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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아름의 잠시, 다시] 그러거나 말거나, 우리가 해야 할 이야기들

영화 <69세> 이후를 위하여

송아름|영화평론가 / 2020-09-10


송아름 평론가가 ‘또 다른 눈’으로 여성영화를 들여다봅니다. 지금보다 더 많은 여성의 이야기를 바라며, ‘잠시’ 멈춰 생각하고 ‘다시’ 또 생각합니다. 때로는 냉철하게 때로는 사려 깊게,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이야기.

작품을 평한다는 것, 아니 내가 마주하는 현실 아래에서 영화의 의미를 가늠하는 일은 늘 혼란스럽다. 한 작품을 본 후 글을 쓰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는 것도, 글을 쓴 후 다시 그 글을 대면하는 것에 쉽게 엄두를 내지 못하는 것도 이 혼란을 쉽사리 해결할 방법을 찾지 못해서일 테다. 영화의 명분과 진정성은 의심할 여지가 없지만 만듦새가 이와 괴리를 보이는 작품을 볼 때, 특히 고민의 시간은 길어진다. 그리고 이는 비단 개인적인 고민이 아닌 아주 오랫동안 이어져 온 논쟁의 한 양상이기도 하다. 영화를 통해 ‘무엇을 할 것인가’와 ‘어떻게 할 것인가’의 충돌은 1980년대부터 도드라져 지금까지 한국영화에서 부딪혀 온, 그러나 해결되지 않은 채 반복되는 중요한 사안이었다.

이 나라에는 어찌 그리도 오랫동안 숨겨온,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사건들과 억울한 이들이 많았는지 종종 그 완전한 은폐에 놀라곤 한다. 스크린은 조금이라도 편히 말할 수 있게 된 순간부터 발 빠르게 이들의 이야기를 옮겨적기 시작했다. 이때 ‘적었다’고 표현한 것은 영화들이 말 그대로 그들의 이야기를 고스란히 옮기는 것에 집중했기 때문이다. 이 나라가 가지고 있던 무수한 극복의 역사는 예술로 하여금 사회적 기여를 필수적으로 요구했고 영화는 유독 (자의든 타의든) ‘기여’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87 이후 가장 먼저 독립영화에서 관심을 가졌던 소재가 5.18광주민주화운동이었다는 것, 직후 노동문제가 이어졌다는 것은 오랫동안 억압되어 온 것이 무엇인지, 영화가 나서서 이야기해야 하는 것이 무엇이라 생각했는지를 명확하게 보여주었다. 

〈실미도〉 스틸컷

이러한 ‘영화적 기여’는 최근까지도 실화를 바탕으로 한 무수한 영화들을 통해 확인되었다. 처음으로 천만 관객을 동원한 영화가 <실미도>(강우석, 2003)였던 것은 이 요구가 비단 영화계의 의무감만은 아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역사적 무지에 대한 부채의식, 소외 계층에 대한 연민과 공동체 의식의 결여에 대한 죄책감, 피해자로서의 약자에 대한 공감과 가해자라는 강자에 대한 분노,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장착하여 정치·사회·역사적으로 옳고 건강한 의식을 지닌 개체로 존재해야 한다는 굳건한 시민의식은 영화 속 가슴 아픈 실화들과 끈끈하게 공명할 수 있었다.

〈도가니〉 스틸컷

그러나 <도가니>(황동혁, 2011) 이후 이어진 실화 바탕의 영화들은 영화가 지닌 태도의 문제 제기와 직면해야 했다. 영화가 가져야 할 윤리 의식이 그것이었는데, 과연 피해자를 영화 내에서조차 잔인하게 피해자화 하는 것이 정당한 것인가에 대해 깊은 고찰이 시작된 것이다. 비슷한 문제 제기가 있었지만 대체로 ‘대의’명분이 앞섰던 과거와 다르게 재현의 윤리에 대한 관객들의 인식은 분명한 변화를 보여주고 있었다. 깊은 관심이 필요하다는 이유로 만들어진 많은 영화들은 관객들의 선별 속에 분명한 차이를 가진 영화들로 구분되었다. 영화가 주는 피로는, 그리고 인물들의 고통은 더 이상 무조건 옹호해야 하는 것으로 인식되지 않았고, 그만큼 사건을 옮긴다는 것은 많은 고민을 필요로 하는 것이 되었다.

