ZOOM IN

망설이지 말고, 페미니즘 돋보기

수난 여성-자기화 전략-장르 결탁을 둘러싼 단상

정지혜|영화평론가 / 2020-04-16


< ZOOM IN >에서는 여성 영화, 감독, 배우, 캐릭터 등을 퍼줌만의 새로운 시각으로 들여다보고 다양한 관점에서 이야기해보고자 합니다. 여러분들도 망설이지 말고, 페미니즘 돋보기!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 스틸컷

0.
‘여성 수난사’라는 말이 머릿속에서 맴돈다. 그것을 둘러싼 산발적인 생각을 짧게라도 정리해두고 싶다. 극악무도하고 잔혹하기 이를 데 없는 세상사까지 끌고 오지 않더라도 영화사에서 수난의 대상은 말도 안 되게 많은 경우 여성들의 몫이었다. 오죽하면 ‘여성 수난극’이라는 말이 극적 구분의 용어로, 서사와 인물을 설명하는 말로 통용되기까지 할까. ‘여성 수난극’은 들어봤어도 ‘남성 수난극’은 들어본 적 없다. 근래 나카시마 테츠야의 영화를 살펴볼 일이 있어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2006)을 다시 보면서도 그런 생각이 들었다.

‘혐오스런 마츠코’라 불리던 마츠코(나카타니 미키)의 이야기는 마츠코가 죽고 나서야 비로소 시작되는데 그녀의 일생이란 이런 것이다. 마츠코, 그녀는 뜻하지 않은 오해로 다니던 직장을 잃고 믿었던 사랑에 보기 좋게 배신당했으며 자신을 버린 남자 때문에 살인까지 저지르는 그야말로 억세게 운 없는 비극의 주인공이다. 그것도 모자라 자신을 삽시간에 수렁에 빠뜨린 남자를 운명적 사랑이라 생각하는 밑도 끝도 없는 ‘로맨티스트’이기도 하다. 조금만 떨어져서 보면, 마츠코만큼 어리석은 여자가 있을까 싶기도 하지만, 그는 특유의 천진함인지 강인함인지 모를 기질과 성정으로 죽을 고비를 수없이 넘으며 꿋꿋하게 다시 일어나 계속되는 인생의 비수를 순정으로 맞받아쳐 낸다.

자신의 생을 끈질기게 살아낸 한 여자의 일생 앞에서 비록 그녀의 삶의 동력에 완벽하게 동의하기 어렵다 해도 그것을 섣불리 부정하거나 비극적이라고 말하기에는 언제나 조심스럽다. 수난을 이고 지고 온 여자의 삶에 주석을 달기에는 해석은 늘 뒤늦다.

<부부의 세계> ©JTBC

1.
근래 JTBC 드라마 <부부의 세계>(2020)를 보면서는 수난 속 여성이 취하는 전략이라는 것을 생각해보게 된다. 겉보기에는 남부럽지 않게 사는 듯한 선우(김희애)라는 여자를 두고 드라마는 시작부터 사이코 드라마적 기운을 풀풀 풍기며 가족, 커뮤니티 스릴러물로 변모해간다. 남자의 배신과 여자의 복수는 계속되고, 불신 때문인지 그 불신을 시작으로 한 각자의 필요 때문인지 모를 모종의 거래가 시시각각 주객을 바꿔가며 이어진다. 이건 비단 서사의 주인공인 선우에게만 해당하는 건 아닌 것 같다. 다른 여성 캐릭터들에게도 적용되는 이야기다. 내가 선택한 남자는 적어도 다른 남자들보다는 나을 것이라는 기대를 품고 살아왔거나 설혹 그 기대가 자기기망이라 할지라도 될 수 있고 또 할 수만 있다면 실낱같은 기망의 끈을 놓고 싶지 않은 그 간당간당한 순간에 서 있는 여자들이다.

자기 욕망, 자기 확신, 자기 최면이라는 ‘자기-주체’의 변형된 형태로 말해지곤 하지만 이것은 부인할 수 없는, 지긋지긋하고 무시무시한 여성 수난사의 구조적 역사와 맞물려 있다. 얄궂은 기대와 기망은 언제고 깨져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 그리하여 <부부의 세계>는 (적어도 6회까지 진행된 현재까지) 붕괴의 길로 내달린다. 이성애 중심의 가족/연애 관계의 보존에 얼마간 기대거나 그 관계가 유지되는데 나름의 방식으로 헌신했거나 기만당했던 여성들은 무언가를 바꿔내고 싶어 한다. 배신, 복수, 거래. 그 무엇이 됐든 자기 욕망의 무기로 취할 수 있는 것이라면 마다하지 않을 기세의 여자들은 외부의 세계와 자기 내부의 세계와 길항하며 게임의 판을 새로 짜려는 듯하다.

