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영화를 읽다

내가 그때 원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매미 죽던 날> <하고 싶은 아이>

은사자 / 2020-08-27


<매미 죽던 날>   ▶ GO 퍼플레이
이지연|2018|드라마|한국|15분
<하고 싶은 아이>   ▶ GO 퍼플레이
김여정|2019|드라마|한국|27분

<매미 죽던 날> 스틸컷

1. 수능 몇 주 전, 친구와 머릴 맞대고 고민했다. 있잖아, 수능 때 생리하면 어떻게 해? 윽, 상상만 해도 찝찝. 피임약 먹어서 미루면 되지 않을까? 맞아, 수학여행 갈 때도 누가 그랬지? 좋은 생각이라며 호기롭게 약국에 다녀온 친구는 표정이 썩 좋아 보이지 않았다. 혼자 피임약을 사러 온, 교복 입은 여성 청소년에게 약사가 보였을 태도를 상상해보니 어째서 그런 표정을 짓고 있었을지 납득됐다. 우린 작전을 바꿔 여럿이서, 약국 문을 열자마자 “수능 때문에 주기 조절하려는 거예요. 피임약 주세요”하며 온몸으로 ‘그거(?) 때문에 사려는 거 절대 아님!’ 기운을 뿜어냈고 약사는 마지못해 약을 내주었다.

2. 첫 키스라는 단어를 들으면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이라는 시구가 떠오른다. 하지만 내게 첫 키스는 다소 우스운 추억이다. 기숙학교를 다녔던 고등학생 시절, 좋아했던 친구는 어쩐지 매일 내 침대에서 잠들곤 했다. 마주 보며 잠들기를 며칠째, 그 친구는 입술을 가만히 가져다 대다(내가 놀라거나 거부하지 않자) 그다음엔 키스 비슷한 것을 시도했다. 키스일 뻔했던 그 행위는 결국 실패하고 말았는데, 새로운 종류의(?) 신체접촉에 너무 깜짝 놀란 내가 그만 입을 앙다물었기 때문이다. 시간이 지난 뒤 그 애는 그때를 이야기하며 깔깔 웃었다. 아니, 다들 키스는 어디서 배워오는 거야?

<매미 죽던 날> 스틸컷

3. 두 영화 모두 서툴고 어려웠던 처음을 떠오르게 만든다. 〈매미 죽던 날〉(이지연, 2018) 속 수연(한초원)은 스트레스 때문인지 월경 주기가 맞지 않는다. 산부인과에서 피임약을 처방받아 복용하던 중 담임에게 그 사실을 들키게 되고 왜 이런 걸 먹는지 추궁당한다. 담배를 피우다 걸린 지석(김종하)은 피임약을 먹다 걸린(?) 수연에게 함께 봉사활동을 가자고 제안하는데, 약속한 날 어찌 된 일인지 둘은 지석의 집에서 섹스하게 된다. 

수연은 지석과 입 맞출 때 손을 어디 두어야 할지 몰라 헤맨다. 갈 곳을 잃은 수연의 손이 영화가 끝나고도 한참 떠올랐다. 아마 다들 그랬지 않을까? 뭔가를 하긴 하는데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잘 모르는 상태로 얼떨결에, 정신을 차려보면 이미 많은 게 끝나 있는. 어쩌면 나는 운이 좋아-나의 상대는 여성이었다. 물론 여성 간에도 성폭력은 발생한다. 내가 그와 쌓아온 관계, 그 순간의 앞뒤 상황 등을 상세히 다 실을 수 없기에 거칠게 ‘운’이라는 단어로 퉁쳤음을 밝힌다-첫 키스를 우습고 조금은 쑥스러운 에피소드로 추억할 수 있는 걸지도 모르겠다. 이런 어찌할 바 모르는 상태로 하는 입맞춤이, 성관계가 과연 안전할 수 있을까.

“내가 왜 약 먹는 줄 알아? 맨날 공부만 하느라 몸이 다 망가졌어. 근데 이젠 날 막 문제 있는 애 취급해”, “그거 하는 게 그렇게 잘못된 거야?”라는 수연의 말에 잘못된 게 아니라고 말해주는 사람은 엄마도, 담임도 아닌 지석이다. 누군가 수연에게 피임약은 피임 용도로만 쓰는 게 아니고 설사 피임의 용도로 사용한다고 해도 추궁당하거나 혼나야 할 일이 아니라고 알려줬다면. 중요한 건 약 복용 방법과 효능, 겪을 수 있는 부작용 등 약을 정확히 알고 먹는 거라고 말해줬다면. 그랬어도 수연은 준비되지 않은 상황에서 지석과 갑자기 섹스를 했을까?

