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영화를 읽다

소녀가 어른이 되기까지

날 것(raw) 그대로의 피 튀기는 성장기

홍재희|영화감독 / 2019-12-16


<로우>(Raw) 
줄리아 듀코나우|2017|스릴러, 공포|프랑스|99분|청소년 관람불가

<로우> 스틸컷

이 지면을 빌어 한 가지 고백할 게 있다. 나는 공포영화광이다. 처음 영화에 입문하게 된 것도 어릴 적 극장에서 본 공포영화를 통해서였다. 원체험이 워낙 강렬해서인지 그 때문에 지금까지도 공포영화를 그토록 좋아하는지 모르겠다. 호러라면 완성도를 불문하고 일단 닥치고 본다. 하도 많이 봐서 그런지 웬만한 영화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정도다. 오금이 저리게 무섭거나 정신이 번쩍 들게 하는 공포영화에는 머리를 조아려 경배하지만 두려움이 1도 없는 시시한 망작에는 침을 튀기고 욕을 해대면서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일명 ‘호러 마니아’다. 

2018년 할리우드의 호러 명가로 불리는 ‘블룸하우스’의 수장 제이슨 블룸이 이런 망언을 한 적이 있다. “여성 감독들과 작업을 하려고 하지만, 공포영화를 연출할 여성 감독이 없다”고. 그러자 제이슨 블룸의 발언에 단단히 화가 난 여성들이 그에게 공포영화를 연출한 여성 감독 목록을 보내는 일까지 벌어졌다. 사건은 제이슨 블룸이 실언했다고 사과하는 글을 SNS에 올리면서 일단락됐다. 

그렇다면 한국 영화계라고 다를까? ‘여성 감독이 공포영화라고? 에이, 여자가? 말도 안 돼. 여자들은 호러 싫어하잖아!’ 

여자라고 해서 전부 공포영화를 싫어하는 것도 아니고 여성 감독의 연출력이 모자란 것도 아닌데 이 같은 고정관념은 여자가 주인공인 공포영화조차 여성이 아니라 남성 감독이 연출하는 것을 당연시한다. 아아, 정말 짜증이 머리 꼭대기까지 솟구친다. 분노 게이지가 급상승할 때, 스트레스를 풀고 싶을 때 나는 공포영화를 시청한다. 내면에 잠재된 분노와 억압된 폭력 충동, 한마디로 울화통이 터져 욕지기가 날 때 이를 승화시키는 데 역시 호러만한 것이 없다고 고개를 끄덕이면서. 

공포영화는 언제나 인간성의 어두운 심연 그리고 이 사회의 모순과 부조리를 우회적으로 배설하는 하위 장르의 역할을 충실히 해왔다. 특히 남성과 여성이 재현되는 방식을 보면 공포영화에서야말로 여성을 타자화하며 분열하는 남성들의 무의식이 가장 적나라하게 표출된다고 볼 수 있다. 남성은 위기에 빠진 여성을 구하는 영웅이지만 여성은 언제나 피해자나 희생자 또는 시체로 등장한다. 남성이 능동적 살인자일 때조차 여성은 목소리를 잃은 귀신 들린 존재이거나 미친 악녀 또는 마녀로 표현된다. 결국 여성은 영화 내내 비명만 지르다 남성의 손에 죽는 도구 또는 보조물에 지나지 않는다. 여성 관객들이 호러 장르를 좋아하지 않는 이유에는 사지 절단과 피범벅인 난도질 영화에 대한 생리적 불쾌감뿐만 아니라 여성을 대상물로 표현하는 성차별적 시선에 대한 불편함도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로우> 스틸컷

그러나 2017년 작 <로우>(줄리아 듀코나우)는 공포영화에 대한 기존의 선입견과 성별 고정관념을 가차 없이 내던져 버린다. 무엇보다 여성 감독이 연출한, 여성이 주인공인, 여성의 욕망을 다룬 영화이자 ‘공포’라는 장르를 변주해 인간의 모순적인 욕망과 가부장제 사회의 폭력과 부조리를 파헤친다. <로우>는 겉으로는 채식주의자가 식인 본능을 깨닫는 카니발리즘(인간이 인육을 상징적 식품 또는 보통의 식품으로 먹는 풍습)이 소재다. 뭐라고? 벌써 으악! 소리가 나올 수도 있겠다. 하지만 다르게 생각한다면 <로우>는 호러물의 외피를 쓴 여성의 성장영화라고도 볼 수 있다.

