ZOOM IN

망설이지 말고, 페미니즘 돋보기

전위적 여성 육체의 움직임

마야 데렌의 환영 세계

정지혜|영화평론가 / 2019-12-16


< ZOOM IN >에서는 여성 영화, 감독, 배우, 캐릭터 등을 퍼줌만의 새로운 시각으로 들여다보고 다양한 관점에서 이야기해보고자 합니다. 여러분들도 망설이지 말고, 페미니즘 돋보기! 

<오후의 올가미> 포스터 ©다음

여성의 육체는 어떻게 역사와 예술의 치열한 쟁투의 장이 되어왔던가. 때로는 한 개인의 가장 내밀하고 즉각적인 감정과 쾌락의 물리적 공간으로서, 때로는 치열한 이데올로기의 방편이자 정치 사회적 논쟁의 지점으로서 여성의 몸은 끊임없이 투쟁해왔고 기억과 재기억의 과정을 거치며 구성돼왔다.

“‘몸’은 이미지의 현현이다. 기호와 반기호의 병존을 사상적으로 응집하는 20세기의 증후”(『미래 예술』, 서현석·김성희, 작업실유령, 2016, 228쪽)이다. 그 가운데서도 여성의 몸은 역사의 재현과 재현의 역사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여성 육체를 둘러싼 성정치, 정치철학, 수행성 미학은 더 많이 이야기돼야 하고 탐험하고 싶고 탐하게 하는 미지의 세계인 동시에 실재하고 당면한 현실 세계다. 육체의 움직임이 불러일으키는 변화는 그 누구의 문제도 아닌 이 순간에도 숨 쉬고 움직이며 감각하는 나 자신을 둘러싼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 필수 불가결한 생의 조건, 타자로 확장 가능한 문이 돼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육체의 움직임을 통한 감정의 정치, 정치 동학을 영화의 세계로 끌어와 보자. 예상할 수 있듯 여성의 움직임, 움직이는 여성, 여성의 육체를 다루는 영화의 방식, 영화적 선택에 관해서 말해볼 수 있을 것이다. 혹은 이런 것도 가능할 것이다. 육체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가장 직접적으로 자기화해 표현하는 배우(퍼포먼스를 수행하는 퍼포머도 일종의 배우라고 말할 수 있다)를 주목하는 작업이다. 배우는 어떻게 자신의 신체를, 얼굴 근육을, 목소리의 상태를 만들고 활용하는가. 한 명의 예술가이자 감정 노동자인 배우, 그 가운데서도 여성 배우의 육체성은 역사적으로도 중요한 쟁점을 제기해왔다.


또한 ‘댄스 필름’이라 불리는 장르 혼종으로 시선을 돌려볼 수도 있겠다. 발생하는 동시에 소멸하는 신체의 움직임이 갖는 특성, 금세 휘발되고 마는 무대 공연의 일회성을 어떻게든 기록으로 남겨두고자 하는 예술가의 열망이 영상 매체로 눈을 돌려 신체의 움직임을 기록하게 했을 것이다. 실사 기록이라는 의미에 충실한 다큐멘터리 필름으로서의 댄스 필름은 장르와 매체의 혼종을 거듭하며 움직임이 발생하는 공간과 육체의 관계성에 천착해간다. “‘무용’이 발생하는 것은, 하나의 정지된 동작이 아니라, 하나의 동작에서 다른 동작으로 전환하는 중간 과정, 즉 형태의 간극에서다”(같은 책, 172쪽)라고 한다면 그것을 찍는 영화는 그 형태의 간극을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 어떻게 보여줄 때 좀 더 극명한 시간의 격차를 우리 앞에 가시화할 것인가를 묻게 될 것이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나는 마야 데렌의 영화 세계를 들여다 보고자 한다. “할리우드가 배우의 립스틱에 들이는 비용으로 나는 영화를 만들겠다.” 마야 데렌의 이 말은 기존의 할리우드 시스템, 그중에서도 여성 배우를 활용하는 방식을 향한 비판이며 자신만의 영화 공정과 세계를 만들겠다는 당당한 선언에 가깝다.

