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FIRST
나의 첫 영화 연출기
처음이니까 괜찮아
<나는 항상 너를 지켜보고 있다> 제작기
박매화|영화감독 / 2020-01-30
‘처음’이란 말은 많은 감정을 불러일으키죠. 설렘이기도 두려움이기도 한 그것! 우리가 사랑하는 여성 감독들의 처음은 어땠을까요? 여전히 두근두근 소중한 기억일지,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게 하는 부끄러움의 시간일지 아무도 모를 일입니다. 그래서 준비했습니다. 감독들이 직접 들려주는 ‘나의 첫 영화 연출기’를! 영화제작 과정부터 우당탕탕 좌충우돌, 따뜻한 메시지까지 < MY FIRST >에서 만나보세요! |
박매화 감독 필모그래피 2016 <무한성> 연출 2015 <은혜> 연출 2014 <관계> 스크립터 2012 <어떤 시선> 스크립터 2009 <날아라 펭귄> 연출부 2008 <빗자루, 금붕어 되다> 연출부 2007 <북두칠성> 연출 |
<나는 항상 너를 지켜보고 있다> 스틸컷
나의 첫 영화는 2004년 봄에 제작됐다. 지금은 2019년 겨울이며 어떻게 첫 경험을 잊을 수 있겠냐고 말들을 하겠지만 진짜 기억이 삭제된 것 마냥 머릿속이 새하얗기만 하다. 그때의 기억을 소환하고자 아주 오래된 조그만 DV테이프를 먼지 쌓인 박스에서 찾아냈고, 집에서는 볼 수 있는 방법이 없으므로 파일로 변환해주는 업체에 찾아가서 변환한 후에야 내 노트북을 통해 볼 수 있었다.
험난했던 영화제작 과정만큼이나 묵혀둔 영화를 보는 법도 쉽지는 않았다. 테이프 속 영화를 파일로 변환할 수 있는 DV데크라는 기계는 요즘 세상에선 쓸모가 없어져 사라졌고 그 기계가 있는 곳을 수소문하는 것도 나름 일이었다. 참 시대가 많이 변했고, 많은 것들이 사라졌고, 나 또한 나이를 많이 먹었다.
오랜만에 만난 나의 첫 영화였다. 그런데 추억에 잠길 새도 없이 부끄러움이 물밀 듯이 밀려왔다. 장면 장면마다 그때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고 시퀀스마다 손발이 오그라들었으며 나를 반성의 시간으로 이끌었다.
지금 쓰는 이 글은 영화 제작기라기보다는 그때 그날을 반성하는 글이 될 것이다. 지금부터 반성의 글을 써 내려 가면서 이 글을 읽게 될 영화를 시작하려는 여성들에게 조그마한 도움이 될 몇 가지 팁들을 공유하고자 한다.
<나는 항상 너를 지켜보고 있다> 스틸컷
이제 2004년의 봄으로 거슬러 올라가 보자. 20대의 나는 그 시절 도대체 어떤 생각을 했고 어떤 영화를 제작했을까? 영화를 다시 찾아보기 전에 처음으로 했던 생각이다. 눈으로 직접 확인해보니 그때의 내 로망이 고스란히 담겨있었다. 영화 속 주인공은 내가 바라는 모습을 구현해놓고 20대 초반의 풋풋한 설렘과 평범함을 거부했던 내 판타지 속의 모습이 그곳에 있었다. 탐정물에 꽂혀있던 그때의 내가 떠올랐고, 스무 살이 꿈꾸는 설렘 가득한 로맨스가 버무려져 있었다.
어디 한 번 공개하지 못하고 묻혀있던 내 첫 영화를 공개할 수는 없으나 제목만이라도 이곳에서 밝히고자 한다. 이 글에서 계속 언급할 영화의 제목은 <나는 항상 너를 지켜보고 있다>이다. 제목마저도 요상한 내 첫 영화는 공포와 스릴러 그리고 로맨스가 버무려진 퓨전 장르의 영화로 장르에서마저 평범함을 거부했던 내가 반영되어 있다.