길게 이야기했지만, 개인적으로 ‘실화’가 ‘극화’ 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이 지점, 사건을 어떻게 옮길까에 대한 고민의 흔적이라 생각한다. 이런 일이 있었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 아닌, 공분을 일으키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닌 그 이상을 이야기하고 그 이후를 그릴 수 있는 방법. 이를 위해서는 분명 긴 시간 당연한 것이라 여겼던 것들을 넘어서는 무엇인가가 필요할 것이다. 최근 이를 다시 생각한 것은 영화 <69세>(임선애, 2020)를 본 직후였다. 이 작품에 깔린 기본적인 조심성과 인물에 대한 존중에도 불구하고 영화 내적으로 당연한 듯 흐르고 있던 정서는 다시금 넘어설 지점이 생긴 것이 아닌가라는 질문을 던지게 했다. 가령 이런 것이다. 효정(예수정)이 고민하는 순간들, 그리고 그가 오랫동안 주저할 수밖에 없는 바로 그 순간에 깔린 성적 수치심. 여성이 성적 피해를 당할 때 으레 따라붙을 것이라 생각하는 이 전제가 이 작품의 방향을 흐리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69세〉 스틸컷

암전 속 대화로 시작하는 첫 장면은 이 영화가 절대 사건을 재연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여주는 것처럼 보인다. 노인 성폭행 문제를 다룬 영화라는 점을 알고 있는 상황에서 물리적으로 저항할 수 없는 여성과 젊은 남성의 암전 속 대화는 몇몇 단어와 침묵만으로도 충분한 긴장과 공포를 자아낸다. 굳이 재연하지 않고도 많은 것을 이야기할 수 있다는 이 영화의 기조는 적절한 생략과 침묵으로 효정의 날들을 이어간다. 그러나 효정이 생각하는 시간이 길어지는 것, 자신의 행동이 누군가에게 폐를 끼치고 있다는 생각으로 이어지는 것에는 그가 조용히 마무리 지어야 할 부끄러운 일을 겪었다는 전제가 자리한다. 그런 이유로 효정의 행동은 고소를 해야겠다고 결심했던 때와는 다른 망설임 속에서 조금씩 모호해진다.

효정이 함께 살고 있는 동인(기주봉)의 집을 나와 과거 자신이 요양사로 일하고 있던 곳으로 되돌아가는 것은 가장 위험한 장면 중 하나이다. 그가 자신의 상황을 이해하고 그를 돕겠다고 나서는 이들을 떠나 당도한 곳이 과거에 역시 자신에게 트라우마를 남긴 상처를 주었던 곳이라는 점은 그가 가지고 있는 수치심이 얼마나 거대한 것인지를 보여준다. 물론 이는 효정의 말을 믿지 않는, 그래서 영장이 기각되는 상황에서 벌어진 결과로 생각할 수 있지만 이것이 분노가 아닌 도피로 이어졌다는 것 역시 되짚을 필요가 있다.

〈69세〉 스틸컷

효정이 낙담하는 동안 적극적으로 움직이는 인물이 동인이라는 점 역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효정의 조력자가 중요한 인물임엔 틀림없지만, 동인에게 집중할수록 영화의 전체적인 맥락을 흔드는 동인의 전사(前史)가 이어지며 영화의 균열을 초래하기 때문이다. 엄밀히 말해 동인에 대한 설명이 많아진 것은 효정의 서사에 도움을 주지 못한다. 동인의 서사는 함께 살고 있는 ‘동거녀’로서의 효정과 이를 그리 반기지 않는 아들을 부각시키며, 심지어 동인이 효정의 일을 돕기 위해 몰두하다 부인의 기일을 잊고 아들과 부딪히는 에피소드가 등장한다. 이로 인해 효정이 겪은 사건은 그 자체로 대면할 기회를 잃고 효정과 거리를 둔다.

