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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설이지 말고, 페미니즘 돋보기
‘모르고 싶은’ 노력의 자작
‘공지영’의 『82년생 김지영』
송아름|영화평론가 / 2020-01-03
<82년생 김지영> 스틸컷
무시하고 싶지만 톡톡 불거져 나와 귀찮게 하는 것들이 있다. 잘 모르지만 몰라서는 안 될 것 같은 일들이 불쑥불쑥 비집고 나선다. 외면하고 싶지만 자칫 치졸해 보일까 혹은 시류에 뒤떨어진 이로 보일까 등 돌리기도 쉽지 않다. 이때 취할 수 있는 가장 고상한 태도는 무엇일까. 가장 먼저 떠올릴 수 있는 것은 내가 잘 알고는 있지만 별로 관심이 없어서, 혹은 나와 맞지 않아 관심을 두지 않는 것뿐이라는 쿨한 태도다. 숨기는 방법으로 선택된 이 태도 자체를 쿨하다고 볼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겉으로는 내가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는, 또 모르는 것이 아니라는 포즈를 취하며 귀찮은 것들로부터 거리를 둘 수 있다. 물론, 얼토당토않는 소리를 하지 않는다는 조건 하에서.
영화 <82년생 김지영>(김도영, 2019)이 개봉하고 곳곳에서 많은 공감의 목소리들이 들려왔다. 특히 힘들어하는 지영(정유미)을 쓰다듬으며 “옥 같은 내 새끼, 금쪽같은 내 새끼”를 눈물 속에 읊조리던 엄마 미숙(김미경)의 모습은 ‘맘충’이라고 그래서 편하게 살 거라고 손가락질받던 이가 누군가에겐 가슴 아플 만큼 전부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면서 수많은 생각들을 가로지르게 했다.
엄마와 딸이 함께 보며 다양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 했던 <82년생 김지영>은 서로의 불안을, 과거를 그리고 앞으로를 적어도 한 번쯤은 돌아볼 수 있도록 만들었다. 쉽게 이야기하지 못했을 언젠가를 꺼내 보듬게 했던 <82년생 김지영>은 조금씩 조금씩 관객수와 이야기를 늘려갔다. 영화는 분명 소설보다도, 현실보다도 꿈같은 응원으로 마무리됐지만 지영이 누렸으면 싶은 미래를 선사하는 것으로 잔잔한 안도감을 주었다.
<82년생 김지영> 스틸컷
이렇게 <82년생 김지영>이 2019년도에 손익분기점을 넘긴 몇 안 되는 영화에 꼽힐 만큼 흥행하면서 소설로 유명세를 치렀던 ‘김지영들’의 삶은 다시 한 번 부각됐다. 소설을 넘어 영화를 통해 좀 더 넓은 감정의 반경을 차지하게 된 <82년생 김지영>의 장면들은 공감이든 반감이든 쉽게 무시할 수 없는 담론의 장을 마련했는데, 문제는 바로 여기에서 발생했다. <82년생 김지영>은 그저 소설 혹은 영화 한 편이 아닌 지영이 빙의라 불릴 이상 증세를 겪는 것에 대해, 엄마들이 자조 섞인 웃음 속에서 자신의 전공을 설명하는 것에 대해, 일을 다시 시작하기 위해 마음 졸여야 하는 엄마들에 대해, 그러니까 결혼한 여성들이 겪을 수밖에 없는 수많은 한계들에 대해 어떤 식으로든 태도를 취해야 할 이야기의 문을 열었던 것이다. 이는 굳이 ‘논란’이라는 단어로 설명할 필요 없는, 누군가의 삶을 분투로 만든 시스템을 생각하자는 것뿐이었지만 그리 쉽게 대화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이즈음 들려온 재미있는 이야기는 <82년생 김지영>과 공지영 작가의 뜬금없는 연결이었다. 누군가 <82년생 김지영>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을 때 ‘공지영 소설을 볼 필요 있겠느냐’며 그 순간을 넘기려 했다거나 작품을 폄하하는 듯 이야기했다는 식의 에피소드가 나열되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처음 이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너무도 ‘얼토당토않는 소리’이기에 웃어넘겼다. 사실 믿지 않았다는 말이 맞다. 버젓이 책에 적혀 있는, 아니 책을 보지 않았다 해도 꽤 오랜 기간 매일 오르내리던 기사 하나만 살펴봤어도 알 수 있는 작가의 이름을, 단 한 글자도 겹치지 않는 두 사람(조남주와 공지영)의 이름을 헷갈릴 리 만무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다 문득 이 대답들이 몰라서라기보다 모르고 싶었기에 튀어나온 것이었다면 ‘공지영’ 소설 『82년생 김지영』이라는 얼토당토않는 연결고리를 찾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생각에 가 닿았다.
