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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수정, 여기 이곳에서 살아가기
손시내|영화평론가 / 2019-12-26
<당신의 부탁> 스틸컷 ©다음
슬픔과 외로움을 꿋꿋하게 버티는 소녀, 자신이 처한 상황을 견뎌내기 위해 자신만의 세상을 만든 약하지만 씩씩한 어린 여성, 어느 날 마주한 행복과 불행을 온 힘을 다해 감당하는 조용하고 병약한 이, 때론 호감을 얻을 수 없는 방법으로 세상에 소리치는 여자, 시대를 오가며 다양한 역할을 변주하거나 걷잡을 수 없이 커지는 사태 앞에 선 인물에서부터 체념 속에서 관계 맺기와 책임의 질문을 길어내는 사람에 이르기까지. 2001년 TV 드라마 <학교4> 와 2002년 영화 <피아노 치는 대통령>(전만배)으로 연기 경력을 시작한 이래 꾸준히 작품 활동을 이어오고 있는 배우 임수정을 통해 우리가 만난 캐릭터들의 면면이다.
짧지 않은 시간 동안 그에게 투영됐던 이미지도 배우 개인의 삶도 적지 않은 변화를 겪었겠지만, 임수정이 우리에게 소개한 인물들을 돌아보며 벽이 될지 문이 될지 모를 세계를 맞닥뜨린 여성들, 그리고 그럴 때 여러 가지 방법과 특유의 고집스러움과 크고 작은 의지를 통해 ‘살아가기’를 택하는 여성들의 초상을 살펴보는 일이 결코 무용하진 않을 것 같다. 그건 2000년대 이후 한국이라는 특정한 시간적·공간적 배경에서 등장한, 어떤 전형성 속의 특별함을 생각해보는 계기도 될 것이다.
<장화, 홍련> 스틸컷 ©다음
임수정이 활동을 시작한 2000년대 초중반의 인상적인 캐릭터인 <장화, 홍련>(김지운, 2003)의 수미와 <싸이보그지만 괜찮아>(박찬욱, 2006)의 영군으로부터 시작해볼 수 있겠다. 장르적인 화법으로 수미와 영군의 이야기를 풀어가는 두 영화에는 재미있게도 공통으로 인물이 만들어내고 믿고 있는 어떤 세계가 중요하게 등장한다.
<장화, 홍련>의 두 자매 수미와 수연(문근영)은 엄마가 죽은 뒤 그들이 머물던 요양원에서 다시 시골집으로 돌아와 있는 상태다. 인적이 드물고 아름답지만 어딘가 처연한 풍경, 적막한 집에서 두 자매를 기다리고 있다가 반기는 건 아빠 무현(김갑수)과 재혼한 새엄마 은주(염정아)다. 새엄마에 대한 반감과 외로움 속에 두 자매는 시골집에서의 생활을 이어가고, 집에서는 이상한 일들이 자꾸 일어난다. 수미가 보기엔 아무래도 은주에게 문제가 있는 것 같다. 따지듯이 대들고 제 분을 못 이겨 울분을 터뜨리는 모습, 어떻게든 사랑하는 동생을 지키려는 그 고투가 수미의 세계를 만들어간다. 그건 세상이 허락한 연약한 소녀의 모습에서 벗어난 고집스럽고 집착적인 얼굴이기도 하다.
후에 밝혀지듯, 집에서 일어나는 온갖 이상한 일들은 다름 아닌 상실을 감당하기 위한 수미만의 방법이었다. 사랑하는 존재들을 잃고 홀로 남겨진 세상에서, 그 슬픔과 진실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이가 스스로 만들어낸 세계 속에서 싸우는 이야기를 우리는 본 것이다. <장화, 홍련>은 스스로도 어쩔 줄 모르는 분노와 고통, 짧은 순간에 스치는 생의 의지와 체념의 표정으로 수미를, 작은 체구와 맑은 얼굴의 배우 임수정을 기억하게 하는 영화였다.
<싸이보그지만 괜찮아> 스틸컷 ©다음
물론 수미의 세계엔 진실이 깃들어있다. 수미 가족과 은주가 맺고 있는 관계나 수미 혼자서는 알기 어려웠던 사실들 또한 수미의 세계를 구성하고 있다. 그건 수미가 신경 정신과적 진단을 받아 병원에 가더라도 남아있는 진실일 텐데, <싸이보그지만 괜찮아>의 배경이 되는 ‘신세계 정신병원’은 그런 식의 접근이 극대화된 공간인 것 같다. 각자의 문제를 품고 각자의 세상에서 사는 독특한 이들이 모여 있는 이 병원에 어느 날 영군이 들어오게 되는데, 그는 자신이 사이보그라고 굳게 믿고 있다. 영화 또한 영군의 세계에 함께 몰두하며 손가락 끝에서 총알이 나오고 하늘을 날기도 하는 상상을 맘껏 형상화한다. 깡마른 몸에 탈색된 눈썹, 제멋대로 부스스한 머리 스타일을 고수하며 틀니를 끼고 사물들과 대화하는 이 기묘한 캐릭터의 과거엔 자신을 쥐라고 굳게 믿었던 할머니와의 이해할 수 없는 이별이 있었다.