마야 데렌은 20세기 초반 미국 아방가르드 영화, 저예산 실험 영화계에 등장한 전위적이고 대체 불가능한 시네아스트(cineaste·영화예술인)다. 안무가이자 무용수, 영화감독이자 배우인 마야 데렌은 영화 매체의 특성을 활용하며 육체의 리듬감 넘치는 움직임을 영화의 리듬으로 옮기는 실험을 이어간다. 그의 영화는 대사를 바탕으로 서사를 쌓거나 줄거리 요약이 가능한 방식과는 전혀 다른 전략을 취한다. 대신 그는 이미지의 인위적인 단절과 이어붙임, 쇼트의 충돌에서 비롯된 기이한 시간계로 우리를 이끈다. 그의 세계에서 시간은 종종 지연되고 연장되며 단절된다. 공간 역시도 거침없이 뒤바뀐다. 마야 데렌의 영화를 댄스 필름의 효시 혹은 ‘무용적인 것’의 영화화라고 말한다면 바로 이 지점에서 발생하는 움직임의 괴이한 단절과 이어짐, 그로 인한 영화의 리듬 때문일 것이다.


마야 데렌을 포함해 그의 영화에 전면적으로 등장하는 여성들의 움직임을 주목하자. 그들의 포즈, 제스처, 움직임 또한 영화의 리듬감에 복무한다. 게다가 이들 여성의 몸짓과 움직임은 우리에게 불안의 정조를 불러일으키고 자극한다. 명확하게 말로 설명되지는 않지만, 감각적으로 다가오는 시적 추상 이미지, 악몽 같은 몽환 세계로의 이동, 속임수를 쓴 듯하지만 눈 앞에서 버젓이 일어나버려 믿을 수밖에 없는 마술. 그 모든 게 마야 데렌의 영화에 있다. 그리고 이 모든 게 맞붙자 괴상한 리듬감이 발생한다. 이때 영화 속 여성들은 마야 데렌이 만든 이상한 세계에 빠져 길을 잃은 듯 보이는데 특이하게도 그들은 감정이 제거된 채 그저 부유하는 듯도 하고 몽유 속에서 도망과 추격과 놀이와 춤추기를 반복하는 듯도 하다. 보고 있으면 상당히 으스스하기까지 한 것이다.

그의 첫 번째 영화 <오후의 올가미>(1943, 영화의 촬영감독인 알렉산더 해미드와 공동연출을 했다)는 여성 주체의 자기 분열과 에로틱한 자기애적 욕망, 남성을 향한 불안과 불신의 정서, 여성의 자기 파괴적 결단 등이 응축돼있는 수작이다. 그는 이 영화로 1947년 칸국제영화제에서 16mm 필름 실험 영화 부문에서 대상을 받았다. 칸국제영화제가 이 부문에서 미국인을, 그것도 여성 영화인을 수상자로 지목한 건 이때가 처음이다.

<오후의 올가미>는 몇 개의 주요 시퀀스가 반복 변주되며 원점으로 계속해 회귀하는 듯한 구조를 취한다. 영화에서 마야 데렌은 에로스와 타나토스적 욕망을 끌어안은 주인공으로 등장해 연기를, 퍼포먼스를, 움직임을 보여준다. 이 영화의 시간 역시 이상하게 왜곡돼 있다. 마야가 사자(死者) 혹은 사신(死神) 혹은 죽음 그 자체를 상징하는 듯한 검은 옷을 입은 존재를 뒤쫓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앞서 걸어가는 검은 옷의 존재를 따라잡기 위해 뒤에서 마야 데렌이 뛰어온다. 하지만 어찌 된 영문인지 그는 앞선 자를 따라잡을 수 없다. 하나의 시퀀스에서 그의 시간과 검은 옷을 입은 자의 시간은 전혀 다르게 흐른다. 쇼트의 단절과 이어붙임으로 영화는 둘 사이의 거리감을 만들고 시차를 발생시키며 단일한 시간을 흔들어버린다. 이로써 산 자와 죽음의 시간은 함께 있되 함께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른다. 현실의 속력은 <오후의 올가미>에서는 도통 힘을 쓰지 못하는 것이다.