엄격한 부모의 교육 때문에 평생 채식을 하며 자란 쥐스틴(가렌스 마릴러)은 대학 신입생 환영회에서 언니 알렉스(엘라 룸프) 때문에 토끼 콩팥을 강제로 먹는 폭력적인 신고식을 치른다. 사건 이후 쥐스틴은 고기, 심지어 인육을 먹고 싶다는 강렬한 충동을 느끼고 자신에게 식인 본능이 있음을 알게 된다. 

<로우>에서 폭력은 특이하게도 인육을 먹는 행위로 재현된다. 관객들은 먼저 이 영화가 ‘인육을 먹으면 안 된다’는 사회적 금기를 간단히 파괴하는 데서 충격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카니발리즘이 주는 가공할 공포는 실상 판타지에 가깝다. 오히려 ‘식인’은 쥐스틴이 다니는 수의학과에서 벌어지는 온갖 평범한 ‘폭력’과 대비된다. 어쩌면 영화 속의 대학교라는 공간은 가부장제 남성 중심 사회의 명백한 은유다. 대학에서 여성과 성소수자는 ‘열등한 존재’로 취급되고, 군대식 복종에 따르도록 강요받는다. 영화에서 묘사하는 신입생 환영회가 폭탄주를 억지로 마시게 하며 얼차려 군기를 잡는 한국 대학교의 그것과 어찌나 비슷한지 오싹한 기시감이 들 정도다.

애초에 성별과 젠더, 위계로 차별하는 권력 관계에서 ‘어린’ ‘여자’ ‘신입생’의 의사 따위는 존중되지 않는다. 대학 문화로 표상되는 ‘남성’ ‘선배’ ‘가부장제 권력’은 신입생들을 위협하고 성희롱을 장난 또는 농담으로 여기며, 여자 학생들을 성적으로 대상화하고 성관계를 폭력적으로 강요한다. 남성이 여성을 바라보는 시선은 한마디로 포식자의 그것이다. 남성의 시선에 포획된 여성은 동등한 인격을 지닌 주체적인 사람이 아니라 그저 사냥감, 먹잇감이다. 남성들이 여성을 ‘김치녀’ ‘된장녀’ ‘스시녀’ 등 먹을거리로 명명하는 현실을 떠올려 보라.


<로우> 스틸컷

학교 안팎의 세상에서 쥐스틴과 언니 알렉스는 젊은/여성/채식주의자라는 표상 자체로서도 이미 약자이자 소수자다. 그런데 여성이라는 약자의 위치에 놓인 쥐스틴 자매는 가부장제 사회에서 많은 여성들이 선택하는 생존 방식을 전면적으로 거부한다. 자매는 남성들의 폭력에 미소로 순응하고 침묵하는 대신 그들의 인육을 먹는 것으로 저항한다. <로우>에서는 남성들에게 성적인 ‘몸뚱이’로만 소비되는 젊은 여성이 전복적으로 남성의 ‘몸’을 먹어치우고 남성 대신 포식자의 자리를 차지한다. 

파란 페인트를 뒤집어쓴 쥐스틴이 강제로 성관계를 시도하던 남자의 입술을 물어뜯을 때 불현듯 공포영화의 고전인 <캐리>(브라이언 드 팔마, 1976)가 떠올랐다. 그러나 봉건적이고 억압적인 순결 교육을 받고 자란 캐리는 성적 무지로 학우들에게 놀림을 당하다 돼지 피를 뒤집어쓴 채 공포로 울부짖는 데 반해 쥐스틴은 페인트를 씻어내며 자신이 물어뜯은 남자의 입술 조각을 지그시 음미하듯 먹는다. 쥐스틴의 인육에 대한 욕망은 성적 욕망의 다른 이름이다. 성욕은커녕 월경이 뭔지도 몰랐던 70년대 ‘봉건 소녀’ 캐리는 40여 년의 세월이 흐른 21세기에 이르러 드디어 자신의 욕망에 능동적으로 반응하는 쥐스틴이 된 것이다. 물론 쥐스틴이 욕망했다고 해서 쥐스틴에게 성관계를 강요한 남성들의 행동이 집단 성폭력이라는 사실은 전혀 달라지지 않는다. 하지만 쥐스틴을 먹잇감처럼 던져놓고 재밌어하던 가해자들이 공포에 질려 외마디 비명을 지를 때, 쥐스틴을 성폭행하려던 남성이 오히려 그에게 (문자 그대로) 물어 뜯겨 ‘먹잇감’이 될 때는 솔직히 속이 시원하고 통쾌하기까지 했다. 