사람들이 영군의 세상을 이상하게 보는 것만큼이나 영군에겐 영문도 모른 채 살아가야 할 세상 또한 너무나 이상한 곳이다. 그렇게 자신만의 방법으로 세상을 사는 영군은 자신을 사이보그라고 믿기에 밥 대신 전기 에너지를 섭취하려 하고 몸은 점점 야위어간다. 타인의 능력을 훔칠 수 있다고 믿는 일순(정지훈)이 영군을 위해 방법을 모색해가면서 이 판타지적 세계에 다정하고 사랑스러운 활력이 불어넣어진다. 그럼에도 이 이야기가 동정심이나 사랑에 의한 구원의 이야기로만 수렴되지 않는 건 영군의 치열하고 거침없는 모습 때문일 것이다. 순간순간 표정과 목소리를 바꾸고 슬픔과 희열을 최선을 다해 표현하는 영군의 모습을 볼 때, 사람들에겐 각자의 전장이 있고, 살아간다는 것은 그 안에서 남들이 모르는 싸움을 지속하는 거라는 말을 있는 그대로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다.
<각설탕> 스틸컷 ©다음
비슷한 시기에 나온 다른 두 영화 <...ing>(이언희, 2003)와 <각설탕>(이환경, 2006)은 보다 현실적인 드라마의 화법 속에서, 그처럼 자신 앞의 세상을 쏘아보고 흔들리면서도 단단하게 살아가는 인물을 연기하는 임수정의 모습을 담고 있다. <...ing>의 민아는 오래 앓아온 병으로 인해 가까이 다가온 죽음의 그늘과 함께 사는 고등학생이지만, 영화에 내내 새겨지는 건 끝을 앞둔 슬픔보다는 삶 속에 이어져 온 습관과 막 시작되는 사랑이 만들어내는 호흡 그리고 그것을 가만히 실어내는 민아의 얼굴이다.
<각설탕>의 시은은 어린 시절부터 말을 좋아했고 커서도 아버지의 기대와 달리 기수가 된 인물인데, 그렇게 그가 마주한 세상은 생각만큼 호락호락하지는 않다. 매정하고 거친 세상을 시은은 쓰러지고 넘어지며 맞선다. 물론 작고 약해 보이지만 끝내 지지 않으려 분투하는 여성은 어느 정도는 전형적으로 형상화된 인물이기도 할 것이다. 지금까지 나열한 캐릭터들을 무리하게 특정한 모습으로 묶으려는 것도 아니다. 다만 그런 인물들을 영화가 다소 뻔하게 다루려고 할 때조차, 그들이 단지 귀엽고 애틋하고 씩씩한 캐릭터로 보이기만 하지는 않았다는 점을 상기하고 싶다. 때로 그보다 더 매섭고 고독하고 괴이한 기운을 발산하는 순간들, 그래서 그저 가만히 있을 때에도 지속되는 활동으로서의 삶을 표현하는 임수정의 순간들을 거듭 떠올리게 된다.
<행복> 스틸컷 ©다음
<행복>(허진호, 2007)의 은희는 언뜻 그러한 이미지와는 좀 떨어져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인물이다. 영화는 온통 술과 여자들로 채워졌던 서울에서의 삶이 흔들리고 간경변을 진단받은 영수(황정민)가 시골에 있는 요양원 ‘희망의 집’으로 향하면서 시작한다. 이곳에는 길고 오랜 시간을 요양원의 일원으로 지내온 폐 질환을 앓고 있는 은희가 있다. 숨이 차면 생명에 치명적인 위협이 될 수 있기에 은희의 생활은 차분하고 조용하며 느리다. 천천히 걷고 오랫동안 밥을 먹는 은희의 삶에 문득 들어온 영수는 그런 은희의 리듬에 맞춰 걷기 시작하고, 둘 사이의 감정도 점차 커져간다.