추리극에 빠진 스무 살 여자와 그 여자를 좋아해 취향까지 죄 파악한 남자가 영화의 주인공이다. 줄거리는, 여자를 위한 맞춤형 프로포즈를 해주면서 벌어지는 소동극이라고 하면 되겠다. 그 당시 나는 멋도 모르면서 ‘내 영화는 남들과 달라야 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영화 장르의 특성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주제에 장르 믹스를 시도했고, 결과적으로 이도 저도 아닌 애매한 영화가 완성된 것이다. 그러므로 나와 같은 실수를 하지 않기 위해서는 이것저것 모르는 것들을 시도하기보다는 가장 잘 할 수 있는 것, 좋아하는 것을 장르로 택하길 바란다.
<나는 항상 너를 지켜보고 있다> 스틸컷
돌이켜 보면 영화를 보는 것이 좋아서 영화를 찍기 시작했다. 때문에 이 영화에는 주제 따위를 찾아볼 수 없다. 솔직히 그 당시 시나리오를 쓰면서 영화 주제나 제작 의도를 고민해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굳이 끼워 맞추자면 스무 살 여자의 (내 특이한 취향까지 좋아해 주는) 남자친구에 대한 로망이라고 할 수 있겠다. 사회를 반영한 영화를 찍어야겠다는 생각은 당시에는 하지 못했다. 오직 남들과 다르게 보이기 위해 애쓰는 나 자신에게만 관심이 쏠려 있었고, 그 정신 상태를 반영한 영화를 첫 영화 이후에도 몇 편 더 제작했었다. 그러다 나이를 조금 더 먹고, 세상이 참 내 맘 같지 않고 여성으로서 억울한 마음이 들 무렵부터 여성의 입장에서, 여성의 시각으로 사회를 비판하는 영화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그래서인지 이때 제작한 영화들은 꽤나 나의 억울함, 여성의 억울함, 시대의 억울함이 묻어나 있다.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첫 영화에서부터 무언가 커다란 의미를 부여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처음부터 대단한 메시지를 전하려고 하다 보면 시나리오를 쓰는 것부터가 굉장한 스트레스로 다가올 것이다. 처음부터 세상에 대해 이야기할 수는 없다. 처음은 그저 오로지 나의 이야기, 내가 꿈꾸는 이야기, 조금 더 나아가 내 친구의 이야기에서 시작해보는 것이 좋은 방법인 것 같다.
돌아보면 나의 첫 영화에 내가 투영되어 있듯이 알고 보면 시나리오를 쓴다는 것은 오로지 나에게 집중하는 시간인 것 같다. 그게 나의 이야기이든, 내가 꿈꾸는 이야기이든, 내 관심사이든. 그래야만 시나리오가 술술 써질 것이다. 워낙 글 쓰는 재주가 좋아 무엇이든 영화로 풀어낼 수 있는 예외의 분들도 계시겠지만 첫 영화에서는 본인이 가장 잘 알고 있는 일을 시나리오로 풀어보는 것을 권유한다.
<나는 항상 너를 지켜보고 있다> 스틸컷
금전적인 부분인 제작비에 대해서 많이들 궁금해할 것이다. 실은 첫 영화 제작비는 소액의 식비와 차비 그리고 영화 엔딩에 사용한 폭죽 몇 개를 구매한 소품비가 전부였다.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10만 원도 쓰지 않았던 것 같다. 소액의 제작비로 영화 한 편을 찍을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실은 나의 무지함 때문이었다.
스토리와 배우의 연기 외에는 관심이 없었고 잘 알지도 못했다. 영화의 기술적인 측면이라든지 퀄리티보다는 내가 드디어 영화를 찍는다는 것 자체에만 심취해 있었다. 때문에 촬영, 조명, 미술에 무지했고 그저 상상한 것을 시나리오로 쓰고, 카메라로 찍고, 편집하면 끝인 줄 알았다. 영화에 대한 공부가 부족했던 것이라고 생각한다. 지금은 영화를 오랫동안 공부해오면서 영화 프레임 속 모든 것에 신경을 쓰고 있다.