<로우>는 주인공인 쥐스틴의 몸, 즉 여성의 몸을 ‘대상화’하고 ‘소비’하기를 단호히 거부한다. 영화 속에서 흔히 여성의 몸은 대상화되고 훼손된다. 하지만 <로우>에서 여성의 몸은 남성의 시선으로 바라본 성적인 육체가 아니라 그저 쥐스틴 개인의 몸, 자신의 몸이다. 부스럼이 난 지저분한 피부, 털이 듬성듬성한, 인간 그 자체, 날 것(raw)인 몸이다. 반면 남성인 아드리안(라바 내 우펠라)의 몸은 철저히 여성인 쥐스틴의 시선으로 그려진다. 기존의 영화에서 늘 남성에게 성적 욕망의 대상으로만 그려진 여성은 <로우>에서는 성적 주체로서 남성을, 남성의 몸을 욕망한다. 쥐스틴이 처음 성적 욕구를 느낀 대상인 아드리안은 전형적인 가부장적 마초 남성이 아니라는 점에서 여성이 원하는 남성상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준다. 

그러나 쥐스틴(여성)을 억압하지 않으면서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닌 유일한 남성이자 친구인 아드리안은 아이러니하게도 언니 알렉스에게 뜯어 먹혀 죽는다. 누군가는 ‘아드리안을 굳이 죽여야만 했는가여성이 폭력으로 대응해야만 했는가’라고 반문할 수도 있다. 그런데 알렉스는 쥐스틴보다 먼저 폭력적인 남성 문화를 겪은 피해자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폭력을 재생산하는 가해자이기도 하다. 만약 영화 <로우>의 폭력적이고 전복적인 여성상이 불편하게 느껴진다면 그 이유는 이 같은 여성이 낯설고 익숙하지 않아서일 것이다. 쥐스틴 자매는 가부장제 사회가 여성에게 강요하는 여자다움, 즉 ‘여성은 분노하거나 공격적이면 안 되고 폭력적이면 안 된다. 여자는 착하고 순종적이어야 한다’라는 여성상을 때려 부수기 때문이다.


<로우> 스틸컷 

남성들의 신화와 판타지에서 얼마나 많은 여성들이 가부장제의 인신 공양과 남성들의 희생제물이 되어 죽어갔는지를 떠올려 보라. 영화 속에서 이름조차 주어지지 않은 채 토막 난 시체로 던져지거나 목소리 없는 아무개로 등장했다가 흔적 없이 사라진 여성 캐릭터들, 남성의 성장을 돕고 남성들끼리의 연대를 강화하고자 성적으로 이용당하고 거래되고 교환되며 버려지는 수많은 여성들을 그동안 우리가 너무도 당연하게 여긴 것은 아닐까. 이 사회가 주입하는 성별 고정관념에 우리가 너무 길들여진 것은 아닌지 자문해볼 필요가 있다. 

착하고 순종적으로, 무지한 상태로 순결한 척하며 살 수는 있다. 모른 체 외면하거나 무시하거나 억누를 수도 있다. 하지만 결국 억압된 것은 반드시 귀환한다. <로우>는 여성들이 ‘여자-되기’라는 가면을 쓰기보다 자신의 날 것의 감정과 충동과 욕망을 직시해야 한다는 것을 이야기한다. 소녀가 ‘어른’이 된다는 것은 ‘여자’로 만들어진다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나다울 수 있는 ‘자유’를 향해 나아간다는 뜻이다. 진정한 ‘성장’은 부모의 훈육에서 벗어나 그야말로 거칠고 피 튀기는 날 것의 세상에 홀로 내던져졌을 때부터 시작된다. 알렉스는 쥐스틴에게 자신을 따르기를 강요하지만 쥐스틴은 언니와 다른 길을, 그 누구도 가지 않는 길을 선택한다. 식인이라는 비밀을 공유한 자매를 이해하며,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받아들이고,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게 되면서 주체적 ‘인간’으로서 ‘성장’에 이르는 첫걸음을 내딛는 것이다. 

장편 데뷔작으로 호러를 선택한 줄리아 듀코나우 감독. 살벌하게 아름답고 기괴하며 무서운데 자꾸만 빠져드는 공포. 나도 그런 공포영화를 만들어보고 싶다. 덤으로 하나 더. 공포영화를 보면 다이어트에 도움이 된다. 공포영화를 관람하면 몸이 긴장한다. 긴장하면 우리 몸은 심박 수가 높아지면서 아드레날린을 더 힘차게 분비한다. 아드레날린은 신진대사 상승과 식욕 감퇴 효과가 있다는 사실. 믿거나 말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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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이메일> <암사자(들)> 등 연출, 『그건 혐오예요』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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