 무용, 안무에 해당하는 ‘Choreo’와 ‘기록하다’라는 의미인 ‘graphy’가 결합해 안무 연출이자 육체적 수행의 기록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셀린 시아마에게 사랑이란 의미학적 기호이거나 지시적 차원이 아니라 몸소 수행하는 육체, 그 육체의 주인으로서의 기술(記述)이며 수행성의 미학이자 기억 활동이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은 셀린 시아마의 사랑의 코리오그래피가 잠정적으로 정점에 이른 작품이다. 셀린 시아마가 말했듯 이 영화는 크게 두 개의 플롯으로 진행된다. 한 축에는 이제 막 시작된 사랑, 그 사랑이 진척되며 내뿜는 강렬한 에너지의 멜로드라마가 있고, 다른 한 축에는 사랑이 남기고 간 것들과 그것을 기억하려는 예술가적 시도와 창작의 활동이 있다. 셀린 시아마는 두 축을 자연스레 결합하는 과정에서 18세기 여성 직업 화가인 마르안느(노에미 멜랑)와 그의 주체적인 모델이자 사랑의 대상인 엘로이즈(아델 에넬)를 불러낸다. ‘초상화를 그린다’고 했을 때 관습적으로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다면 이런 게 되겠다. 화가와 일정 거리를 유지한 곳에 모델이 있고 모델은 화가의 지시와 요구에 따라 포즈를 취하며 한동안 그 자세를 유지한 채 정물처럼 있는 것. 비록 화가와 모델 사이의 시선이 동일 선상에 있다 하더라도 그 시선이 지속하는 그림 그리기의 시간은 모델의 것이라기보다는 화가의 것에 더욱 가까워 보인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스틸컷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은 초상화 그리기를 둘러싼 관습적 이미지와 패턴, 나아가 시선의 위계라는 문제를 깨부순다. 그리고는 다른 방식의 응시와 관계성이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걸 보여주며 우리의 가시권을 확장하는 것이다. 단적으로 엘로이즈는 자신을 관찰하며 구체적으로 그림을 그려나가는 마리안느에게 이렇게 말한다. “당신이 (초상화를 그리려고) 날 볼 때 나는 누굴 보겠어요.” 그렇다. 사랑의 역학 속에서 관찰의 시선은 결코 일방적일 수 없으며 그것은 동시적이며 상호적이다. 마리안느가 엘로이즈에게 자기 뜻대로 포즈를 요청하는 게 아니라 엘로이즈가 자의로 사랑의 제스처를 해 보이고 엘로이즈가 마리안느에게 이젤 너머 자기 쪽으로 와서 그림 그리는 당신의 자리를 보라고 요청하기도 한다. 고정된 자리에 붙박인 게 아니라 사랑하는 마음의 동세에 따라 몸이 움직여 이동하고 인물의 위치가 바뀌고 그들의 시선이 변한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에서 이러한 역학은 단지 사랑하는 사람들 사이에만 제시되는 게 아니라는 점도 반드시 함께 말해야 한다. 영화는 현재의 시점에서 시작해 플래시백으로 마리안느와 엘로이즈가 사랑을 나누던 때로 거슬러 올라갔다가 다시 돌아오는 구조를 띠고 있다. 영화의 도입에서 현재 시점의 마리안느는 소녀들을 대상으로 초상화 그리기 수업을 진행하는데 이때 마리안느는 선생님이자 초상화의 모델로서 학생들 앞에 나서서 단 하나를 주문한다. “나를 천천히 관찰하라.” 모델이자 선생님이라는 이중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그는 화가이자 학생인 소녀들에게 시간을 들여 시선을 주고받자고 제안하는 것이다. 이러한 도입 이후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영화의 플래시백을 두고 사랑의 기억술이라고 말하고 싶어진다. 사랑의 격정이 지나간 이후, 현재 마리안느는 그림 그리기를 계속하며 화폭 위에 그때의 기억을 기술해간다.
