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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설이지 말고, 페미니즘 돋보기
부엌의 정치와 미학
여성, 부엌, 가정의 관계
황미요조|영화평론가 / 2020-01-16
<부엌의 기호학> 스틸컷
여성에게 부엌 혹은 집, 가정은 어떤 공간일까? 1970년대 영화 이론과 페미니즘 운동이 결합한 결과 중 하나는 여성에게 천연적이라고 여겨졌던 혹은 여성과 거의 동일어처럼 사용되던 ‘가정’이라는 공간과 여성의 관계를 다시 생각하고 들여다보며 카메라로 포착하는 것이었다. 그 결과, 부엌과 식탁과 욕실 같은 ‘가정’ 공간이 여성에게 친근하고 편안한 곳이라고 여겨졌던 믿음은 신화에 불과하고 사실은 여성에게 낯설고 불편하며 억압적이고 심지어 공포스러운 것으로 드러난다.
마사 로즐러는 실험영화 <부엌의 기호학>(Semiotics of the Kitchen, 1975)에서 부엌의 기호들을 해체한다. 마사 로즐러는 부엌에 테이블을 가져다 두고 카메라 앞에 선다. 그리고 에이프런(Apron), 볼(Bowl), 식재료 다지기용 칼날(Chopper), 접시(Dish)… A부터 Z까지 각 알파벳으로 첫 글자인 부엌 기구들의 이름을 외치고, 그 기구들을 다루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것은 그 기구들이 기호적으로 갖는 의미와 다르다. 포크(Fork)를 외친 후 포크로 음식을 찍어서 먹는 것이 아니라 허공의 무언가를 힘차게 찌르는 공격적인 행동을 하는 식이다. 즉, 기호학에서 언어의 원리와 마찬가지로 포크라는 기호와 음식을 찍어 먹는 기구라는 의미 사이에 필연적 관계는 없다. 에이프런이 부엌일에 대한 어머니의 능숙함과 친숙함을 의미화할 필연적 이유도 없다. 그저 그렇게 부르고 생각했었던 것뿐이다.
마사 로즐러의 행동은 점점 더 거칠어지고 부엌의 기구들과 그녀의 몸 사이의 불화는 더욱더 강조된다. U, V, W, X, Y, Z에 이르러서는 자신의 몸을 이용해 알파벳 모양을 만든다. 이 여성의 신체는 부엌이라는 공간에서 자연스럽다고 할 수 있는가? 아니, 지독히 불편하며 인공적이다.
<주부의 하루> 스틸컷
이데미츠 마코가 주부와 그들의 공간을 다룬 비디오 작품들도 인상적이다. 일본 페미니스트 비디오 아트의 선구자 이데미츠 마코는 1960년대 말, 유학과 결혼으로 이주했던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급진적인 여성 예술가들을 만난 뒤 페미니스트 비디오 작업을 시작한다. 첫 번째 단독 작업인 16mm 영화 <여성의 집>(Woman’s House, 1972)에는 마치 공포영화의 세트 같은 부엌과 욕실이 등장한다. 목욕 수건을 층층이 쌓아 놓은 선반에는 목이 졸린 것 같은 여자 형상의 인형이 있고, 부엌 벽에는 계란 프라이 혹은 여성의 잘린 유방 모형이 빼곡하게 붙어있다. 화장실 휴지통에는 사용한 탐폰이 가득 쌓여 있다. 여성의 노동에 의해 관리되고 돌봐지지 않은 부엌과 욕실의 모습은 공포스럽다. 여성의 노동은 이 모습들을 은폐하고 감추는 데 쉴새 없이 쓰인다.
<주부의 하루>(Another Day of a Housewife, 1977)에서는 설거지, 빨래, 장보기를 하는 한 주부의 하루가 그려진다. 그는 혼자 일하는 것 같지만 부엌, 거실 그리고 그가 가는 모든 장소에는 작은 모니터 속의 눈이 언제나 감시하듯 쳐다보고 있다. 빽빽한 살림살이에 둘러싸인 주부의 눈은 공허하고 무기력하다. 실험다큐멘터리 <주부들의 하루>(Housewives and a Day, 1979)에는 여러 주부들이 손과 목소리만으로 출연한다. 집과 동네의 평면도가 화면을 가득 메우고, 그들은 자석을 움직여 하루 동안의 자신의 동선을 묘사한다. 그들의 움직임은 온전히 가족 구성원들을 위한 가사 노동에 바쳐진다.
