ZOOM IN

망설이지 말고, 페미니즘 돋보기

자식에게 짐이 되는 엄마의 서사

엄마는 왜 죄인이어야 하는가?

송아름|영화평론가 / 2020-03-19


< ZOOM IN >에서는 여성 영화, 감독, 배우, 캐릭터 등을 퍼줌만의 새로운 시각으로 들여다보고 다양한 관점에서 이야기해보고자 합니다. 여러분들도 망설이지 말고, 페미니즘 돋보기!   


<그것만이 내 세상> 스틸컷

아무리 모성이 타고난 것이 아니라 해도 엄마라는 이름 앞에서 이성으로 설명할 수 없는 수많은 것들, 그것까지도 강요된 모성의 한 부분이 아닐까. 엄마이기에 자식에게 내주어야 하고, 자식을 당연히 이해해야 하며, 내가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조차 하지 못하는 삶이 아름답게 포장되었던 것까지 모성으로 설명할 수 있다면, 강요의 범위는 무한대로 넓어진다. 다행히 이 확장은 천천히 비판받았고, 이후 내 아이가 종종 밉고 혹은 아이에게서 종종 멀어지고 싶다는 마음을 잠시나마 드러내 보일 수 있게 됐지만 아직까지도 이에 대한 의아한 시선은 여기저기 도사린다. 산후우울증으로 인한 극단적인 선택이 벌어질 때마다 감금에 가까운 갑작스러운 변화를 무조건적인 사랑으로 감싸 안으라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 잠시 돌아보는 듯하지만, ‘그래도’라는 의문은 쉽게 엄마를 옭아맨다. 이처럼 ‘그래도’ 참아야 하는 엄마의 모습에 대한 이기적인 소망들은 수많은 매체들을 통해 끊임없이 재생산됐는데, 특히 중년을 넘어선 여성들에게는 너무나 오랫동안 당연한 것으로 자리하고 있다는 점을 되짚을 필요가 있다. 

많은 것을 경험한 시간들, 바로 이 축적으로 당연히 잘 참을 수 있을 것이며 모든 것을 이해해줄 수 있을 것이라는 잔인한 믿음은 많은 영화들 속에서 망나니 같은 자식들, 그렇지만 그 내면 어딘가에 선함이 남아 있다는 희미한 흔적을 보이는 이들과 중년의 여성을 연결 짓는 것으로 나타났다. 물론 현실에서 이 여성들은 자식들에게 쓴소리를 할 수도, 그런 자식들을 나 몰라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국영화들은 이 가능성을 완전하게 차단해 버리는데, 이는 중년의 어머니들을 죄인으로 설정하는 것으로 이룩해낸 우스운 성취다. 2010년대를 넘어서면서 엄마 혹은 어머니라 불렸던 중년의 여성 인물들을 떠올려보면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다. 중년의 어머니들은 대체로 장애가 있거나 배운 것이 부족하고 가난해 자식에게 아무것도 해 준 것이 없는, 결국 스스로가 짐이 되어 버리는 인물 유형이 그것이다. 

<깡철이> 스틸컷

몇 편의 영화를 떠올려보자. <깡철이>(안권태, 2013)에서 순이(김해숙 분)는 치매 환자로 늘 문제를 일으키며, <재심>(김태윤, 2016)의 순임(김해숙)은 앞을 잘 보지 못하고 문제가 생기면 소리부터 지르는 것으로 대응한다. <신과함께-죄와 벌>(김용화, 2017)(이하 <신과함께>)의 어머니(예수정)는 말을 하지 못하며 자식의 치부를 고스란히 안고 아파하는 인물이며, <그것만이 내 세상>(최성현, 2017)의 주인숙(윤여정)은 불치병으로 죽어가면서 버렸던 아들의 냉소를 받아들인다. 또한 <희생부활자>(곽경택, 2017)의 최명숙(김해숙)은 죽기 전 아들에게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가난한 어머니였고, 죽었다 살아난 후에는 자신의 아들을 공격하는 괴물이 되어버린다. 약 15~6년 전, 아들의 강제 징집에 울지도 못한 채 몸부림치는 농아로 등장하여 비극성을 높이던 기능적인 역할에 비한다면(<태극기 휘날리며>(강제규, 2004)의 어머니) 위의 어머니들은 분명 서사성을 부여받았지만, 과연 큰 차이가 있다고 볼 수 있을까. 아니, 오히려 더 잔인해진 것은 아닌지 의심스럽다.

중년의 어머니들은 존재 자체로 자식에게 짐이 된다. 어머니들은 그저 울기 위한 장치로서의 결함을 넘어 뼛속 깊은 죄책감까지를 장착해야 하는 것이다. 잘 자라도록, 고생하지 않도록, 그래서 큰일을 할 수 있도록 뒷받침해줬어야 할 아들들에게 장애를 지닌 가난한 엄마는 아무것도 해줄 수 없다. 나이 든 어머니들의 신체를 부족한 것으로, 그들의 가난을 무능력한 것으로, 그들의 무지를 부끄러운 것으로 설정했을 때 어머니가 자식의 아픔을 끌어안는 것은 당연하고, 자식들의 비행은 모두 자신이 감내해야 할 업보가 되어버린다. 완벽할 수 있었던 자식이 그렇지 못한 것은 모두 이 어머니들의 불완전함이 만든 결과이기 때문이다. 