다시 돌아가면, 사랑의 진척과 그림 그리기라는 예술 활동은 이 영화에서 동시에 함께 진행되며 사랑이 예술가의 창작의 불쏘시개가 됐다가 소진되거나 그럴 수 있다는 환상 같은 건 이 영화에서 찾아볼 수 없다. 셀린 시아마가 공공연히 ‘뮤즈’ 개념에 반대했던 것도 이와 같은 이유일 것이다. 많은 경우 남성 예술가가 자신의 창작 동력이자 모티프가 돼준 여성을 두고 ‘뮤즈’라고 부를 때 그 말은 여성 예술가, 여성 공동 창작자의 존재를 지우고 여성을 물신화하기 때문이라 말한다. 존재하지만 가시화되지 않는 방식으로 여성의 자리와 사랑, 창작을 지우는 일을 셀린 시아마는 단호히 거부해왔다. 여기서 멈추지 않고 셀린 시아마는 더욱 가열차게 몰아붙인다.
18세기 프랑스 브르타뉴 지역의 섬마을이라는 고립되고 폐쇄적인 영화의 배경은 인물들에게 장벽과 장애로 부각되기보다는 여인들만의 온전한 사랑의 공간이 되고, 엘로이즈의 초상화가 밀라노의 정혼자에게 보내져야 할 시간은 점점 다가오지만 그들은 그 시간을 걱정하느라 전전긍긍하기보다는 귀하디 귀한 현재의 시간을 잊지도, 잃지도 않기 위해 집중한다. 지금 자신 앞에 있는 사랑의 대상에 더욱더 몰두하며 온몸으로 기억해간다. 여성들의 사랑과 연대, 창작과 유희의 활동에 온전히 시간을 쏟아도 부족하기에 남성 캐릭터에게 쓸데없이 시선을 돌릴 필요조차 느끼지 못한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스틸컷
여성들이 사랑하고 즐겁게 지낼 때 거기에 특별한 이유나 설명은 불필요하다. 마리안느, 엘로이즈가 하녀인 소피(루아나 바야미)와 함께 카드 게임을 하며 박장대소하고, 요리하는 엘로이즈 옆에서 소피는 자수를 놓고, 그들 사이로 마리안느가 들어와 앉으며 와인을 홀짝인다. 나란히 앉아 각자 할 일을 묵묵히 수행하는 이 평화롭고 온화한 시간은 그 자체로 아름다운 한 폭의 그림이 돼준다.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의 사랑과 이별에 관한 신화를 둘러싸고 세 여성이 각기 다른 해석을 덧붙일 때도 그들의 의견에 우열이나 평가는 없으며 오직 동등한 발언권과 각자의 다른 선택지만이 있을 뿐이다. 마치 우리의 상상력과 선택지는 이렇게도 다르고 다양할 수 있다는 듯이 말이다.
소피가 ‘아이를 원치 않는다’고 정확히 자신의 의사를 밝히고 지체 없이 낙태 시술을 받을 때 마리안느와 엘로이즈는 소피 곁에 함께한다. 마리안느가 차마 이 상황을 직시하지 못하자 엘로이즈는 피하지 말고 똑바로 지켜보라 한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세 사람은 이때의 경험을 그림으로 남기는 과감한 시도까지 단행하는 것이다. 당사자인 소피는 그림의 모델이 돼 자기 체험을 재현하고, 관찰자이자 목격자였던 엘로이즈도 낙태 시술자 역할을 자청하며 재현에 동참하며, 이들 모델을 앞에 둔 화가 마리안느는 생생한 삶을 캔버스 위에 재현해낸다.
<워터 릴리스> 스틸컷
셀린 시아마의 앞선 작품들은 사랑과 정체성이라는 테마를 둘러싸고 소녀들이 경험하는 내밀한 감정의 파고에 좀 더 주목했던 것 같다. 아직 볼 기회가 없었던 <걸후드>를 제외하고, <워터 릴리스>와 <톰보이>를 놓고 보니 특히 그러한 경향이 두드러진다. 여성 싱크로나이즈드 팀 주장인 플로리안느(아델 에넬)를 향한 소녀 마리(폴린 아콰르)의 애달픈 사랑을 그린 <워터 릴리스>에는 사랑을 확인하고 흔들림 없이 그 사랑에 집중하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의 방식과는 다른 카오스의 시간이 흐른다. 이때의 시간은 더 많이 사랑하는 쪽, 더 사랑을 확신하는 쪽이 감내해야 하는 슬픔의 시간이기도 하다.
