ZOOM IN

망설이지 말고, 페미니즘 돋보기

위로가 아닌 응원이 필요한 노동의 시간들

강유가람 <이태원>

송아름|영화평론가 / 2020-05-28


< ZOOM IN >에서는 여성 영화, 감독, 배우, 캐릭터 등을 퍼줌만의 새로운 시각으로 들여다보고 다양한 관점에서 이야기해보고자 합니다. 여러분들도 망설이지 말고, 페미니즘 돋보기!

<이태원> 스틸컷

누군가에겐 당연한 것이 누군가에겐 껄끄럽다. 누군가에겐 괜찮은 것이 누군가에겐 안쓰럽다. 이 간극이 웃음으로 넘어가면 다행이지만, 후자가 전자를 지적할 땐 갈등이 된다. 그래도 짧은 대거리로 끝날 정도의 갈등이라면 넘겨줄 만하다. 이 갈등 사이에는 적어도 전자의 이야기가 섞여들어 그의 생각을 들어볼 수 있을 테니까. 그러나 상대가 그렇거나 그렇지 않거나와 상관없이, 그저 저 사람은 안쓰러운 사람이라고 생각해버리는 누군가에게 또 다른 누군가는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는 불쌍한 사람이 될 뿐이다. 우리가 타인의 삶을 내 기준대로 생각해버리는 것은 이러한 위험을 내포한다. 내가 경험하지 못한 것을 경험한 이들에게, 그들의 삶이 아닌 그들의 경험에 대한 나의 판단으로 손쉽게 안쓰러운 감정을 보낸다. 그것이 전혀 그들이 원한 것이 아닐 수 있음에도.

누군가에게 보냈던 안쓰러움과 안타까움을 거두어야 할 때마다 머쓱함을 느끼면서도 안타까움을 거두는 일은 쉽지 않다. 어찌 보면 오만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이 감정이 쉽게 그리고 자주 불쑥 불쑥 올라오는 것은 어려운 이를 빠르게 피해자로 내려 앉히고 위로를 상위에 두는 것이 도덕적으로 옳다고 믿는 까닭일 것이다. 어려운 일을 겪는 이는 힘들 것이고 그러니 그는 약자가 될 것이며 당연히 위로해야 한다는 것,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지만 그의 힘듦이 상대가 생각하는 것과 다르다면, 스스로를 약자라 생각하지 않는다면 그에게 위로를 보내는 것은 실례가 아닐까. 누군가의 삶에 내가 위로를 보낸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감히 그럴 수 있는 것일까. 공감이란 이름으로 보낸 위로들은 과연 그들을 위한 것이었을까. 문득 이 생각들이 떠오른 것은 강유가람 감독의 다큐멘터리 <이태원>(2019)을 본 직후였다.

<이태원> 포스터

1970년대부터 이태원에서 살아온 세 여성, 삼숙·나키·영화는 이제 50대에서 70대가 된, 자신들의 청년기와 중년기를 모두 이곳에서 보내고 현재의, 그리고 앞으로 남은 노년기 역시 이곳을 벗어날 생각을 하지 않는 이들이다. 그 이유는 단순하다. 그들의 삶이 모두 여기에 있기 때문이다. 남편에 대한 추억이 있고, 나와 이야기를 나눌 사람이 있고, 또 내가 돌봐야 하는 조카가 있는 곳이 이태원이다. 남들이 그곳을 어떻게 부르든 간에, 국가가 이곳과 그 주변을 어떻게 변화시키겠다고 하든 간에 그들의 삶은 여기에 있다. 중요한 것은 이곳이 그들의 터전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이곳에서 노동을 했기 때문이라는 점이다. 자신의 삶을 꾸려나갈 수 있는 돈을 벌던 곳, 그래서 자신의 집을 마련하고 앞으로도 그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곳, 쪼들려 돈이 필요할 때 자신을 도와줄 이가 있고 묻고 물어 일자리를 찾을 수 있는 곳, 이태원은 그들이게 그런 곳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1970년대부터 이태원에서 살았던 여성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라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이처럼 너무도 당연한 이야기를 떠올리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다. 이는 이태원에 미군기지가 있었다는 것, 그리고 여성의 노동을 다룬다는 것에 드리운 거대한 장막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한국영화에서 미군기지가 영화의 직접적인 배경이 된 것은 1987년 이후, 광주민주화항쟁을 이야기했던 <황무지>(1988)와 <오! 꿈의 나라>(1989)에서였다. 두 작품은 모두 미군 부대에서 일하며 그곳의 생리를 바라보는 남성을 주인공으로 삼아 미군과 광주민주화운동의 가해자를 등가에 놓고 피해자로서의 ‘우리’를 상정하고 있었다. 

<이태원> 스틸컷

이 작품들에서 여성들은 갖은 폭력과 우롱, 욕설에 시달리고 종국에는 사기를 당해 자살에 이르는 가장 약자의 위치에 놓여 있었다. 힘 있는 자들과 그들에게 시달리는 약한 자의 역할은 ‘우리’ 중에서도 기지촌 여성에게 강력하게 부여된 것이었다. 그들은 늘 욕설 속에서 약과 술에 절어 등장했다. 그것은 사실이냐의 여부와 상관없이 극심한 고통을 받았을 것이라 정해진 이들에게 당연한 것처럼 각인시킨 일종의 각인이었다. 한참의 시간이 흘러 등장한 <수취인불명>(2001)이 미군기지에서 일했던 여성에게 부여한 서사도 그리 다르지 않았다. 자신을 버리고 떠난 미군을 잊지 못해 미쳐가는 여성과 그를 분노에 찬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혼혈 아들이 이끄는 파국은 이들이 그곳에서 일할 때뿐만 아니라 그 이후에도 얼마나 극심한 폭력에 노출되어 있었는지를 보여줬다.