<부부의 세계> ©JTBC

이때 <부부의 세계>가 장르적 긴장감을 적극적으로 들여온다는 지점을 눈여겨 보고 싶다. 이를테면 앞서 말한 사이코드라마 같은 것이다. 선우의 불안한 심리가 카메라 포커스의 산란 효과로 표현되는 건 아주 직접적인 경우다. 자신과 가족을 기만하고 다경(한소희)과 만난 남편 태오(박해준)를 죽이고 싶은 마음으로 이태오의 가슴팍에 가위를 꽂는 선우의 망상 신도 대표적이다. 선우의 불안은 거슬러 가면 트라우마의 문제와 이어진다. 자기 아버지의 배신, (아마도) 아버지를 향한 엄마의 복수, 부모의 죽음이 서로 무관하지 않고 깊이 연동돼 있을 것이라는 자기 확신, 과거가 지금 자신의 처지와 크게 다르지 않으며 과거 재현이 실행 중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이성애 부부 세계의 파국의 대물림 같은 것이다.

여기에 더해 스릴러 장르도 있다. 태오로부터 아들 준영(전진서)을 지키려는 선우는 준영이 자기 뜻에 따르려 하지 않자 운전 중에 준영과 위태로운 몸싸움을 벌이고, 아버지와 이혼하지 말아 달라는 아들의 호소에 격분한다. 드라마는 이때 선우의 힘에 밀려 준영이 물에 빠질 것처럼 처리한다. 바로 다음 장면에서 태오는 선우가 아들을 죽인 게 아닌지 오인하고 선우에게 폭력을 행사하며 그 순간을 선우는 역이용하듯 굴며 자신이 원하는 바에 이른다. 심리극과 스릴러적 트릭이 죽음마저 불사할 듯한 선우의 상태를 드러내고 그녀의 소원 성취의 방편이 돼준다.1) 

<부부의 세계> ©JTBC

덧붙여 선우는 새로운 판을 짜기 위해서라면 남편의 친구 제혁(김영민)과의 하룻밤도 해치운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그녀의 이 전략은 예림(박선영)-제혁 부부의 세계를 헤집는 데도 서슴이 없다. 선우가 보기에 예림을 포함해 태오의 변심을 알면서 모르는 척하며 자기를 속인 주변 이들 모두 자신의 비극에 일조한 암묵적 동조자에 불과하다. 선우의 울분은 태오만을 향해 있는 게 아니라 기존의 신뢰 세계를 역으로 이용하거나 방관한 위선자들 모두에게 가 있다. <부부의 세계>의 여성들은 윤리나 당위에 호소하는 게 아니다. 관계와 심리 동학의 주도권을 쥐기 위해 남성뿐 아니라 다른 여성을 이용하거나 그녀들과 협력하고 또 협상한다. 그간 많은 서사에서 일종의 판짜기를 기획하고 설계했던 이들 대부분이 남성들이었다는 걸 상기한다면 여성들의 판 만들기는 그 자체로 얼마간 흥미로운 긴장을 불러올 것이다.  

<모번 켈러의 여행> 스틸컷

3.
린 램지의 <모번 켈러의 여행>(2002)도 떠오르는 것이다. 이 지면을 통해서도 이미지의 시정(詩情)이라는 측면에서 린 램지의 영화에 관해 쓴 적이 있었고 종종 그의 영화를 두고 말할 기회가 있었는데 그럴 때마다 유독 마음이 가는 영화가 <모번 켈러의 여행>이었다. 묘하게 엉성한데 또 기묘하게 이어지는 이 영화의 미스터리함, 설명되기를 거부하고 해석되길 원치 않는 모번 켈러(사만다 모튼)라는 여자의 심리를 두고 린 램지의 이미지 미학이라고 말하는 것으로는 어딘가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영화는 시작부터 난감하다. 모번은 꼼짝 않고 누워 있는 애인 옆에 모로 누워 그의 몸에 닿을 듯 말 듯 제 손을 가져가본다.2)

붉은색 매니큐어가 칠해져 있는 모번의 손톱, 크리스마스트리에 휘감겨 있는 원색의 전구에서 발산하는 빛, 남자의 몸의 윤곽선을 그리는 듯한 모번의 손짓이 에로틱한 정조로 감지된다. 하지만 남자는 이미 죽었고, 온기 없는 시체일 뿐이다. 모번 앞으로 그는 유서를 남겼다. 모번을 위해 썼다는 소설을 출판사에 보내달라 했고 용기를 내라 했다. 시신을 며칠간 방치한 모번은 이제 결단을 내리려 한다. 원고의 글쓴이 ‘제임스 길레스피’를 지우고 자신의 이름 ‘모번 켈러’를 써넣고 ‘모번 켈러’의 소설을 출판사에 보내는 것이다.