<잔느 딜망> 스틸컷
여성 공간과 시간의 이중적 거리감
샹탈 아커만의 1975년 영화 <잔느 딜망>(Jeanne Dielman, 23 Quay du Commerce, 1080 Bruxelles)은 아커만의 대표작이자 가장 널리 알려진 페미니스트 영화일 것이다. 관객은 영화가 시작되면 부엌에서 쉴 새 없이 움직이며 일하는 여성, 잔느를 본다. 잔느는 감자를 삶아 숲을 만들고 고기와 채소를 조리한다. 감자가 삶아지는 동안 욕실을 청소하고 테이블을 세팅한다. 아들이 학교에서 돌아오면 코트를 받아 챙기고 저녁 식사를 한다. 식사를 한 후에는 신문을 읽고 뜨개질을 하다가 시간이 되면 아들과 함께 쓰레기를 버리러 갔다 온다. 잠자리를 세팅하고 잘 준비를 하면 ‘첫 날 끝’이라는 인터타이틀이 뜬다. 다음 날이 되면 일어나 잠자리를 정리하고 아들의 등굣길을 챙긴 뒤 아침 식사를 준비한다. 아들이 학교에 가면 구두와 코트 수선 맡기기, 장보기 등 집 밖에서 해야 하는 일들을 처리한다. 잔느는 가사 노동을 하는 사이에 돈 버는 일도 하는데, 집에서 하루에 한 명씩 손님을 받아 성매매를 하고 이웃의 아기를 맡아 돌본다. 세 번째 날, 손님과 섹스가 끝난 후 잔느는 그를 가위로 찔러 죽인다.
앞서 언급한 영화들이 여성과 부엌이라는 ‘공간’의 불화에 집중했다면-그래서 드러나는 정치적 효과가 부엌이라는 공간의 부자연스러움, 부엌이라는 공간의 물질성이라면-<잔느 딜망>이 더불어 포착하고 있는 것은 부엌에서의 ‘시간’의 물질성이다. 이 영화는 하루를 한 시간 남짓으로 담고 총 3일에 걸쳐 일어난 일을 포착하고 있다. 하루가 한 시간이므로 영화 전체가 리얼 타임으로 이뤄지는 것은 아니지만, 종종 스크린 속에서 흘러가는 시간이 실제 시간과 같은 속도로 흘러가는 것처럼 느껴지는 이유는 보통의 영화에서는 생략되어 나오지 않거나 축약되는 동작이 그대로 보여지기 때문이다.
샤워를 한 후 스펀지에 세제를 묻혀 욕조를 청소하는 것, 음식을 냄비에서 접시로 옮기는 것, 신문을 펴고 접는 동작, 난로에 불을 붙이고 끄는 동작, 이동식 가구를 접고 펴고 정리하여 잠자리를 만드는 동작을 관객은 리얼 타임의 연속으로 본다. 카메라가 공간과 시간의 물질성을 포착하는 것은 아방가르드 영화 혹은 모더니스트 미학의 중요한 요소이다. 우리가 접하는 내러티브 중심의 상업 영화들은 공간과 시간을 매끈한 것으로, 영화를 보는 관객들이 공간과 시간의 물질성을 느끼지 않고 (현실의 공간과 시간과는 달리 영화의 내러티브를 위해 조직된) 스크린 안의 세계를 마치 진짜처럼 느끼게 만드는 데 최선을 다한다면, 모더니스트 영화 미학의 실천은 영화가 가진 가능성을 할리우드의 미학과는 반대로, 즉 현실을 잊게 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 세계의 물질성을 포착하는 반(反)미학을 자신의 미학으로 삼는다.
