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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설이지 말고, 페미니즘 돋보기

영화보기의 즐거움과 불안

황미요조|영화평론가 / 2019-12-16


< ZOOM IN >에서는 여성 영화, 감독, 배우, 캐릭터 등을 퍼줌만의 새로운 시각으로 들여다보고 다양한 관점에서 이야기해보고자 합니다. 여러분들도 망설이지 말고, 페미니즘 돋보기! 

영화 <스핑크스의 수수께끼>와 <오후의 올가미>에 대한 평론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로라 멀비, 피너 웰렌|1977|드라마|영국|92분
오후의 올가미|마야 데렌, 알렉산더 해미드|1943|드라마, 판타지|미국|14분

<오후의 올가미> 스틸컷 ©다음

1970년대 영화연구가 본격적으로 제도적인 학문 안에 하나의 분과로 자리 잡게 되면서 영화의 지위는 한편으로 상승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하락한다. 68혁명의 주역이 된 유럽의 젊은 세대들에게 영화는 매혹과 찬사의 대상이었지만, 그들이 영화를 진지하게 탐구하면서 영화는 구조적으로 파헤쳐지고 부정해야 할 대상이 된다. 여기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영화라는 매체 자체의 구조였다. 이전에도 개별 영화와 감독들에 대한 비평적 탐구는 있었지만, 영화를 학문의 대상으로 격상시킨 논의들은 결국 영화란 그리고 영화보기란 무엇인가, 즉 무엇이 영화를 매혹적인 것으로 만들며 관객을 사로잡는가에 대한 질문들이었다. 영화이론에 있어 여전히 강력한 힘을 발휘하고 있는 대답은 영화가 이데올로기라는 환영을 만들어 내는 기구라는 것이다.

정신분석학과 구조주의적 마르크스주와 결합한 논의들에 따르면, 영화는 그 작동의 구조가 이데올로기의 구조와 동일한 것이며 이것은 영화라는 매체가 기능하는 구조에 따른 것으로, 내용과는 상관없는 것이다. 이러한 영화이론을 페미니스트적 관점에서 비판적으로 전유하고 수정한 것이 로라 멀비의 기념비적인 논문 ‘시각적 쾌락과 내러티브 영화(Visual Pleasure and Narrative Cinema)’다. 그 이전의 논의들도 정신분석학에서의 ‘보기’가 발생시키는 쾌락과 시선 권력에 주목해 영화이론에 연계시키기는 했지만 멀비는 더욱 강력하게 ‘보기’의 문제, 특히 시선의 문제와 결합시키며 주류 상업 영화(멀비의 표현에 따르면 ‘내러티브 영화’)에 있어서 보기의 주체는 남성이며, 영화보기의 쾌락은 남성적 쾌락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한다.

이전에도 페미니스트 비평은 있었지만 그 초점이 캐릭터가 페미니스트적인지 아닌지, 여성의 비중이 얼마나 큰지와 같은 내용에 향해 있었다면, 멀비는 영화라는 매체의 보여지는 방식에 내재돼 있는 통제와 권력 그리고 쾌락이 성별적이라는 사실을 밝히며, 영화가 만들어내는 이데올로기적 환영은 내용과 상관없이 구조적이고 형식적으로 가부장제라는 발견에 다다른다.


<스핑크스의 수수께끼> 스틸컷 ©네이버

<스핑크스의 수수께끼>: 영화라는 수수께끼, 스핑크스로서 여성
우리가 멀비의 견해에 충실히 따른다면, 영화보기와 관련해 실천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답은 영화보기의 쾌락을 무화시키는 것이다. 영화보기의 쾌락은 가부장적인 것이기 때문에, 그리고 영화를 보는 시선은 권력을 담지하고 있기 때문에 기존의 영화 문법에 대한 철저한 반론, 영화로부터 느끼는 즐거움을 철저히 해체하는 것으로 응답해야 한다. 자신의 글 ‘시각적 쾌락과 내러티브 영화’의 말미에서 “전통적 영화 쾌락의 핵심 부분인 관음주의적-시각쾌락 시선 그 자체는 파괴될 수 있다”고 확신했던 멀비는 직접 페미니스트 실험 영화를 연출한다.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로라 멀비·피터 울렌, 1977)는 멀비가 자신의 이론, 즉 탈 가부장적 시선과 쾌락을 ‘실험’한 실험 영화다.

