ZOOM IN

망설이지 말고, 페미니즘 돋보기

함부로 이야기를 만들어‘주지’ 말 것

송아름|영화평론가 / 2020-04-30


< ZOOM IN >에서는 여성 영화, 감독, 배우, 캐릭터 등을 퍼줌만의 새로운 시각으로 들여다보고 다양한 관점에서 이야기해보고자 합니다. 여러분들도 망설이지 말고, 페미니즘 돋보기!

<추격자> 스틸컷

시간을 내어 누군가를 마주하겠다는 결심을 하는 것은 대체로 이야기 때문이다. 상대가 힘들다는 낌새를 보였거나 아니면 그저 만나고 싶을 뿐이라는 생각이 들 때조차 우리는 상대가 내놓을 이야기를 우려하거나 기대하는 마음으로 그를 만난다. 절대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이라도 개인적으로 만나고 나면 어느 정도 화가 누그러들고 일정 부분은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 역시 그가 내가 모르는 이야기를 꺼내놓았기 때문일 것이다. 누군가의 이야기는 그런 것이다. 그가 내뱉은 한 마디에 분노할 수도 있지만,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행동 하나하나를 설명 가능한 것으로 전환 시키는 것이 이야기이기도 한 것이다. 이런 이유로 이야기를 가진다는 것은, 그리고 그 기회가 주어진다는 것은 사실 권력을 가지는 일과 다르지 않다. 

2000년대를 넘어 한국영화 대부분이 지긋지긋할 만큼 남성영화 중심으로 흘러갈 때(이 남성영화의 지루함에 대해서는 「‘셀프(Self) 피로’로 빚은 세계-2010년대 ‘남성영화’들의 논리에 대해」라는 글에서 이미 이야기한 바 있다), 이 영화들의 편향을 설명하기 위해 놓였던 벡델 테스트가 마코 모리 테스트로 한 발짝 더 나아갔던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었을 것이다. 여성의 등장을 넘어 여성이 중요한 서사를 가지고 있느냐의 문제로 옮겨간 것은 영화 속 여성이 중요한 인물로 격상되기 위해서는 이야기가 필요한 까닭이었다. 그러나 알다시피 누구를 죽이고 누구를 배신하고, 누군가를 희롱하는 이들에게까지도 당연하게 부여되었던 이야기는 그 반대편에 있는 이들에게 쉽게 주어지지 않았다. 설사 부여된다 해도 그것은 역시나 남성 서사의 강화를 위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정도였다.

<추격자> 스틸컷

가령 영화 <추격자>에 등장하는 미진(서영희)에게는 여타의 영화에서 성판매자로 등장하는 여성들과 다르게 이야기(사실 이야기라고까지는 할 수 없고 ‘설정’이 더 정확한 말일 것이다)가 주어진다. 미진은 홀로 딸을 키우고 있는, 또 그 딸을 꽤 똑똑하게 잘 키운 어머니라는 점이다. 그러나 이는 미진을 위한 것이 아니라 중호(김윤석)를 위한 것이다. 그가 미진 이전에 사라졌던 여성들과 다르게 끝까지 미진을 찾아야 하는 이유, 바로 그것이 미진이 어머니라는 설정이기 때문이다. 미진의 딸 은지(김유정)가 중호와 계속 함께 있어야 하는 이유 역시 여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내가 누군가의 어머니를 빼앗을지도 모른다는 공포, 그리고 이렇게 아이를 혼자서도 잘 키운 한 여성을 구해내야 한다는 책임감. 중호가 그를 구해야 하는 이유에는 ‘김미진’이라는 여성만을 위한 이유는 존재하지 않는다.

게다가 미진을 구하겠다는 명목으로 동분서주하는 중호의 모습은 그가 원래 포주였으며 나가지 않겠다는 미진을 협박에 가까운 이유로 일하게 했다는 사실을 말끔하게 지운다. 중호가 은지를 데리고 다니며 측은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밥을 사 먹이고, 아이를 잘 지키지 못했다며 후배에게 호통 치는 모습들은 아이에게 다정한 중년의 남성이라는 이미지를 쉽게 만들어준다. 이렇게 켜켜이 이야기를 쌓아가면서 결국 중호가 부패 경찰로 잘렸으며, 그 뒤 선택한 것이 포주였고, 원래 자신의 상품이었던 여성들이 팔려갔다고 생각해 지영민(하정우)을 잡으려 했다는 명백한 사실을 뒤집는다. <추격자>를 보며 중호를 응원하게 만드는 것은 결국 중호를 둘러싼 이야기의 힘이다. 그러나 이처럼 이야기를 통해 남성 가해자에 대한 적극적인 의미화와 그것으로 쉽게 가해를 가리는 방식을 굳이 <추격자>까지 거슬러 올라가 찾을 필요는 없다. 담론과 언론이 남성 가해자의 서사를 만드는 것은 현재에도, 어이없다고 생각될 만큼 적극적으로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추격자> 스틸컷

모든 행위에 ‘이해’라는 말 자체를 떠올릴 수도 없는 N번방 사건을 둘러싸고 넘쳐나는 수많은 이야기들은 정확히 이 지점에 있다. 초반 사건의 피의자가 얼마나 극악무도한 짓을 했는지를 경쟁하듯 쏟아 내놓던 이들의 보도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슬슬 이름이 공개된 그에게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의 이야기를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그것이 어떠한 결과를 가져올지에 대해서는 생각도 하지 않은 듯 보이는 무수한 보도들은 그에게 굳이, 기회를 만들어주고 있었다. 최근 한 보도 프로그램이 피의자의 정체를 밝히겠다는 부제 아래 송출시킨 회차는 바로 여기에 정점을 찍었다.