그들은 단지 함께 걷고 함께 밥을 먹는 것을 넘어 함께 살기 시작하는데, 이 무렵 영수의 건강이 호전되고 서울에서 친구 동준(류승수)과 옛 애인 수연(공효진)이 찾아온다. 거칠게 정리하자면 중후반까지 영화의 내용을 어느 날 은희에게 찾아왔던 영수가 어느 날 다시 떠나는 전개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서사적인 측면에서 삶의 큰 변화를 겪고 주로 움직이는 쪽은 영수이고, 그렇기에 은희는 어떤 면에서 그런 영수의 삶 한 축에 고정된 변치 않는 항이다. 그런데 은희가 마치 벽을 두드리고 문을 두드리듯, 영수를 두드리는 때가 있다. 은희가 먼저 관심을 보이고 같이 살자는 말을 먼저 문득 꺼낼 때, 아무 대답도 못 하고 얼버무리며 어색해하기만 하는 영수는 오히려 너무나 경직된 벽처럼 느껴진다. 여기 일렁이는, 조용하지만 역동적인 슬픔은 은희가 차분하고 고요히 자신의 속도를 유지하며 순간마다 자기 세계를 열심히 살아가려는 인물이라는 점 때문에 더 선명하다. (유사하게 서로 다른 시대의 고정된 항으로 역할 하는 <시간이탈자>(곽재용, 2015)의 윤정과 소은에게선 그런 힘이 잘 느껴지거나 표현되지는 않는 것 같다)
<내 아내의 모든 것> 스틸컷 ©다음
<내 아내의 모든 것>(민규동, 2012)의 정인과 <당신의 부탁>(이동은, 2017)의 효진은 많은 면에서 다르지만 한편으로 비슷한 인상을 남기기도 한다. 눈앞의 상황을 무시하거나 그냥 도망가지 않는 사람, 자신이 납득할 수 없는 방법으로 괜찮아지려고 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인상이다. 우연한 계기로 일본에서 사랑에 빠진 정인과 두현(이선균)은 어느새 7년 차 부부가 되어있고, 두현은 매사에 투덜대고 말 많은 정인이 지겹기만 하다. 두현이 전설의 카사노바 성기(류승룡)에게 아내를 유혹해달라고 부탁하면서 이들에겐 크고 작은 변화가 일어나고, 정인과 두현의 관계도 더는 이전과 같을 수 없게 바뀐다.
다양한 방법을 동원한 유혹의 작전이 유쾌함을 선사하지만, 정인의 삶을 가장 많이 바꾸는 건 새롭게 시작한 ‘일’이다. 라디오 게스트로 합류해 듣는 사람이 있는 말, 주고받을 수 있는 말을 하는 정인은 전에 없이 생기롭다. 그런데 그는 모든 것을 바꾼 채 훌쩍 떠나는 사람이 아니라 점진적으로 변화를 모색하는 사람이다. 혹은 그러한 생기로움을 ‘우리’ 안으로까지 가져와 보려는 사람이다. 정인이 계속해서 괜찮은 아내가 되어보려고 하는 것이나 두현과의 새로운 시작을 암시하는 마지막 장면은 타협적이라기보다 어떤 종류의 의연함을 보여주는 것 같다. 외로움과 짜증스러움 속에서 나를 살펴보고 세상을 살펴보고 당신을 살펴보는 별나고 고단한 수다쟁이는 바로 여기 이곳에서 다시 시작하려 한다.
<당신의 부탁> 스틸컷 ©다음
정인이 과잉된 에너지로 영화의 문을 열었다면, <당신의 부탁>의 효진은 그와는 정반대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매사 피곤하고 만사가 귀찮은 그는 거의 최소한의 힘으로만 움직이는 사람처럼 보인다. 그런 효진에게 갑자기 밀어닥친 죽은 남편의 아들인 16살 종욱(윤찬영)의 세상. 대책 없이 시작한 ‘함께’의 생활은 우여곡절 끝에 여전히 피곤하지만 가끔 서로 기댈 수 있는 그런 생활이 된다. 효진은 간격을 두고 곁에 선 종욱을 끝내 포기의 대상이나 이겨야 하는 대상으로 대하려 하지 않는다. 자주 멈칫거리며 고집스럽게 관계를 모색하고, 자신의 책임을 되물으며 방법을 찾아 나간다. 그 부단한 활동이 이들의 세계를 지속시키리란 예감을 준다. 자신이 부서지더라도 세상에 세차게 부딪히기를 주저하지 않는 인물부터 가족이란 이름을 벗어나지 않으면서 그 세계 자체를 확장시키고 질문을 새기는 인물까지. 임수정이 연기한 꽤 넓은 폭의 이들을 ‘살아있다’는 기이하고도 당연한 상태를 ‘살아간다’는 행위를 통해 이해하려는 여기, 저기의 여성들이라고 말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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