로라 멀비는 영화 도입부에 직접 등장해 카메라를 정면으로 바라보며 이야기를 시작한다. 오이디푸스 신화의 스핑크스 수수께끼 이야기를 여성의 성별을 지닌 스핑크스를 중심으로 재독해하며, 정신분석학 남성 서사의 핵심인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전복한다. 그리고 곧 영화는 다음 챕터로 넘어간다. 영화에 간헐적으로 삽입되는 ‘루이스(Louise)’라는 여성을 주어로 서술되는 자막들 그리고 간헐적으로 들리는 여성 목소리의 보이스 오버(내레이션)는 이 영화의 서술 주체(화자)를 구축하는 데 실마리를 제공하는 것도 같지만, 화면은 등장하는 여성들 중 그 누구에게도 초점을 맞추지 않으면서, 즉 자막이나 목소리가 서술하는 대상이 누군지를 추정하는 시도를 무력화시키면서 전통적인 내러티브 구축에서 달아난다.



<스핑크스의 수수께끼> 스틸컷 ©다음

이 영화에는 (가정과 일을 ‘양립’하며 일상적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수많은 여성들이 등장하지만, 전통적인 의미에서 주류 상업영화를 만드는 시선에 포획되지 않는다. 영화에서 가부장적인 시선의 정치를 작동시키지 않는 가장 핵심적인 스타일은 느리게 360도 회전하는 카메라다. 이 회전하는 카메라는 주류 영화가 구축하는 카메라-내부인물-관객 시선의 일치를 매 순간 불가능하게 만들며, 결국 내러티브 구축에도 실패하게 한다는 것, 여성들이 영화 내부의 (남성) 등장 인물에게도, 이데올로기적으로 작동하는 카메라에도, 영화 밖의 (가부장적) 관객에게도 시선의 대상으로 보이지 않는 것이 가능하다는 걸 보여주는 게 멀비의 ‘실험’의 핵심이다. 여기에 덧붙여, 간간이 등장해 스핑크스 이야기를 늘어놓는 멀비 자신도 역시 이 실험의 효과를 더욱 증진시킨다.

<스핑크스의 수수께끼>의 이러한 급진적인 반미학적, 반쾌락적 시도가 정말로 영화보기의 즐거움과 무관한가, 이러한 시도를 통해 내러티브는 무화되는가 그리고 최종적으로 이 영화의 관객은 이데올로기로부터 탈출하는 체험을 통해 페미니스트적 주체로 각성하는가의 문제는 여전히 논쟁적이다. 그러나 서구사회의 1970년대라는, 이른바 2세대 페미니즘의 정점의 시대에 패기만만하며 대담하고 에너지 넘치던 시기의 영화이론과 그 실천을 살펴본다는 점에서 현재의 페미니스트들에게 주는 즐거움은 만만치 않다.


<오후의 올가미> 스틸컷 ©다음

<오후의 올가미>: 확장의 즐거움과 불안
1970년대 페미니스트 평론가들은 당대의 주류 영화들 그리고 영화 역사가 얼마나 가부장적인 것인가를 파헤치는 것과 더불어 기존 여성 창작가들의 작업들을 재방문하고 재해석했다. 이런 과정에서 마야 데렌은 (상대적으로 유럽에 비해 불모지였던) 미국 아방가르드 영화의 선구자 중 한 사람에서 페미니스트 영화 연출가로 재독해된다. 

초기 아방가르드 영화들이 카메라와 영화를 대하는 태도는 놀라움과 환희 그 자체였다. 카메라는 눈일 뿐 아니라 눈이 보지 못하는 것까지 보게 한다. 인간 물리적 신체에게 불가능한 시야를 제공하며, 신체 제약 때문에 볼 수 없었던 것까지 볼 수 있게 해준다. 1970년대 이후 아방가르드 영화에서의 카메라의 눈이 이데올로기로 오염되고 권력 관계가 교차하는 장이라면, 영화 역사 초기의 아방가르드 영화들에서 카메라의 눈은 인간 신체의 확장, 인간 감각의 확장, 인간 지식의 확장으로 인한 환희의 눈이다.

