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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시내의 안부묻기] 삶의 질문들과 더불어 영화 만들기

이숙경 감독의 영화들

손시내|영화평론가 / 2020-09-17


“잘 지내고 있나요?” 손시내 평론가가 여성 영화인들을 향해 건네는 따스한 인사. 오래된 앨범을 넘겨보듯 애정 어린 시선으로 영화와 캐릭터를 들여다보고, 잊고 있었던 혹은 기억해야 할 이름들에게 안부를 묻습니다. ‘여성’과 ‘영화’를 오가는 이야기들 사이 사이 손시내 평론가가 전하는 ‘안녕’들을 포착해보시길.

〈어떤 개인 날〉 스틸컷

남한강이 한눈에 보이는 양평의 어느 연수원, 작가인 보영(김도영)은 글쓰기 특강을 위해 이곳에 와있다. 오래도록 마무리하지 못한 원고 때문에 숙소에서도 노트북을 두들기고 있는데, 같은 방을 쓰게 된 민요 강사 정남(지정남)이 맥주 캔을 까더니 넉살 좋게 이것저것 묻는다. “맥주 한 잔 안 하세요?”, “국문과 나오셨어요?” 무신경하게 답하던 보영은 어느새 정남이 건네는 술잔을 받고 함께 담배를 피우며 수다를 떨기 시작한다. 안주로 과자 몇 봉지 뜯는가 싶더니 치킨 배달까지 시켰다. 보영은 ‘만 서른아홉’이니 서른일곱인 정남보다 언니이지만, 정남의 말마따나 ‘이혼 선배’는 정남이다. 

〈어떤 개인 날〉 스틸컷

11년의 결혼 생활 후 이혼한 지 이제 1년째, 왠지 모르게 피곤하고 짜증이 나는 일투성인데 보영은 주변 상황은커녕 자신의 마음조차 제대로 들여다보고 꺼내놓기가 버겁다. 수강생들에게는 자기 안에서 이야기를 찾으라고 하면서 말이다. 이혼한 얘기며 아이들 얘기, 웃긴 얘기, 사는 얘기들을 함께하며 각별한 시간을 보내는가 싶더니, 언니는 솔직하지 못하다고, 피하는 게 능사가 아니라고 말하는 정남에게 보영은 벌컥 화를 내고 만다. 이내 무거운 침묵 속에 평행선을 그리듯 각자의 침대에 누워 울음을 삼키는 두 여자. 하나로 정리할 수 없이 복잡하고 미묘한 삶의 시간이 그들 사이에 흐른다.

한국 사회에서 여성은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이혼하고 살아가면서 어떤 생각들과 마주치는가. 자신의 엄마를 어떤 시선으로 보게 되고 또 자식에게서는 어떤 의미를 발견하는가. 그리고 자기 자신을 어떻게 바라보게 되는가. 30분 남짓 되는 이 장면에는 그처럼 솔직하고 내밀하며, 개인적인 동시에 사회 안에서 사유되어야 할 질문들이 넘실거린다. 또한 이 장면에는 그러한 질문 앞에서 머뭇거리고 망설이다 차라리 고개를 숙여버리고 마는 마음까지 가만히 들어주고 어깨를 툭툭 쳐주는 덤덤한 힘이 있다. 