<82년생 김지영> 스틸컷
『82년생 김지영』(조남주, 민음사, 2016)이 공지영 작가의 소설이라고 생각하는 것 그리고 그렇기에 읽지 않겠다고 이야기하는 것에는 수많은 함의가 있다. 먼저 ‘여성적’ 관점을 가지고 ‘잘 팔리는’ 소설을 쓰는 여성 작가로 공지영 이상을 떠올릴 수 없다는 것이 출발선에 놓인다. 물론 수많은 여성 작가들이 활동하고 있는 현재라는 점을 들어 공지영 이후로 업데이트되지 않은(될 생각이 없는) 것에 대해 왈가왈부할 필요는 없다. 문제는 그렇기에 보지 않는다는, 혹은 볼 필요 없다는 선을 긋는 데 있다. 여기에는 공지영 작가의 여태까지 행보에 대한 단적인 평가들을 바탕으로 <82년생 김지영>은 공지영의 행보에서 일어났던 여러 논란들처럼 역시나 이렇게 문제를 만드는 작품이라는 점이, 이렇게까지 정치적인 행보를 보이는 여성 작가의 작품은 읽을 필요가 없다는 점이 포함되기 때문이다.
<82년생 김지영>에 대해 특별히 말하고 싶지 않은 것은 내가 그것에 관심이 없어서라거나 몰라서라기보다 혹은 내가 ‘그런’ 문제에 보수적이어서라기보다, 나와는 정치적으로 다른 노선을 걷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작가의 작품에 굳이 이야기를 보태고 싶지 않다는 포즈를 취하기 위해 ‘베스트셀러’ ‘여성’ 작가 공지영은 매우 좋은 알리바이였다. 『82년생 김지영』의 작가가 공지영이라는 것을 의심도 없이 내뱉었던 것에는 바로 이 포즈를 위한 의식들이 자리하는 것이다.
특별히 이에 토를 달지 않는다면 아마도 그 후에는 공지영 작가를 시작으로 여타의 여성 정치인의 이야기로 옮겨가거나 공지영의 행보에 대한 평가들로 이어지면서 사소한 일들로 분란을 조장한다는 식의 혐오 어린 말들이 나열되었을 것이다. 마치 그들이 대의(大義)를 알지 못해, 지금의 바로 이 대화의 껄끄러움처럼, 잘 살아가던 우리에게 파문을 일으키고 있다는 식으로 말이다. 다행히도 이 대화는 『82년생 김지영』의 작가는 조.남.주.입니다. 라는 한 마디로 종료시킬 수 있겠지만, 사실 이 같은 무한 루프의 프레임은 그리 낯선 것이 아니다.
<82년생 김지영> 스틸컷
결국 ‘공지영’의 『82년생 김지영』은 ‘82년생 김지영’들로 인해 만들어지는 수많은 이야기들에 끼고 싶지는 않지만 이를 쉽게 무시할 수 없다는 것을 아는 이들이 핑계를 쌓아 만들어낸 상상 속의 작품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상상은 마치 소설의 작가를 새로 만들어냈던 것처럼, 실제 소설과 영화에서 이야기하는 것 이상으로 비약되어 있을 확률이 크다. 이 ‘불편한’ 상황을 바라지 않는 이들에게 ‘김지영들’의 목소리는 날카롭고 강압적으로 모든 것을 뒤엎겠다는 식의 구호로 들릴 가능성이 큰 것이다.
그러나 앞서 이야기했듯이 소설도 영화도 현실과 더 없이 가까워지진 못한다. 영화 <82년생 김지영>의 관객들은 모든 가족들의 응원을 등에 업은 지영의 미래가 바라 마지않지만 비현실적이라는 것을 알기에 마냥 행복하게 보지 못하면서도 결말에 안도했다. 소설 『82년생 김지영』의 독자들은 미혼 여성 간호사를 뽑아야겠다는 남자 의사의 결심이 너무도 화나지만 그것이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라는 것을 가슴 아리게 받아들이도록 만든다. 이 모든 것을 이해하고, 감내하고, 겪어냈던 이들이 왜 행복도 불행도 내 의지와 상관없느냐 묻기 시작했다는 것이 도대체 얼마나 위협적일 수 있다는 것일까.
<82년생 김지영> 스틸컷
‘공지영’의 『82년생 김지영』을 만든 이들은 소설과 영화를 그렇게 대했던 것처럼, 보지 않고 고민하지 않고 쉽게 무엇에 대해 알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소설 『82년생 김지영』이 처음 나왔을 때 따라붙었던 바로 그 말들, 그러니까 우리 어머니 세대인 60년대 생들의 고생은 이해할 수 있지만 80년대 생들의 차별은 이해할 수 없다는 말은 정확히 이 경로를 관통한다. 나와 동시대를 살아온 이들이 나 이상으로 힘들었을 리 없다는 전제는 분명히 드리워진 무수한 유리천장을 모르고 싶을 때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것은 바로 이러한 논리, 즉 전 세대의 여성들을 이해하지만 동시대 여성들의 삶은 편안하다는 식의 논리는 어느 세대에서나 통용된다는 점이다. 60년대의 여성들은 역시 40년대 생의 어머니는 이해하지만 동시대 여성의 고생은 이해하지 못하는 남성들과 함께 살아간다. 20년이 지나서야 부담의 불균형을, 그것도 당대에 비해 힘들었기에 이해받을 수 있는 이들의 삶을 현재에는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 것일까. 이 모든 것을 차라리 모르겠다고 이야기하는 이들과는 조곤조곤 이야기해볼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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