이러한 영화들은 미군 부대 내에서 여성들은 그저 사용될 뿐, 그렇기에 피해자가 될 뿐 그들이 노동을 했을 것이라는 인식은 아예 고려조차 하지 않았다. 물론 이는 장소에 특정할 문제는 아니었다. 공적 영역에서의 여성 노동이 적극적으로 다루어진 것은 1970년대부터였지만 여성 노동자에 대한 조롱 어린 시선이나 그것에서 벗어나고자 피해를 토로하는 방식은 고정적으로 흘러온 것이기 때문이다. 가령 우리가 TV에서 한 번쯤은 보았거나 들었을 버스안내‘양’은 원래 버스‘차장’이란 이름으로 남성들의 직업이었다. 버스안내‘양’은 1960년대 초반 정부가 교통 운영의 ‘명랑화’를 도모한다는 구실로 1961년 갑작스레 ‘여성’으로 바꾸면서 시골에서 갓 상경한 어린 여성들이 특별한 교육 없이 선택할 수 있는 직업 중 하나가 되었다. 버스회사들은 ‘16세 이상 20세 미만의 젊은 여성들’ 중에서도 ‘얼굴이 예쁘고 애교 있는 아가씨’로 버스안내양의 자격을 제한했고, 이들은 노동자가 아닌 ‘꽃’으로 불렸다. 

<이태원> 스틸컷

분명 교통 운영의 ‘명랑화’를 위해 국가가 불러냈지만, 사회로 나선 이들에 대한 시선은 그리 곱지 못했다. 사회로 진출한 여성들에 대한 수많은 가십거리들은 1960-70년대 한국사회에서 이들이 어떤 오해 속에서 ‘노동’해야 했는지를 보여줬다. 그들은 자신들에 대한 오해를 풀기 위해 자신들이 얼마나 어려운 환경 속에서 얼마나 열악하게 일해야 하는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일을 얼마나 사랑하고 소중히 생각하는지를 수많은 수기를 통해 남겨두었다. 이러한 수기들은 노동에 대한 정당함보다는 오해를 해명하는 것에 훨씬 많은 분량을 할애하고 있어 그들의 안쓰러운 상황이 매우 짙게 묻어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는 비단 버스안내양뿐만 아니라 수많은 여공들의 수기에서도 비슷하게 드러나면서 당시의 노동은 곧 고되고 안타까운 것으로, 그래서 여공은 불쌍한 이들로 빠르게 대체시킬 수 있게 했다(그러나 이러한 수기의 내용과 다르게 당시 남성 노동자의 상당수는 어용 노조와 관계하고 있었으며, 실제 사측과 투쟁을 벌였던 것은 여성 노동자라는 점은 수기에서도, 그리고 현재에도 그리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이태원>은 이러한 시선을 뛰어넘으며 이곳에서 노동하던 일들은 이태원에서 자신의 삶을 개척한 것뿐이라는 간단한 표제를 남긴다. 그들은 남들이 ‘양갈보’라 구시렁대도 내가 아니면 당당하고, 분명 우리가 달러를 벌어들인 이들이라는 것을 잊지 않으며, 내가 상대한 이들의 나라에 단 하루라도 가보는 것이 꿈이었고, 그 꿈을 이뤘으니 전혀 후회가 없다는 분명한 삶의 지침을 가지고 있다. 그들이 이뤄온 것으로 하루하루 장을 보고, 지금보다 더 나은 삶을 설계하며 앞으로를 꿈꾸는 것. 이 모든 것은 그들이 생각하고 여태까지 해온 스스로의 노동으로 가능한 것이었다. 그들이 스스로를 피해자라 여기지 않는 상황에서 미리 그들의 삶을 예단하는 것은 과연 누구를 위한 일이었을까.

<이태원> 스틸컷

<이태원>은 그들이 쌓아온 삶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줌으로써, 과거의 노동에서 현재의 감정노동 그리고 국경을 넘어 착취의 구조를 만든 노동의 환경을 이야기했던 <위로공단>(2015)이나 곧 철거될 미군 기지촌을 중심으로 폐허가 된 마을과 이곳에서의 상처를 지닌 이들을 등장시켰던 <거미의 땅>(2016)을 넘어선다. 이 영화들이 보여준 성과 역시 분명했지만, 괄괄한 목소리를 쏟아낸 삼숙과 나키, 영화의 당당함은 오로지 <이태원>만의 것이었다. 과거를 살아온 이들에게 현재를 살아가는 이들이 보내는 감정들은 다양한 모양을 띠고 있을 테지만, 적어도 그들 스스로가 생각한 적 없는 의미까지 부여하며 함부로 아팠던 것이라 다독일 필요는 없을 것이다. 자신의 삶을 통해 ‘라이프 이즈 숏’ 이라는 모토를 찾고 하고 싶은 것을 모두 해봐야 한다는 삼숙의 선언에(언니, 멋져요!) 이태원과, 미군 기지와, 양갈보가 굳이 들어설 틈은 없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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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RZOOMER

2014 한국영화평론가협회 영평상 신인평론상 수상,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시네마 크리티크 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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