〈어떤 개인 날〉 포스터

이숙경 감독이 2008년에 만든 영화 〈어떤 개인 날〉은 보영의 일상을 따라가며 문득문득 튀어나오는 그와 같은 질문을 마주 보고, 말하지 못하는 마음을 찬찬히 들여다보고, 강처럼 흘러가는 시간을 바라본다. 그러는 사이 영화엔 보영 가족들의 삶 또한 차곡차곡 쌓인다. 딸 예림(권예림)은 무심한 듯 속 깊은 얼굴로 자기 나름의 시간을 살아가고, 시각장애인인 아버지(이찬영)는 복닥거리며 집안을 정리하거나 밖에 나가 뚜벅뚜벅 걷는다. 이들은 그저 거기에 있는 것만으로도 한겨울 햇볕 같은 맑은 온기를 안겨주는 존재들이다. 내내 찌푸린 얼굴이던 보영은 마지막에 이르러 그 온기와 함께 슬며시 웃는다. 아마 내일도 별다를 건 없을 테지만, 그래도 조금은 개운하고 홀가분한 날이 되지 않을까. 어쨌거나 보영의 삶은 지속될 것이다. 거기엔 갈등과 슬픔과 외로움이 있겠지만 미소와 기쁨, 그리고 함께 하는 즐거움도 있다고 이 영화는 말하고 있다.

이숙경 감독 (출처: 다음 영화)

이숙경 감독은 여성주의 문화예술기획자, 방송인, 출판기획자 등으로 활동하다가 마흔 중반이 되어 영화감독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어떤 개인 날〉은 감독의 실제 가족을 포함한 비전문 배우들, 극단에서 활동하던 김도영(〈자유연기〉(2018)와 〈82년생 김지영〉(2019)의 감독이다), 마당극 배우인 지정남 등과 함께 만든 그의 첫 장편 극영화이다. 그의 다양한 영화적 활동의 면면을 따라가다 보면, 영화와 함께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삶의 질문들을 껴안고 영화를 만든다는 게 무엇인지 어렴풋하게나마 알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그 활동은 카메라를 들고서 세상을 바라보고 대상과 관계 맺고 장면을 이어 붙여 한 편의 영화를 완성하는 일뿐만 아니라, 주변의 여성 영화인들을 모아 새로운 기획을 만들고, 여성주의적인 영화 제작 경험의 지평을 넓히는 일을 포함한다. 그리고 그러한 태도는 다시 각각의 영화 속에 스며들며, 한 편의 영화는 삶의 질문을 나누는 매개가 되어 세상과 만난다. 

〈어떤 개인 날〉 이후 그는 다양한 활동과 더불어 두 편의 장편 다큐멘터리 작업을 했다. 일찌감치 집을 나와 각자의 방식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스무 살 문턱의 탈 가정 여성들의 모습을 담은 〈간지들의 하루〉(2012), 학교에 가지 않은 청소년과 청년들에게 일터이자 배움의 공간이 되고자 하는 도시락 가게 ‘소풍가는 고양이’를 찍은 〈길모퉁이가게〉(2018)가 그것이다. 영화가 다루는 주제들은 곧장 사회적 의제로 환원되기 쉬운 것들이지만, 여기엔 그에 앞서 눈길을 붙드는 요소들이 있다. 감독은 종종 출연자에게 묻는다. 그 문신은 무슨 뜻이야?, 그럼 집을 나온 다음엔 어떻게 했어? 출연자가 돌려주는 대답도 대개는 편하고 무람없는 것들이다. 〈간지들의 하루〉의 은정은 이렇게 말한다. “아 뭐래~ 왜 말귀를 못 알아들어?!” 

〈간지들의 하루〉 포스터

다큐멘터리 영화엔 대개 연출자와 출연자의 관계가 어떤 방식으로든 드러나게 마련이고, 그 관계 속엔 우정과 존중뿐만 아니라 거리와 간극도 있다. 이숙경의 다큐멘터리가 흥미로운 건 별다른 장치나 자의식 없이 평범한 대화만으로도 그러한 관계의 복잡한 결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여기엔 청년 세대의 미리 결정된 이미지나 서사 대신 연출자의 솔직한 궁금함, 천진한 호기심이 출연자와의 상호작용을 통해 만들어내는 자유로운 모습들이 있다. 이 영화들은 자신의 대상을 연민하거나 기특해하지 않는다. 젊음을 낭만화하지도, 그렇다고 가장된 평등을 내세우지도 않는다. 다만 세대와 경험이 다른 이들이 특정한 언어나 관습적인 방식에 기대지 않고 오직 자기 자신을 열어 대화하는 순간을 포착해 보여줄 뿐인데, 그것이 이상하게도 감동적이다. 