피의자가 어떤 성향의 사람인지, 무엇에 집착했는지, 집안의 환경은 어땠는지, 무슨 수술을 받았고 그 이유는 어떻게 추측할 수 있는지, 그가 써온 글의 내용은 무엇이었는지 등을 세세히 나열한 그 방송은 이 피의자를 너무도 고루하고 뻔한 그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만들어 놓았다. 어디서 무슨 공식이라도 만들어내는지 의심스러울 만큼 똑같은 그 이야기 덩어리들은 결국 하나로 귀결된다. 아버지에 대한 공포, 어머니에 대한 분노, 신체적인 콤플렉스, 여성에 대한 열등감. 그리고 결국 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왜곡된 성 의식을 가진, 그러니까 범죄에 대한 이해할 만한 이유를 가진 젊은 청년. 바로 이 경로를 타고 피의자는 신체적으로 완벽한 남성들‘만’을 원하는 여성들로 인해, 자신을 ‘지켜줬어야’하는 엄마의 직무유기로 험한 일을 저지른 안타까운 청년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질문들은 자신에게 폭력적인 것은 아버지인데도 왜 어머니한테 그 화살을 돌렸는지, 자신에 키에 대해 크게 신경 쓰지 않고 살아가고 있는 사람이 훨씬 많은데도 왜 과도하게 그러한 콤플렉스를 갖고 있었는지와 같이 그가 왜곡된 인식을 가졌던 것에 대한 그의 책임을 완벽하게 소거한다. 더군다나 그의 모든 동인은 돈에 있다는 점이 뻔히 밝혀졌음에도 굳이 그에게 부여하는 이 서사는 이 사회가 성폭력의 문제를 어떠한 프레임으로 가두어 단순화하려는지를 너무도 명백하게 보여줬다. 돈을 벌기 위한 행위가 어디까지 극악무도해지는지, 그것은 무엇을 무시하고 또 추동함으로써 가능한 것인지를 따지는 것과 상관없이 이해할 수도 있는 가해의 영역을 만든다는 것, 사실 너무도 오랫동안 이어져 온 일이다.   

<추격자> 스틸컷

그렇다면 피해자의 이야기는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가? 피의자의 서사를 만들 공력으로 피해자의 서사를 넓히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일인가? 피해자의 이야기를 만든다는 것이 피해자가 직접 나서라거나 그들이 어떤 식으로 피해를 입었는지를 자세히 나열하라는 것이 아니다. 피해자를 보호한다는 명목 아래 여태까지 언론이 해온 것은 피해자의 박제화이다. 피해자는 ‘이렇게 끔찍한 피해를 입었다’라는 서사 밖으로 나가지 못한다. 특히 성폭력 피해자는 더더욱 이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며 어리면 어린대로, 돈을 벌면 돈을 번대로 그들의 피해는 선택에 따른 대가로 치부하게 만든다. 즉 피해자들은 ‘미성년자’, ‘돈이 필요했던 여성’들과 같이 뭉뚱그리면서 생각이 짧고, 돈이라면 어떤 것이라도 할, 그러게 왜 그런 제안을 수락했느냐는 말에 부딪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쉽게 피해자를 위치 짓기 전, 이 미성년자들이 애초에 필터링 되지 않은 메시지를 너무 쉽게 받는 것은 아닌지, 이들이 다른 이의 도움을 구할 생각을 하지 못한 이유는 무엇인지, 많은 이들이 기피하는 방법으로 돈을 벌려 했던 이유는 무엇인지, 수백에 달하는 이들이 자신의 피해를 알고 있으면서도 아무도 신고하지 않는 것에 얼마나 절망했는지 등의 질문이나, 가해자에게 했던 것처럼 기를 쓰고 이해하려는 그 태도를 왜 피해자에게는 적용하지 않는지 모를 일이다. 왜 그 시간을 견뎠는지, 혹은 왜 신고하지 않았는지와 같이 피해자가 피해를 누적해갔다는 식의 질문은 어떻게 범죄가 그 긴 기간 이루어질 수 있었는지, 어떻게 신고할 수 없게 만들었는지와 같이 피해자를 이해하는 질문으로 바꾸어가야 할 테지만, 왜 그 특혜를 피의자가 누리고 있는 것일까.

이렇게 만들어진 피의자의 서사에 누군가는 안타까워할 수도, 누군가는 비난을 퍼부을 수도 있다. 또 비난이 훨씬 더 많은 비중을 차지할 테니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의견이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수많은 사람들의 삶을 빼앗은 이가 이야기를 부여받음으로써 연민을 받을 수도 있는 기회를 단 한 번이라도 가질 기회 자체를 얻었다는 점이다. 이야기는 이렇게 권력이 된다. 도무지 이해해서도 안 되는 일조차 이야기는 이해를 만들어주지 않던가. 그 이야기를 지금 우리는 제대로 방향으로 풀어가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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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RZOOMER

2014 한국영화평론가협회 영평상 신인평론상 수상,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시네마 크리티크 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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