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영화를 읽다

나의 감각이 우리의 감각이 될 때까지

<빌로우 허>

장영선|영화감독 / 2020-04-02


<빌로우 허> 
에이프릴 뮬렌|2017|드라마|캐나다|91분
|청소년 관람불가

<빌로우 허> 스틸컷

영화가 시작되기 전, 블랙 화면에 몇 개의 크레딧이 뜰 때부터 두 사람의 숨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정확히 말하자면 두 여자가 섹스를 할 때 내는 거친 숨소리다. 밝아진 화면에는 인상적인 매력의 여자가 섹스를 하고 있고, 곧 그와 함께 있던 여자도 보인다. 이렇듯 이 영화는 시작점부터 스스로의 정체성을 숨기지 않는다. 여성과 여성 간의 섹스가 중요한 영화. 이것이 <빌로우 허>(에이프릴 뮬렌, 2016)의 정체성이다. 

주인공인 달라스(에리카 린더)는 지붕 공사 기술자로, 누구도 자신을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는 누구에게도 정착하지 못하며 누구와도 깊은 관계를 이어가지 못한다. 또 다른 주인공인 재스민(나탈리 크릴)은 6년 사귄 약혼자와 결혼을 앞두고 있지만 왠지 모를 공허와 외로움을 느끼는 인물이다. 두 사람은 첫 만남부터 서로에게 강렬한 끌림을 느낀다. 이들은 육체적 접촉을 통해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고 이내 섹스한다. 그 후 섹스하고 또 섹스하며 다시 섹스한다. 

<빌로우 허> 스틸컷

퀴어 영화에서의 섹스 장면은 이야기의 연결성과 별개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경우가 있다. 대중들은 섹스 장면이 없는 퀴어 영화 속 주인공들을 너무나도 쉽게 ‘친구’ 관계로 오인하고 따라서 그들 사이의 감정 또한 뜨거운 우정으로 판단하기 때문이다. 때때로 퀴어 영화 속 섹스 장면은 그들의 정체성을 확실하게 보여주는 장치이며, 영화가 퀴어 영화 이외의 다른 장르로 설명되기를 거부한다는 표식이기도 하다. <빌로우 허>가 여성 간의 섹스 장면이 많은 영화인 것도 그러한 이유 때문일까?

<빌로우 허>의 인물들은 세간의 퀴어 영화 속 주인공들이 거치고 넘어가는 갈등이나 문제를 비교적 덜 겪는 편이다. 달라스가 톰보이였던 어린 시절의 기억에 대해, 재스민이 중학교 때 키스했던 여자친구에 대해 이야기하긴 하지만 그 장면은 사회적인 문제에 봉착했던 각자의 고통을 토로한다기보다는 서로를 알아가는 대화에 더 가까워 보인다. 

<빌로우 허> 스틸컷

달라스는 다른 남성 기술자들과 함께 일하며 그들과 친구처럼 지낸다. 남성 기술자들은 달라스의 정체성이나 외형에 전혀 신경 쓰지 않으며, 그들의 관계는 일견 평등해 보인다. 재스민의 사정 또한 다르지 않다. 재스민의 남자친구는 재스민과 달라스가 섹스하는 모습을 목격했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의구심 없이, 재스민의 정체성을 쉽게 받아들인다. 그는 오히려 재스민이 달라스를 자신보다 더 많이 사랑할까 봐 불안해한다. 한마디로 이들의 세계에는 레즈비언의 존재가 이미 확실하며 그들은 평등한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기능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이제껏 퀴어 영화 속 주인공들은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존재하고 싶어하거나 존재 자체로 차별받는 모습이 등장하는 경우가 많았다는 것을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그들의 섹스 장면 또한 온전히 주인공들의 쾌락을 위해서인 경우는 드물었으며, 때로는 영화 장치와 표식으로 기능하기도 했다. 

그러나 <빌로우 허>는 사랑에 빠진 주인공들의 감정을 인간의 본능에 따른 육체적인 끌림과 쾌락을 중심으로, 즉 섹스를 통해 묘사하기 위해 여타의 퀴어 영화들과 다른 노선을 택한 것으로 보인다. 어떤 사람들은 <빌로우 허>의 스토리가 지나치게 단순하다고 지적하지만 나는 그 점이 오히려 장점이라고 생각한다. 스토리 대신 다른 것에 더 집중하게 만드는 연출 장치. 주변 인물들, 특히 남자들을 모두 생기 없이 묘사한 것 역시 그 장치 중 하나였을 것이며 주인공들의 정체성 고민이나 사회적 편견에 대한 갈등을 비교적 가볍게 묘사한 것도 같은 맥락이었을 것이다. 