〈어떤 개인 날〉의 보영은 “나답게 사는 게 너무 힘들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고 읊조린다. 거기엔 이혼한 중년 여성인 보영 자신이 가진 고유의 리듬과 속도, 감정과 경험을 풀어낼 수 있는 언어가 세상에 별로 없는 탓도 있을 것이다. 집을 나왔거나, 학교에 다니지 않는 청소년, 청년에게 덧씌워지는 이미지와 언어도 무척이나 제한적일 텐데, 이숙경 감독의 다큐멘터리는 그 틈새에서 인물들이 자기다움을 온전히 드러내는 반짝이는 순간을 찾아내 애정의 눈길을 보낸다. 그런데 이 영화들은 동시에 그들, 그리고 우리가 발 딛고 살아가야 하는 세계의 속성을 냉정히 응시하는 면모도 지녔다. 

〈간지들의 하루〉 스틸컷

〈간지들의 하루〉의 은정, 송하, 승희는 자신들의 알 수 없는 미래를 궁금해 하며 씩씩하게 세상에 한발씩 내딛어보려 한다. 열심히 일해서 돈을 모으고, 차나 집처럼 나만의 것을 갖는 꿈도 꾼다. 그렇지만 카페, 목공소, 콜센터, 핸드폰 대리점 등으로 끊임없이 이어지는 노동은 어느새 피곤하고 힘들어도 그만둘 수 없는 것이 되고, 시간이 흐를수록 사는 건 막막하기만 하다. 〈길모퉁이가게〉의 ‘소풍가는 고양이’는 정부의 지원을 받는 사회적 기업으로 시작했지만 험한 세상에서 지원 없이도 살아남을 수 있도록 자기만의 힘을 길러보고자 한다. 그 과정은 멀고 고되며 잔인하다. 영화 초반에 드러나는 여유롭고 활기 있는 공동체의 모습은 점차 능률과 수익 창출의 목표 아래로 사라지고, 일터엔 침묵과 짜증과 피로가 쌓인다.

그렇지만 두 영화의 주제가 ‘세상은 원래 다 그런 것’이라는 냉소적인 문구로 설명될만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두 영화는 삶의 풍경을 세밀하고 우직하게 바라보면서, 세상이 어떤 특정한 방식으로 구조 지어지고 어떤 하나의 방향으로 흘러가는지, 그런 세상에서 제도권 바깥으로 나간 반짝이는 개인들이 어떤 불행과 두려움을 만날 수밖에 없는지, 평소에는 가려져 있는 그 첨예한 지점을 드러낸다. 여성에게 (아버지의) 집이란 무엇이며, 청년들에게 노동이란 무엇인가. 이 거대하고 잔인한 세상에서 우리가 함께 살아가기 위해서는 과연 무엇이 필요할까.

〈길모퉁이가게〉 스틸컷

두 영화는 그러한 질문들과 함께 살아가는 끈질긴 시간의 기록이다. 〈간지들의 하루〉의 은정, 송하, 승희, 그리고 〈길모퉁이가게〉의 대표 씩씩이와 직원들 홍아, 쫑, 매미, 혁, 차차는 흘러가는 삶 속에서 계속해서 무언가를 선택하며 또 책임진다. 카메라가 바라보는 그들의 모습엔 역시 갈등과 불화와 슬픔이 있고, 마찬가지로 미소와 즐거움과 기쁨이 있다. 환하게 웃는 얼굴, 위태로운 모습을 모두 담으며 그 시간을 함께 살아가고자 하기에, 이숙경 감독의 영화는 그의 카메라가 담아내는 이들만큼이나 단단하고 용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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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한국영화평론가협회 영평상 신인평론상 수상, 영화웹진 리버스 필진, 한국독립영화협회 비평분과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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