영화 퀄리티를 위해 촬영 장비, 프로덕션디자인, 색보정, CG, 믹싱, 음악 등 프로덕션, 포스트 프로덕션의 모든 과정에서 새로운 시도와 실험들을 하기 위해 노력 중이다. 그러다 보니 제작비가 어마하게 커지고 영화 제작은 돈 없이는 할 수 없다는 생각에까지 미치게 됐다.
이제 와 생각해보니 제작비 걱정 없이 작업했던 첫 영화를 찍은 그때가 그립기도 하다. 다만 반성해야 할 점은 금전적인 문제에 직면했을 때 그 문제를 충분히 인지하고 있고 영화의 기술적인 측면보다 내 영화에서 더 중요하다고 여기는 부분에 정성을 쏟으면 되는 일이다.
<나는 항상 너를 지켜보고 있다> 스틸컷
처음 영화를 시작하는 분들은 처음부터 장비 욕심이라든지 비주얼적으로 엄청난 퀄리티를 우선으로 하지 말고 스토리 텔링부터 튼튼히 구축해나가길 바란다. 좋은 시나리오에서는 좋은 영화도 나쁜 영화도 나올 수 있지만, 나쁜 시나리오에서는 절대 좋은 영화가 나올 수 없기 때문이다.
솔직히 첫 영화를 다시 보면서 가장 창피한 것은 들쑥날쑥한 사운드도, 촌스러운 앵글도, 빛이 과다 노출된 조명도 아니었다. 기승전결이 분명치 않고 작위적인 스토리가 문제였지. 역시나 공개하지 않길 잘했다. 꽤나 풋풋한 그 시절 나의 모습이 투영돼 있지만 부끄러운 것은 어쩔 수가 없다.
<나는 항상 너를 지켜보고 있다> 스틸컷
영화를 보는 것에 익숙했던 내가 영화를 만드는 것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어릴 적 팬심에서 시작됐다. 어릴 적 나는 무협 영화 속 배우 이연걸을 좋아했고 또래의 친구들과는 다르게 스타와 연인으로서의 미래가 아니라 영화 동지가 되고 싶었다. 그렇게 영화를 보는 것 외에는 어떠한 노력도 없이 영화제작을 시작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영화를 하고 싶다는 막연한 생각만으로는 영화를 만들기 어렵다. 촬영 첫날 화장실에서 혼자 펑펑 울었다. 성격이 맞지 않았던 스태프 때문이기도 했지만 가장 화가 났던 건 영화에 무지해 철저한 준비 없이 촬영에 임했던 나였다. 다음 회차 촬영부터는 만발의 준비를 했다. 어떻게 쇼트와 앵글을 구성할지 몰라서 무시당했던 첫날의 촬영을 떠올리며 콘티를 열심히 작성해서 나갔다. 당연히 마음이 맞지 않았던 촬영 스태프도 바꿨다.
영화는 누구나, 아무나 만들 수 있다. 하지만 영화제작에 대한 공부가 꼭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알고 하는 것과 모르고 하는 것은 큰 차이가 있고 당연히 많이 알고 있는 사람이 더 좋은 선택을 하게 되어 있으며 더 좋은 영화를 만들 수밖에 없다. (여기서 말하는 좋은 영화란 흥행영화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누구든 처음은 모두 서툴고 실수 연발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처음이 있기에 지금의 내가 있을 수 있듯이 처음이니까 서툴러도 괜찮다. 새로운 것을 시작하는 모든 여성들에게 “처음이니까 괜찮다”라는 말을 전하고 싶다. 내 경험담이 작게나마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여성영화를 지켜봐 주고 관심을 가져주는 모든 분들에게 감사하다.
PURZOOMER
<무한성>, <은혜>, <북두칠성> 연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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