마야 데렌의 영화 <오후의 올가미>(1943)에서도 이러한 기쁨은 충실히 표현되고 있다. 반복되는 꿈, 혹은 영화 속으로 들어간 여주인공은 꿈 또는 영화 속에서 신체가 확장되는 경험을 한다. 그의 신체는 중력을 이기며 사뿐히 날아다니고, 그의 눈은 꿈 혹은 영화 밖에서 보지 못했던 것을 본다. 그의 눈이 카메라의 조리개가 되는 명징한 장면도 등장한다.

<오후의 올가미> 포스터 ©다음


그러나 영화가 가능하게 한 자기 경험은 성별적이다. 미리암 한센은 바벨과 바빌론에서 최초의 장편영화인 <코베트와 피츠시몬스의 싸움>(The Corbett-Fitzsimmons Fight, 1897)에 대해 논한다. 라스베가스의 권투 경기를 찍은 이 다큐멘터리 영화가 미리암 한센에게 중요한 이유는 최초의 장편영화여서가 아니라, 영화가 여성에게 (제약적으로나마) 새롭게 열어준 공간과 체험에 대해 주목하기 때문이다.

한센은 실제 라스베가스의 내기 권투 경기에는 여성 관중이 거의 참석할 수 없지만, 이 경기가 영화로 공개되자 많은 여성들이 보러 간 사실을 언급하며, 영화(관)는 공공장소의 출입에 제약이 있던 여성들에게 경험을 확대시켜주는 매체였다는 주장을 한다. 미리엄 한센을 비롯한 이른바 근대성을 중심에 놓고 사고했던 영화 연구자들에게 영화는 (1970년대의 연구자들의 주장과는 달리) 태어났을 때부터 계급적·젠더적·지역적 하층민들과 소수자들에게 친연성을 가진 매체가 된다.

즉, 마야 데렌에게 영화적 실험은 여성으로서 자신이 가지는 공간적, 신체적 제약의 해방을 실험하는 것이 된다. 이것이 다른 초기 아방가르드 영화와 젠더적으로 구별된다는 것은 이 확장의 경험이 어떻게 방해받는지를 살펴봄으로써 가능하다. <오후의 올가미>에서 자신의 신체적 확장의 즐거움을 만끽하던 여성은 곧 자신이 그리고 자신을 닮은 여성이 또 다른 어떤 시선에 의해 관찰되고 있다는 것을 의식한다. 영화적 공간을 마음껏 활보하는 여성과 동시에 남성적 시선에 갇혀 있다는 불안은 영화의 구조를 통해 자기 반영적으로 등장한다. 이 매혹과 불안은 이 여성이 반복해서 만나는 ‘얼굴 없는 누군가’로 표상되기도 한다. 마야 데렌의 영화가 주는 경험의 확장에 대한 환희와 혼재된 불안은, 남성 감독들의 초기 아방가르드 영화에서 보이는 보기의 환희가 점점 여성을 대상으로 하는 노골적인 관음증 형식과 서사로 발전해가는 것과 대조를 이루며, 여성적 입장에서 영화보기의 즐거움과 위협이라는 중요한 질문을 한다.

첫 글을 시작하며
주류 상업영화와 그 영화가 상영되는 공간은 구조적으로 가부장적인 것인가, 아니면 영화보기의 공간은 제약적이나마 혹시 여성 친화적인 것은 아닌가, 젠더적으로 영화가 주는 경험 확장은 여성 관객에게 더 큰 임팩트를 가지고 있는가와 같은 질문은 앞으로 이 코너에서 계속 함께 고민해갈 문제들이다. 초기에는 페미니스트 영화 정전을 중심으로 살펴볼 것이지만, 정전에서 멀어질수록 이 질문이 그리는 서지와 지도들은 더 복잡해질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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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RZOOMER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이론과 강사, 2011~2014 서울국제여성영화제 프로그래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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