<잔느 딜망>이 영화사에서 차지하는 위치는 이러한 모더니스트 미학과 연관된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포착한 시간의 물질성이 무엇보다 도드라지게 드러내는 것은 여성 노동이다. 부엌과 가정 공간 그리고 성매매와 살인은 많은 영화에서 무수한 드라마를 만들지만, 그 드라마들에서 상세하게 묘사된 갈등에 생략돼있는 것은 여성 노동이다. <잔느 딜망>은 부엌과 식탁, 욕실, 침실의 공간과 시간을 영화로 가져오면서 그 공간을 지탱·구성하고 있는 여성 노동을 실체화한다. 이 영화의 공간과 시간은 여성의 공간과 시간이며 그 안을 채우는 것은 여성의 움직임과 노동이다. 따라서 이 영화의 시간과 공간성에 관한 논의들은 모더니스트 미학을 넘어서는 논의를 요한다.
이 영화의 여성 노동의 시간과 공간의 문제는 관객과의 거리의 문제에 있어서도 모더니스트 미학의 문제를 넘어선다. 이 영화에서 포착한 가정 공간과 그 공간에서의 시간의 물질성이 가지는 관객과의 거리는 모더니스트 미학이 목표하는 비판적 거리성과는 미묘하게 다르다. 관객은, 특히 가사 노동의 체험을 갖고 있는 여성 관객은 끊임없이 잔느를 부엌에서 움직이게 하는 성별 노동에 대해 비판적인 각성을 하게 되기도 하지만, 그와 동시에 오차 없이 정확하고 깔끔하게 움직이는 잔느의 동작에 쾌감과 매혹을 느끼기도 한다. 카메라는 고정돼있지만 잔느의 정확하고 매끄러운 동작들은 리듬을 만들어내고 관객을 참여시킨다. 영화학자 사이토 아야코는 이것을 (브레히트식의 고전적인) 비판적 거리두기에 도전하는 정서적 거리두기라고 부른다. 대상에 정서를 분리시키지 않은 채 대상의 공간과 시간을 존중하는, 그리고 참여하는 거리두기 방식이라는 뜻으로 관객은 비판적인 의식을 가지면서도 대상과 냉철하게 분리되지 않는다.
<잔느 딜망> 스틸컷
여성의 공간과 시간에 대한 비판과 동시에 정서적 공감은 어떻게 해소되는가. 이 분열이 필연적으로 충격적으로 보이는 결말로 이르게 했는지도 모른다. 잔느의 시간과 공간은 엄격하게 가족을 위한 희생과 가사 노동에 저당 잡혀 있지만 동시에 그것을 정확하게 통제하는 데 쾌감을 느낀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그것이 미묘하게 어긋나면서부터 영화에 긴장이 쌓이게 된다. 그 어긋남의 시작이 언제부터였는지 관객에게는 정확히 전달되지 않는다. 구두 수선이 생각보다 시간이 걸린다는 것을 알게 된 이후부터였는지, 이웃이 아이를 맡기러 와 길게 하소연을 늘어놓으며 잔느의 시간을 잡아먹는 순간부터였는지, 혹은 두 번째 손님과 방에 들어간 후 부쩍 헝클어진 머리로 나온 후부터였는지.
관객은 반복된 리듬 속에 조금씩 흐트러져 가는 잔느를 발견하게 된다. 가사 노동에 자신의 시간이 통제되지만, 거꾸로 그 시간을 통제하면서 삶의 의미를 만들어간(다고 믿었던) 잔느는 그 흐트러짐을 참을 수 없어서 손님으로 온 남자를 살해한다. 그리고 더 이상 다시 이전의 시간으로 돌아갈 수 없다. 논란이 되기도 한 잔느의 마지막 섹스에서의 오르가즘은 남성과의 섹스에서 느낀 오르가즘이 아니라 이 분열증적인 시간과의 작별에 대한 결단으로부터의 오르가즘이 아니었을까. 여성의 시간, 공간, 몸짓, 노동…. ‘여성’적인 것들의 페미니즘적 묘사에는 언제나 분열증적인 거리감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 가부장제의 소산인 그것들을 차갑고 비판적인 거리에서 묘사하기에 그 ‘여성’적인 것들은 이미 나 자신의 너무나 큰 일부분이다. <잔느 딜망>은 이 이중적이고 분열증적인 거리감을 영화의 공간과 시간으로 포착하고 있으며, 이 영화의 결말은 분열증에 대한 1970년대 페미니즘의 답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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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이론과 강사, 2011~2014 서울국제여성영화제 프로그래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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