영화 속 효정의 머뭇거림을 신중한 태도라기보다 침착해야만 한다는 생각이 만들어낸 강박이며 그렇기에 조금씩 걷어내야 한다는 생각이 든 것은 이 때문이었다. 사실 효정이 겪은 일은 공포 혹은 분노의 감정이 앞설 수밖에 없는 일이었을 테다. 자신의 일상을 더 넓게는 오랫동안 쌓아온 수많은 순간들을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는 기억이 덮어버렸을 테니까. 무슨 일을 한대도 사라지지 않을 이 기억을 조용히 처리해야 할 일로 전환한 것은 감정보다 오랫동안 요구되어 온 억압이 앞선 탓일 것이다. 여성이 겪을 수 있는 무수한 문제들을 극화할 때 사건의 본질로 다가가는 데에 긴 시간이 걸리거나 누군가를 우회하는 것을 이제 넘어서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고민과 주저와 연결되는 수치심은 오히려 솔직한 고백을 보여주는 것을 가로막을 위험이 크기 때문이다.

〈69세〉 스틸컷

…… 여기까지 쓴 후, 몇 개의 기사들을 보면서 <69세>에 대한 많은 생각들을 어떻게 정리해야 할까 한참의 시간을 가져야 했다. 영화의 의의에 동의하면서도 효정의 행적을 불균질하게 훑고 있는 <69세>에는 사실 아쉬움이 남아 있었다. 이는 당연히 마치 무성(無性)처럼 취급하는 여성에 대한 첫 영화적 시도라는 점에 대한 기대만큼의 반작용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조금 더 나은 방법이 있었을 것이라고, 이런 부분은 한 번 더 생각해 볼 필요가 있었다고 이야기를 보태고 싶었다. 그러나 이 고민들은 <69세> 속 이야기가 현실에서 일어난 일이라는 사실을 알고 받아들이는 이들끼리의 분투라는 것을 황당하게 알아버렸다. 69세의 노인이 29세의 청년에게 성폭행당하는 것이 애초에 불가능하다는 생각들은 영화에, 아니 인물에게까지 조롱을 얹고 있었고, 이는 이 영화 속 이야기가 당연한 현실이기에 만듦새를 고민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시간들을 어이없는 것으로 만들었다. 

〈69세〉 스틸컷

노인들은 저항이 쉽지 않다는 점에서, 그리고 가족들에게 알려질 것을 누구보다 두려워한다는 점에서, 무엇보다 그들의 피해가 믿을 수 없는 이야기가 된다는 점에서 쉽게 표적이 되며 그만큼 피해자의 숫자가 늘어나고 있다는 점은 이미 오랫동안 지적되었다. 이 내용을 굳이 써야 한다는 것이 우습고, 필요한 상황이라는 것이 또 우습다. 영화적 소재로서 노인과 여성과 성의 결합이 쉽게 선택될 수 없었기에 이제야 스크린에 자리했고, 이제야 적극적으로 말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은 오히려 서글픔이 앞설 일임에도 이 영화의 사실성을 굳이 덧붙여 설명하는 것은 분명 후퇴로 볼 일이다. 그래서 이 후퇴는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무지까지 해결하기엔 이를 이해하는 이들과 할 이야기가 너무도 많이 남아 있다. 그리고 영화에 대한 관심과 제언이 난독으로 엉뚱한 해석을 낳을 일이 걱정되어서라도 우리끼리 이야기를 나누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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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한국영화평론가협회 영평상 신인평론상 수상,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시네마 크리티크 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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