<재심> 스틸컷

<신과함께-죄와 벌> 스틸컷

그래서 어머니들은 운다. 마치 죄인들이 그런 것처럼 숨죽여 소리도 내지 못한 채 눈물을 흘리고 삼킨다. 이 서사들이 한결같이 눈물로 귀결되는 것 역시 어머니들의 삶을 짐으로 인정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당연히 이 눈물은 중년의 어머니들에게 강요됐던 잔인함을 감상적인 것 정도로 희석시키는 역할까지 수행하면서 어머니에 대한 사랑을 떠올렸다는 착각을 일으킨다. 사실 어머니의 입장에선 폭력적일 수밖에 없는 이 서사화는 눈물로 인해 모성과 희생으로 치환되고, 이 영화들을 보며 함께 눈물 흘리는 이들에게 어머니는 바로 그 모습으로 박제된다. 즉 눈물은 안타까움이라는 감정 속에 어머니에 대한 강요를 숨기고, 그것을 사랑이라 부르며 미처 깨닫지 못했다는 죄책감까지 굳이 만들어 슬퍼하는 이상한 감상성에 빠지게 하는 것이다. 여기에 불을 지피는 장치는 어머니의 이야기를 결국 자신을 소멸시키는 것으로 죗값 아닌 죗값을 치르도록 만드는 것까지 끌고 가는 것이다. 누군가에게 죄를 지었다면 죗값을 치른다는, 당연하지만 그리 잘 실현되지는 않는 이치가 어머니들에겐 너무도 분명하게 적용된다.

어머니들이 죗값을 치르는 방식은 후회, 회한을 넘어 사라지는 것이다. 물론 영화들은 이 짐들이 존재해야 했던 유일한 이유를 만들어둔다. 그의 소멸로 아들을 회복시키는 것, 그러니까 그가 살아야 했던 이유는 그의 소멸을 통해 아들을 살리는 것. 그뿐이다. 짐짝처럼 인식된 자신의 존재를 자식을 위해 소멸시키는 것, 어머니들은 바로 이 방식으로 자신만으로는 존재할 필요가 없던 존재가 된다. 잠시 정신이 돌아올 때마다 네게 빚을 갚고 죽을 것이라는 <깡철이>의 어머니는 그의 말처럼 죽음 직전 간을 내어주고 아들을 살린다. <그것만이 내 세상>의 어머니는 자신의 죽음을 통해 아버지가 다른 두 아들이 서로 의지하게 하며, <신과함께>의 어머니는 아들의 죄책감마저 자신의 것으로 끌어안고 사라진다. 

어머니들의 소멸은 다시금 눈물과 만나면서 그것을 숭고하다고, 아름답다고 판단하도록 강요한다. 그러나 자식을 위한 희생으로 그들의 삶이 숭고한 것이 되었다면, 아들을 살리지 못했을 때 그의 삶은 무엇인가? 희생되지 않았다면 짐짝처럼 버려졌을 이 어머니들의 삶은 과연 무엇을 지시하고 있는가?

<희생부활자> 스틸컷

이러한 서사들은 우리가 상상하거나 혹은 바라던 강요와 결합하면서 강력한 힘을 얻는다. 어머니라면 마땅히 그래야 할 것이라고, 견뎌온 만큼 더 견뎌야 하고, 여태까지 견뎌왔기에 앞으로도 견딜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은 그의 삶에 대해 생각할 필요가 없게 만들었다. 굳이 불쌍한 인물을 설정해 두고 그것을 어머니의 사랑이라 치장하며 위로하게 만드는 것은 그들의 삶이 왜 그래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을 차단한 채, 그냥 그러하니 앞으로도 그럴 것이며 이에 대해 온 마음을 다해 슬퍼하라는 것과 다르지 않다. 이러한 서사가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는 이 상황에 너무나 거슬리는 것은 최근 젊은 여성들에 대한 서사는 그들의 목소리와 맞물려 조금씩 정교하게 설명되고 있다는 점 때문이다. 바로 이 시점에 중년 여성의 서사가 유독 퇴행하는 것은 나이에 따라 여성의 범위를 제한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곱씹게 한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어머니들에겐 아무런 욕망도 호기심도 포착되지 않는다. 그들의 삶이 어떠할지, 그들이 하루를 어떻게 보낼지, 그들이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할지에 대해 어떠한 상상의 여지도 남겨두지 않는 것이다. 그것을 과연 한 사람의 삶을 그린 것이라 이야기할 수 있을까. 

<깡철이> 스틸컷

1933년생으로 강릉에 살고 계신 우리 박대한 할머니는 얼마 전 놓인 원주와 강릉 사이 KTX를 궁금해 하시다, 아들 내외를 보러 오신 김에 원주까지만 데려다 달라시며 홀로 KTX를 타고 당당히 강릉에 도착하셨다. 강릉까지 모셔다드리겠다는 것을 굳이 마다하시고 처음으로 탄 KTX를, 원주에서 강릉까지 한 시간이 걸리지 않는 그 신기한 경험을, 기차역에서의 맛있는 간식거리를 아주 소중히 생각하셨다. 

그의 삶은 그에게 이렇게 소중한, 그러나 가끔은 힘들기도 한 하루하루의 중첩이었을 것이다. 그의 삶은 분명 누군가의 어머니나 할머니가 살았을 것이라 생각했던, 추상적이지만 으레 그러할 것이라는 장면들을 넘어, 그의 친구와 그의 일상과 그의 아픔과 그의 내일이 쌓아나간 날들일 것이다. 그의 생을 누리는 모습을 상상할 수 있는 이야기, 그것이 인물에 대한 예의다.

*이 글은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19년 2월호에 실린 <어머니 역할에 대한 한국영화의 이기적 시선>과 유사한 관점을 가지고 새로 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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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한국영화평론가협회 영평상 신인평론상 수상,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시네마 크리티크 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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