한편 영화에 등장하는 남자(알렉산더 해미드)의 존재 역시 명징하게 설명되지는 않지만 우리는 충분히 정치적 맥락에서 그의 존재를 읽어볼 수 있다. 미로에 빠진 듯한 마야 데렌을 침대로 다정히 이끄는 그는 실은 마야의 두려움과 경계의 대상이자 종국에는 그가 일격을 가하게 되는 대상이다. 하지만 그의 과감한 공격 끝에도 살아남은 자는 남자이고 죽음으로 귀결되는 쪽은 여자다. 여성 내면에 소용돌이치는 불안과 공포는 해소나 탈주의 방식으로 처리되기보다는 닫힌 세계 안에서 자기 변이와 변주를 거듭하거나 환상에 기대어 잠깐의 일탈(예를 들면 바다 장면)을 시도하며 지속된다. 그럼으로써 이 그로테스크한 심리극이 불러일으킨 파격의 여진은 계속될 것이다.


<오후의 올가미> 스틸컷 ©다음

정연한 논리성의 원리를 벗어던지고 여성의 시선과 여성의 움직임에 따라 시간과 공간이 뒤바뀌는 경우라면 <뭍에서>(1944)도 함께 말해야 한다. 해변을 비롯해 영화 속 자연 풍광이 불러일으키는 분방한 물성, 그곳의 여성들이 뿜어내는 한가롭고 나른한 무드와 에너지는 남성적 세계로 상정할 수 있는 실내 풍경과 확연한 대비를 이룬다. 그 이중의 세계를 마야 데렌은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경계 없이 오가고 영화는 변칙적인 장면 붙이기로 그의 월담을 가능하게 한다.

한편 ‘무용적인 것’의 영화화라는 측면에서 이야깃거리를 더 많이 품고 있는 경우로는 <변형 시간의 의례>(1946)를 들 수 있다. 마야 데렌과 그의 분신처럼 보이는 여성들. 누군가 하나의 동작을 시작하면 이어서 다른 여성이 그 동작을 전달받는 것처럼 보인다. 동작과 행동의 전이다. 다수의 사람이 춤을 추는 파티 장면은 또 어떠한가. 그들은 몇 가지 동작을 반복하며 춤의 시간을 이어가지만, 영화는 중간중간 멈추는 효과를 넣어 리듬을 끊어버리고 화면은 정지돼 사람들의 표정과 움직임은 일순간 박제된다. 멈췄던 영화가 다시 흐르면 사람들은 마법에서 깨어난 듯,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하던 동작을 이어간다. 마치 태엽 인형의 움직임과 멈춤처럼 그렇게.

후반부의 야외 장면에서는 <오후의 올가미>와 같은 변칙적인 시간 활용도 엿보인다. 여성은 도망치고 남성은 도약과 추적을 거듭하며 여성을 뒤쫓는다. 전속력으로 뛰는 여성은 고속 화면으로 느릿느릿 우아하게 뒤쫓는 남성을 따돌리지 못할 것만 같다. 여성과 남성의 처지, 그들 각각의 속도와 움직임의 방법이 판이한데 성정치적 맥락에서 이 차이를 해석해보는 건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이처럼 마야 데렌의 세계에서 시간과 공간 개념은 베일에 싸여 있는 듯하다. 그 대신 마야의 세계에서 우리는 여성들의 활동과 행위, 그들의 리드미컬한 육체 운동과 흐르다 멈추길 반복하는 몽유 상태의 영화, 영화를 통한 거침없는 변형을 본다. 그것은 1940년대 스스로 ‘환영’(maya)이라는 의미의 ‘마야’라는 이름을 붙이고 활동을 시작한 마야 데렌이 만들고자 했던 전위적인 꿈의 현현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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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디다큐페스티발 집행위원, 영화웹진 리버스 필진, 2018 부산국제영화제 한국단편 예심 진행, 공저 『아가씨 아카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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