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영화를 읽다

[이미화의 영화처방] 삶의 공허함과 허기짐을 채우고 싶은 당신에게

<리틀 포레스트>

이미화|에세이 작가 / 2021-03-04


누군가 나의 기분을 이해해주기를 바란 적 있나요? 나와 꼭 닮은 영화 속 주인공에게 공감했던 적 없나요? 영화를 통해 당신의 마음을 헤아리고 또 위로와 공감의 말을 건네고자 합니다. 위안이 필요한 순간, 이미화 작가의 ‘영화처방’을 찾아주세요.
오늘의 고민사연 : 지난 시간들을 곱씹어보며 나에게 남은 것은 무엇일까? 생각하다가 수백 명이 넘는 카카오톡 친구 목록을 살펴보고, SNS를 둘러봐도 저에게 남은 것은 그닥 많지 않은 듯합니다. 한 손으로 꼽을 만큼 협소한 인간관계, 그뿐인 것 같아요. 그렇다면 나 자신에겐 무엇이 남았을까? 생각하니 늘 치열하게 살아왔는데도 그저 그런 직장인이 되었을 뿐인 것 같더라고요. 인간관계에도, 꿈에도 늘 최선을 다하며 살아왔던 것 같은데 정작 내 손에 쥔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 같은 기분.
이 공허함을 채울 영화가 있을까요?

〈리틀 포레스트〉 포스터

“난 혜원이가 금방 돌아올 거라는 느낌이 들어.”
“왜?”
“아주심기. 지금 혜원이는 아주심기를 준비하고 있는 걸지도 몰라.” 

작물을 심는 방법 중에 아주심기라는 게 있다고 해요. 가을에 씨를 뿌려둔 양파를 싹이 자랄 때까지 키워서 미리 거름을 준 밭에 옮겨 심는데, 이걸 아주심기라고 부른답니다. 더 이상 옮겨 심지 않고 완전하게 심는다는 의미이지요. 아주심기를 하고 난 다음에 뿌리가 자랄 때까지 보살펴주면, 겨울 서릿발에 뿌리가 말라 죽을 일도 없을뿐더러 겨울을 겪어낸 양파는 봄에 심은 양파보다 몇 배나 달고 단단해진대요. 

서울에서 아르바이트하며 임용고시를 준비하던 혜원(김태리)이 다시 고향에 내려온 건 허기짐 때문이었습니다. 연애도 하고 친구들도 있었지만 알 수 없는 허기짐을 인스턴트 음식으로 채우기엔 부족했지요. 인간관계에도, 꿈에도 최선을 다하며 살았지만 돌아보니 손에 쥔 것이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다는 걸 깨달은 혜원은 그 겨울, 고향으로 돌아옵니다. 

〈리틀 포레스트〉 스틸컷

영화 <리틀 포레스트>(임순례, 2018)는 뭐 하나 뜻대로 되지 않는 서울에서의 일상을 잠시 멈추고 고향으로 돌아온 혜원이 사계절을 보내면서 자신이 고향으로 돌아온 진짜 이유를 깨달아 가는 과정을 그려낸 영화입니다. 

“긴 겨울을 뚫고 봄의 작은 정령들이 올라오는 그때까지 있으면 해답을 찾을 수 있을까?” 

고향에는 아주심기를 끝낸 두 명의 친구 재하(류준열)와 은숙(진기주)이 혜원이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은행에서 일하는 은숙이는 여전히 방황하는 것 같지만 나름의 씩씩함으로 잘 견뎌내고 있었고, 스스로 인생을 결정하고 싶었던 재하는 일찍이 고향으로 내려와 포도 농사를 짓고 있었죠. 혜원은 그런 두 사람과 제철 요리를 만들어 먹거나 막걸리를 빚어 마시며 든든하게 속을 채워갑니다. 

〈리틀 포레스트〉 스틸컷

부끄럽지만 저는 끼니를 제때 잘 챙겨 먹지 못하는 어른입니다. 그래서 공연히 가족과 친구들의 걱정을 사곤 하는데요. 스트레스를 받거나 할 일이 있으면 식욕부터 떨어져 버리는 인간입니다. 그런 저라도 마음이 허할 때면 꼭 찾는 음식이 있어요. 엄마가 만들어준 미역국. 분명 같은 레시피인데도 제가 만들면 이상하게 맛이 다르더라고요.

엄마의 레시피를 곧잘 따라 하던 혜원에게도 그런 메뉴가 있습니다. 

“그래서, 뭐라고 써있디?”
“감자빵 만드는 법. 내가 제일 궁금해하던 거거든. 너 우리 엄마 감자빵 먹어봤지? 어릴 때 맨날 물어봐도 나중에 크면 가르쳐준다고 그랬거든. 가출해놓고 딸한테 기껏 쓴 편지가 어떻게 감자빵 만드는 법이지?”

〈리틀 포레스트〉 스틸컷

어쩌면 혜원의 공허함이 채워지지 않았던 이유는 혜원이 엄마 없이 성인 시기를 보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혜원의 엄마는 혜원의 수능이 끝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편지 한 장만 남겨둔 채 떠나버렸거든요. 엄마에게도 아주심기가 필요했던 걸까요? 아빠와의 결혼으로 포기했던 일들을 다시 시도해보고 싶다는 이유로 엄마는 혜원을, 고향을 떠나버립니다. 

‘우리 혜원이도 곧 대학생이 되어서 이곳을 떠나겠지? 이제 엄마도 이곳을 떠나서 아빠와의 결혼으로 포기했었던 일들을 시도해보고 싶어. 실패할 수도 있고 또 너무 늦은 거 아닌가 하는 불안감도 있지만 엄마는 이제 이 대문을 걸어 나가 나만의 시간을 만들어 갈 거야. 모든 것은 타이밍이라고 엄마가 늘 말했었지? 지금이 바로 그때인 것 같아. 아빠가 영영 떠난 후에도 엄마가 서울로 올라가지 않은 이유는 너를 이곳에 심고 뿌리내리게 하고 싶어서였어. 혜원이가 힘들 때마다 이곳의 흙냄새와 바람과 햇볕을 기억한다면 언제든 다시 털고 일어날 수 있을 거라는 걸 엄마는 믿어. 
지금 우리 두 사람, 잘 돌아오기 위한 긴 여행의 출발선에 서 있다고 생각하자.’

〈리틀 포레스트〉 스틸컷

몇 해가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는 엄마를 미워하고 그리워하던 혜원은 고향에서 사계절을 보내고 난 후에야 비로소 엄마의 편지를 이해하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만의 감자빵 레시피를 적어 엄마에게 보내지요. 

인간관계도, 사회생활도, 일도, 꿈도, 뒤돌아보니 공허함뿐이라는 ‘소다’님의 사연을 읽으며, ‘소다’님은 지금 아주심기를 위한 준비 중이라는 생각을 했어요. 비바람에도, 겨울 서릿발에도 끄떡없이 마음을 단단하고 완전하게 뿌리내릴 곳을 찾기 위해 잠시 흔들리고 방황하는 중이라고요. ‘소다’님도 혜원처럼, 혜원의 엄마처럼, 그리고 재하처럼 공허함과 허기짐을 채워줄 곳을 찾고 있는 중일 거라고요. 

이제 곧 봄이네요. 긴 겨울을 뚫고 작은 정령들이 올라오는 봄날, ‘소다’님의 마음에도 봄이 찾아오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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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와 책을 잇는 공간 <영화책방35mm> 운영. 영화 에세이 『삶의 어느 순간은 영화 같아서』를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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