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영화를 읽다

집착에서 벗어나기

<이별에 대처하는 자세>

장윤주|영화감독 / 2020-04-02


<이별에 대처하는 자세> 
디자이리 아카반|2014|코미디, 드라마, 멜로/로맨스|영국|86분

<이별에 대처하는 자세> 스틸컷

지하철을 타고 가는 여자. 울었거나 곧 울 것 같은 얼굴의 클로즈업. 여자친구와 이별하고 그 시간을 막 견디기 시작한 쉬린(데지레 아카반)의 얼굴이다. 뉴욕에 살고, 파티에서 술 마시고 춤추는 것을 잘하는 쉬린은 맥신(레베카 헨더슨)과 헤어졌다. 쉬린은 할머니 집에서 종일 디즈니 영화를 보며 시간을 보낸다고 자신을 소개하는 이란계 미국인이며 바이섹슈얼(양성애자)이다. 

쉬린은 맥신과 헤어진 뒤 맥신의 질투를 유발하기 위해 다른 사람을 만나고 섹스한다. 데이트 앱에서 만난 남자와 자고, 맥신이 다니는 책 읽기 모임에 나가 강사에게 데이트를 신청한다. 하지만 맥신과의 행복했던 한때뿐만 아니라 맥신과 다퉜던 일들까지 마구 떠오를 뿐, 맥신을 잊지도 질투하게 만들지도 못한다. 

<이별에 대처하는 자세> 스틸컷

맥신과의 이별로 인한 감정들과 싸우기도 벅찬 쉬린이 맡은 일은 다섯 살 아이들에게 영화 만들기를 가르치는 것이다. 하지만 아이들은 신나게 뛰어놀고 사탕 그릇을 엎어뜨리며 쉬린의 노력을 물거품으로 만든다. 설상가상으로 맥신이 사귀기 시작한 여자친구는 히치콕의 <새>를 레퍼런스로 삼아 아이들에게 영화 만들기를 능수능란하게 가르치는, 풍성한 금발의 전직 헤어모델이자, 쉬린의 동료다. 쉬린은 과연 이별에 성공할 수 있을까? 

연인과의 이별로 인한 다양한 감정 기복에 놓인 그때, 쉬린이 고통 속에서도 숨통을 트일 수 있는 것은 이 영화가 보여주는 유머와 웃음 때문이다. 이별의 순간에도 쓰레기통에 버린 딜도를 다시 들고 당당하게 길을 걷는 쉬린. 그리고 자신을 객관화시켜서 보는 능력이 이별을 건너가는 힘이 된다. 

<이별에 대처하는 자세> 스틸컷

쉬린을 맡은 배우는 이 영화의 감독이기도 한 데지레 아카반이다. 그는 망가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책 읽기 모임 강사와 데이트를 하던 중 쉬린은 술을 마시다 실수로 흘려버리고, 술로 젖은 옷을 티슈로 닦은 뒤 데이트를 마친다. 그것을 촬영하고 있는, 즉 바라보고 있는 것은 감독이자 배우인 데지레 아카반인 것이다. 

쉬린은 침대에 누워서 울고만 있지 않는다. 끊임없이 행동한다. 사람을 만나는 것이건, 새 직장을 찾는 것이건, 친구와 속옷 가게에 가서 브래지어 하나를 두고 자존감을 논하는 일이건. 그리고 자신의 감정에 솔직하다. 쉬린은 말한다. ‘마음이 죽은 것 같아’ ‘헤어진 여자친구가 질투하게 만들고 싶어’ ‘저는 지금 심각하게 힘든 와중에 있어요. 여자친구와 헤어졌거든요’ ‘난 지금 만나는 저 남자가 싫어’. 이야기를 듣는 상대가 친구이건 막 이사한 집의 하우스 메이트건 면접관이건 상관하지 않는다. 심지어는 전 여자친구에게도 솔직한 마음을 토로해 버린다. 

<이별에 대처하는 자세> 스틸컷

데이트 앱으로 만난 남자와 자면서도 떠오르는 맥신을 구태여 막지 않는다. 그렇게 당당한 쉬린이 단 하나 솔직할 수 없는 사람은, 그의 가족이다. 쉬린의 가족은 이란 출신이고 부유한 집안이다. 오빠는 의사, 오빠의 여자친구도 의사다. 부모님은 쉬린과 맥신이 함께 사는 집을 방문하고 묻는다. “왜 침대가 하나밖에 없니?” 쉬린은 온갖 이야기를 가져다 대며 변명을 하고, 그 자리에 있던 맥신은 실망해 서운한 기색이 역력하다. 