마리뿐 아니라 플로리안느, 마리의 친구인 안느 역시 정리되지 않는 혼재된 욕망으로 혼란스럽다. 이와 관련돼 있기도 한 감독의 코멘트가 있다. 영화의 원제가 ‘낙지의 탄생’이었던 이유에 대한 설명이었다. “사랑에 빠졌을 때 우리 뱃속에 마치 낙지 한 마리가 꿈틀대는 듯한 느낌이 들지 않나. 욕망덩어리가 들끓기도 하고 그러다 까만 먹물을 내뿜듯 나쁜 기운이 퍼지기도 하고. 뭔가 미스터리한 일이 일어나는 듯해 그런 제목을 지어봤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에 그림 그리기가 있고 시선과 관찰의 정념이 있었다면, <워터 릴리스>에는 싱크로나이즈드 스위밍 팀을 비롯해 축축하게 젖어 드는 에로틱한 물의 이미지가 강렬하게 자리한다. 셀린 시아마는 싱크로나이즈드 스위밍이 여성들의 강인한 체력과 움직임을 보여줄 수 있는 운동인 동시에 여성들에게 화려한 화장술과 웃는 표정을 요구하는 운동이라는 점에 흥미를 느꼈다고 말하기도 한다. 이성애 중심의 사랑, 사랑의 첫 경험을 둘러싼 통념 앞에서 자신의 욕망과 감정이 부딪힐 때, <워터 릴리스>의 소녀들은 각자의 슬픔과 기쁨을 경험한다.
<톰보이> 스틸컷
<톰보이>는 여자아이로 태어났지만, 소년이 되고 싶은 로레(조에 헤란)의 이야기다. 가족, 친구 모두에게 자신의 진짜 존재를 숨겨야 하는 아이는 여자아이로서의 신체적 특징을 가리고 남자아이의 육체를 탐한다. 좋아하는 소녀 리사(진 디슨)에게 소년들에게 주로 지어주는 이름인 미카엘이라고 자신을 소개하는 로레. 이 아이의 위태로운 위장과 기쁨의 순간이 지속되기에는 세계는 전혀 만만치 않고 아이의 세계는 작고 또 연약하다. 갱단에 합류한 흑인 소녀가 진정 자신이 원하는 것인 무엇인가를 묻게 되는 영화로 알려진 <걸후드>에 관해서라면 셀린 시아마의 인터뷰가 참고가 될 만하다. “갱 문화가 아닌 여성들의 공동체(sisterhood)를 그리고 싶었다. 이 영화의 중심에는 강력한 여성 캐릭터가 자리하고 여성들의 사랑, 우정, 연대가 있다. 스크린에서 여성들이 성장하는 걸 지켜보는 일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스틸컷
아름답지만 혼란스러운 여성들의 공동체, 그들의 관계와 사랑을 거쳐 셀린 시아마는 마침내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에 도착한 것이다. 이제 여성들은 사랑 앞에 혼란스러워하기보다는 그 사랑에 오롯이 집중한다. 물론 그들도 알고 있다. 자기 앞에 정해진 운명의 길을 완벽히 뒤엎을 순 없다는 것을. 하지만 적어도 지금, 이 순간, 자기 앞의 사랑에 최대한 집중하고 호응하며 반응할 기세만큼은 충분하고 그것으로 충만하다. 비록 그 사랑의 시간이 흘러갔다고 해도 우리에게는 그때의 황홀을 기억하는 사랑의 코리오그래피가 있지 않은가. 셀린 시아마에게 사랑과 창작은 분리할 수 없는 하나의 세계이기에 이렇게 말해보고 싶은 것이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은 곧 셀린 시아마가 사랑을 그리는 방식, 그가 기억하는 사랑의 형태, 사랑의 기억 시효를 연장하는 예술의 방편이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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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디다큐페스티발 집행위원, 영화웹진 리버스 필진, 2018 부산국제영화제 한국단편 예심 진행, 공저 『아가씨 아카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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