<빌로우 허>의 감독인 에이프릴 뮬렌의 인터뷰에 따르면, 그는 이 영화를 통해 여성의 시선으로 여성의 사랑과 욕망, 친밀감, 섹스 그리고 이별을 표현해보고 싶었다고 한다. 그가 자신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 선택한 가장 대표적인 방법은 전 스태프를 여성으로 꾸리는 것이었다. 이는 단순히 여성들의 사랑 이야기를 다루는 현장의 편이를 위한 선택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감독은 이야기한다. 이제껏 매체를 통해 우리가 보아온 섹스에 대한 표현의 99퍼센트는 남자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었다고. 그는 감독인 본인뿐 아니라 모든 스태프들이 여성적인 시선으로 아이디어를 내고 여성들만의 힘으로 영화를 만들어야만 자신의 목표에 도달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듯하다.

결과적으로, 이 영화에서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섹스 신들은 이제껏 다른 영화들에서 보아온 섹스 신과는 조금 다른 느낌이다. 여성의 신체는 모두 드러났지만 대상화되지 않았고, 섹스 신은 길었으나 배우들이 피곤해 보이지 않았으며, 모든 섹스는 단 한 순간도 폭력적이지 않았다. 이를 뒤집어 말하면 이제껏 우리가 보아온 섹스 신들의 단점이 보인다. 여성은 언제나 대상화되었고, 긴 섹스 신은 배우와 관객 모두를 피곤하게 만들었으며, 폭력적인 장면이 쾌락으로 포장되어 일방적으로 스크린 위에 펼쳐졌다. 우리는 모두 오랜 시간 동안 그런 것들을 보고 자랐으며 또한 학습했다. 학습의 효과는 무서운 것이라 어쩌면 우리 중 누군가는 그 장면들을 통해 스스로의 욕구를 해석하고 믿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빌로우 허> 스틸컷

에이프릴 뮬렌 감독은 여성들의 솔직한 목소리와 욕구, 오르가즘을 가감 없이 표현하고 영화 안에 옮기려고 노력했다고 한다. 이는 <빌로우 허>라는 영화 제작을 넘어 새로운 여성 영화를 만들기 위한 결심이며, 그의 결심이 여성 스태프들과 함께 하는 작업이라는 물리적 방법을 통해 실현된 것에 찬사를 보내는 바다. 

그 모든 방법의 중심에는 감독의 의도를 표현하고 전달하는 배우들이 있다. 주인공들의 합이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이 러브 스토리에서, 달라스 역의 에리카 린더와 재스민 역의 나탈리 크릴의 합은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하다. 특히 모델 출신의 에리카 린더의 첫 필모그래피가 <빌로우 허>라는 것을 알게 되면 더욱 그렇다. 배우들이 첫 등장부터 보여주는 각자의 뚜렷한 매력을 통해 영화는 역시 캐스팅이 반이라는 사실을 새삼 떠올리게 된다. 앞으로도 더 많은 영화에서 그들의 모습을 보게 되길 바라고 있다. 

<빌로우 허> 스틸컷

덧붙여, 2017년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서 이 영화를 처음 봤을 당시 개인적으로 내가 가장 새롭고 짜릿하다고 느꼈던 장면에 대해 말하고 싶다. 영화 초반부, 잠에서 깨어난 달라스는 상의를 탈의한 채로 출근 준비를 한다.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양치질을 하고 거울을 보고 전화를 받는다. 보는 나도 아무렇지 않았다. 그 아무렇지도 않은 감각 속에서 나는 문득 깨달았다. 저것이 바로 내가 바라는 세상이다! 여성의 신체를 누구도 대상화하지 않아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는 세상. 저런 세상이 오기 위해 앞서 해결되어야 할 문제는 과연 얼마나 될까. 내가 보는 대로 세상이 보이고, 내가 느끼는 대로 사람들이 느끼는 세상이 오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역시, 이 세상에는 새로운 영화가 필요하다. 여성이 주도권을 가지고 스스로의 인생을 결정하는 영화, 욕망과 쾌락마저도 스스로 해석하고 표현하는 영화들. 그런 영화를 보고 자라고, 살아온 사람들이 많아질수록 세상은 변할 것이라고 자신한다. 우리에게는 기필코, 새로운 영화가 필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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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이 돌아왔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 <다정하게 바삭바삭> 등 연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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