쉬린과 맥신이 헤어질 때 나온 결정적인 이야기는 쉬린이 부모님에게 커밍아웃을 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쉬린은 부모님에게 커밍아웃을 할 수 있을까? 그런데 쉬린과 맥신이 한 침대를 쓰는 것을 본 쉬린의 부모는 과연 그들이 연인인 것을 정말로 모르고 있을까? 

<이별에 대처하는 자세> 스틸컷

영화에서 데지레 아카반이 그리는 뉴욕은 밝고 따뜻한 기운이 돈다. 오바마가 대통령이었던 그때. 바이섹슈얼 여성의 사랑과 이별 이야기가 태동할 수 있는 힘이 있었을 것이다. 

감독 데지레 아카반은 뉴욕에서 태어나 자랐다. 그는 이 이야기가 다큐멘터리는 아니라고 하지만 감독 스스로가 바이섹슈얼이고, 의사인 남자 형제를 두고 있다. 학창시절 학교에서는 가장 인기 없는 아이 중 하나로 꼽혔고 별명이 ‘비스트(beast)’였다고 한다. 졸업 후 영화학교에 진학해서 졸업작품으로 16mm 영화를 만들었지만 30여 개의 영화제에서 미끄러졌다. 

식욕이상항진증에 걸린 뒤 재활원에 들어가기도 했다. 데지레 아카반이 실제로 부모님에게 바이섹슈얼임을 커밍아웃했을 때 부모님은 말했다고 한다. “왜 모두를 불행하게 하는 선택을 해서 삶을 망치려고 하니?” 그 이후 데지레 아카반은 보란 듯이 레즈비언 웹시리즈 <슬로프>를 만들었고 첫 장편 <이별에 대처하는 자세>(2014)를 만들었다. 2018년에는 <미스에듀케이션 오브 카메론 포스트>(2018)를 만들어 선댄스영화제에서 미국 극영화 부문 심사위원대상을 수상했다. 그리고 현재 영국의 채널 4에서 <바이섹슈얼>이라는 시리즈를 제작 중이다. 

<이별에 대처하는 자세> 스틸컷

집착하는 캐릭터 그리고 결국 집착에서 벗어나는 캐릭터를 보는 것은 마치 정의가 승리하는 것을 보는 것과 같은 카타르시스를 준다. <하울의 움직이는 성>(미야자키 하야오, 2004)에서 황야의 마녀가 하울의 심장을 소피에게 내줄 때 나는 울었다. <해피투게더>(왕가위, 1997)에서 양조위가 이구아수 폭포 앞에 서 있을 때, 커다란 폭포가 천천히 소용돌이치는 장엄한 광경 속으로 그의 무지막지한 슬픔이 녹아들어 갈 때도 마찬가지였다. 

모든 것을 다 소진한 뒤 그들은 어떤 힘으로 아픈 사랑의 자리를, 집착을 벗어났던 것일까? 그것은 사람을 살게 하는 어떤 마법과도 같은 힘 아닐까? 어찌 되었든 힘이 되는 그 무언가가 오는 순간을 잡을 수 있기를. 그리하여 당신의 눈물이 다 흘러 아픔이 서늘해지고 상처에 바람이 통하게 되기를. 그것이 영화처럼 한순간에 녹지 않는다고 해도, 당신이 그 길에 있다면 당신을 위로할 영화들을 보며 울고 웃을 수 있는 그 찰나의 여유가 당신을 살리기를. 

집착하는 사람들은 사랑의 희생자가 아니다. 그들은 삶의 어떤 길목에 서 있는 것일 뿐이다. 몇 년 뒤 돌아보면, 당신이 겪은 모든 감정과 경험들은 당신을 향해 손을 흔들 것이다. 경험자들이 그렇게 말한다. 앞서 말한 영화 속 캐릭터들이 그것을 해내었다. 당신이 먼저 웃으며 손을 흔들 수도 있을 것이다. 당신에게 그 빛과 힘이 가 닿기를, 이미 거기에 있음을 알기를 바랄 뿐이다. 쉬린처럼, 당신의 방법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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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모> <크로스 유어 핑거스> 연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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