<모번 켈러의 여행> 포스터

제임스 길레스피, 그 이름을 기억한다. 린 램지의 장편 데뷔작 <쥐잡이>(1999)의 주인공 제임스 길레스피. 제임스는 이미 <쥐잡이>에서부터 죽음과도 같은 상태에 빠져 있지 않았던가. <모번 켈러의 여행>에서 제임스는 완벽하게 세상에서 지워지고 그 자리에 모번 켈러가 들어온다. 모번은 우리를 또 한 번 곤혹스럽게 하는 선택을 해보일 것이다. 죽은 애인의 시체를 훼손해 매장하기. 그런데 더 놀라운 건 이 일련의 의식을 치르는 모번은 슬픔과 비탄의 기색을 내비치기보다는 이 기행의 적극적인 수행자로서 자족한다는 인상을 짙게 보여준다는 것이다.

심지어 그녀는 속박 상태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영혼이라도 된 듯 산 정상을 뛰어다니고 자연의 생명력을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며 그것을 온몸으로 느낀다. 린 램지의 영화 세계에 줄기차게 어른대는 적극적 자기 살인의 징후, 죽음 충동이 이때만큼 분방하고 흥겹게 그려진 적이 있었던가. 죽은 자와 산 자, 남성과 여성의 이름 바꾸기라는 설정을 통해 영화가 기대하는 효과야 어느 정도 예상이 되지만 죽은 자를 또 한 번 죽여야 할 이유는 정확하게 설명되거나 발설되지 않는 채 진행된다.

<모번 켈러의 여행> 스틸컷

죽은 자와 산 자(모번 자신) 모두를 위한 나름의 예식을 마친 모번은 길을 떠난다. 애인이 장례비용으로 써달라고 남긴 돈이 그녀의 여행 경비가 돼줬을 것이다. 이 여정은 일상에서 벗어난 즐거운 휴가처럼 보이다가도 불현듯 모번의 거대한 백일몽처럼 느껴질 정도로 전혀 다른 풍광과 분위기, 장소로의 이동으로 이어진다. 심지어 길 위에서 만난 낯선 이들에게 모번은 자신을 ‘재키’라고 소개하기까지 한다. 모번이 원한다면 이름은 언제든 다르게 불릴 수 있다. 그에게도 목적과 이유라는 게 있다면, 그건 “정말 아름다운 곳으로” 가는 일뿐인 것 같다. 어쩌면 이것은 거대한 착란과도 같은 모번의 꿈일까. 영화 속 원초적 에너지는 생기와 활기의 순간이라기보다는 (어쩌면 죽음과도 같은) 무위의 상태에 가까운 건 아닐까. 떠남으로써 비로소 모번은 완벽히 혼자가 되는가, 혼자로서 완벽해지가. 남자의 죽음이라는 사건을 자기화의 적극적인 계기로 삼은 모번은 그렇게 정서적, 물적 노마드 상태가 돼 ‘아름다운 세계’로 간다. <모번 켈러의 여행>은 모번의 정신적 로드무비에 가까워 보이는 것이다. 

4.
여성 수난과 고난 속 여성이 취하는 전략에 관해 생각하다가 여기까지 와버렸다. 여성 서사가 장르와 만나 기존의 성 역할을 ‘자기-주체’로서 적극적으로 껴안아버리거나, 기존의 것을 뒤바꿔놓거나, 전복을 시도할 때 그를 둘러싼 평가는 첨예하게 엇갈릴 것이다. 바로 그곳에서 여성 서사의 상상력은 소용돌이치고 꿈틀댄다. 비평이 더 격렬하게 맞붙어야 할 지점 역시 바로 이곳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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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에 관해서는 『지극히 문학적인 취향: 한국문학의 정상성을 묻다』(오혜진, 오월의 봄, 2019)의 ‘‘즐거운 살인’과 ‘여성스릴러’의 정치적 가능성’이 흥미로운 텍스트가 돼줬다. 영화에 있어서도 ‘급진적 여성서사를 가능케 할 유력한 양식으로 선호되고 있는 여성스릴러의 임계’(같은 책, p.282)의 문제는 중요하며 이를 위해서는 서사나 인물의 매혹에 편승하거나 압도되지 않는 영화 형식에 관한 세밀한 분석이 필요해 보인다.

2) 모번의 손과 그 너머의 세계 사이의 아득한 거리감을 표현하는 듯한 장면은 이후에도 몇 차례 더 등장한다. 모번이 마주한 실제 세계 혹은 소망하는 세계는 접촉하기에는 너무 멀거나 모호해 보인다. 대신 모번의 손에 닿을 수 있는 건 이를테면 흙, 물, 손등 위로 기어오르는 개미처럼 지극히 구체적인 물성의 원시적 자연 상태의 것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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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디다큐페스티발 집행위원, 영화웹진 리버스 필진, 2018 부산국제영화제 한국단편 예심 진행, 공저 『아가씨 아카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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