<하고 싶은 아이> 스틸컷

4.〈하고 싶은 아이〉(김여정, 2019)의 영은(정희정)은 같은 반 민수(김동휘)를 좋아한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민수는 영은의 쌍둥이 동생 영지(기은수)와 연애 중이고 부모님이 집을 비운 어느 날, 영은은 영지와 민수가 집에서 섹스하는 장면을 목격한다. 이후 둘의 관계를 중단시키기 위해 영은은 말도 안 되는 협박을 하지만 민수는 꿈쩍도 하지 않는다. 

영은은 그전에도 영지와 민수가 특별한 관계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랬던 영은이 왜 둘의 성관계 장면을 목격하곤 변했을까? 아마 섹스하는 사이는 문자를 주고받고 서로의 얼굴을 만지고, 집에서 함께 떡볶이를 만들어 먹는 것과는 비교도 안 되는 특별한 관계라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해서 대체 섹스가 뭔지 인터넷에 검색해보기도, 짐짓 언니처럼 ‘콘돔은 썼냐’ 물어보기도, 누가 보면 해본 사람인 줄 알겠다고 비아냥대는 영지에게 “왜 나는 안 해봤다고 생각하는데?”라고 되묻기도 한다.  

<하고 싶은 아이> 스틸컷

영은은 민수를 협박(?)하면서 본인과도 섹스하자며 남자들은 아무 여자랑 할 수 있는 거 아니냐 묻는다. 영은은 어디서 그런 정보를 얻었을까? 영화를 보고 나서 ‘섹스’라는 키워드를 검색해보았다. 대부분은 청소년에게 노출하기 부적절함을 이유로 검색 결과에서 제외되었고 헤드라인이 섹스 스캔들인 기사(이 경우 ‘유명인’의 성폭력을 ‘섹스 스캔들’로 언급한 경우가 상당해 보였다), 소위 성 전문가가 쓴 섹스에 대한 정체를 알 수 없는(사실 굉장히 문제적인) 조언 등을 볼 수 있었다.

영은이 인터넷에 검색해보고 섹스를 알게 되는 게 아니라 성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면 어땠을까. 성관계는 서로 동의한 상황에서 하는 거고, 그 동의는 단순히 ‘할래?’ ‘좋아’라는 말로 이뤄지는 게 아니라 내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충분히 살펴본 뒤, 동의했더라도 그만하고 싶어지면 언제든 의사를 밝힐 수 있는 상황과 관계에서 온전하게 실현될 수 있다는 걸 알았다면. 그랬어도 민수에게 거절당한 뒤 인터넷으로 알게 된 ‘성인’ 남성과 모텔에 가는 선택을 했을까?

<하고 싶은 아이> 스틸컷

5. 자꾸 이렇게 저렇게를 가정해보는 건 수연과 영은에게 왜 그 남자들과 섹스(하려고)했는지 묻고 싶기 때문이다. 묻고 싶었던 건 아마도 두 사람이 경험(하려고)한 섹스가 좋지 않다고 생각해서인 것 같다. 왜 그런 생각이 들었을까. 충분히 고민하지 않고 갑자기 해서? 좋아하는 사람과 하지 않아서? 아니 뭐, 섹스는 언제나 좋아하는 사람과‘만’ 해야 하는 건가? 모든 사람이 대단히 숙고해서 할지 말지를 결정하나? 그렇지 않은데, 왜 수연과 영은에겐 계속 묻고 싶은 걸까. 이런 질문의 기저에는 청소년 당사자의 선택을 ‘미숙한 것’으로 생각하는 마음이 있는 건 아닐까 고민스럽다. 왜 이런 질문 앞에서 마음 한편이 불편할까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그건 대상이 잘못 설정됐기 때문이었다. 나는 수연과 영은이 아니라 사회에 질문해야 했다. 왜 청소년의 섹슈얼리티를 못 본 척하는지, 왜 제대로 된 성교육을 제공하지 않는지, 아무 역할도 하지 않으면서 어째서 ‘문제’가 없길 바라는 건지 질문해야 했다.

두 영화는 이런 질문이 일어나지 않는 현실에서 여성 청소년이 어떤 상황에 처할 수 있는지 보여준다. 무엇을 원하는지 충분히 고민해보지 않은 상태에서 하는 섹스는 혼란스러우며 폭력과 구분하기 어렵다. 수연과 영은이 그 순간 그 상대와 하고 싶었던 건 무엇이었을까? 이건 비단 여성 청소년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영화를 다 보고 나면 자연스레 언젠가의 내 선택도 되돌아보게 된다. 내가 그때 원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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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여성민우회 성평등미디어팀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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