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FIRST
나의 첫 영화 연출기
호랑이 굴에 들어가도 동료들만 있다면
<추석 연휴 쉽니다> 제작기
남순아|영화감독 / 2020-07-16
‘처음’이란 말은 많은 감정을 불러일으키죠. 설렘이기도 두려움이기도 한 그것! 우리가 사랑하는 여성 감독들의 처음은 어땠을까요? 여전히 두근두근 소중한 기억일지,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게 하는 부끄러움의 시간일지 아무도 모를 일입니다. 그래서 준비했습니다. 감독들이 직접 들려주는 ‘나의 첫 영화 연출기’를! 영화제작 과정부터 우당탕탕 좌충우돌, 따뜻한 메시지까지 < MY FIRST >에서 만나보세요! |
남순아 감독 필모그래피 2020 <추석 연휴 쉽니다> 연출 2018 <오목소녀> 연출부 2016 <걷기왕> 각본, 스크립터, 디자인 어시스턴트 2015 <아빠가 죽으면 나는 어떡하지?> 연출, 편집, 주연 2012 <흔적> 연출 |
나는 2016년부터 영화계 내 성폭력에 문제 제기하는 목소리를 내왔다. 내가 해온 활동들은 분명히 중요했고, 보람찼다. 한편으로는 다른 데에 쓸 에너지가 부족해서 괴로웠다. 준비하던 작업들이 흐지부지 엎어졌다. 몇 년이나 결과물을 내놓지 못했다는 자괴감과 앞으로도 작업을 해내지 못할 거란 공포에 밤마다 잠을 이루지 못했다.
<추석 연휴 쉽니다> 스틸컷
무엇이든 결과를 내야 내가 살 것 같았다. 제작 가능성이 최대한 높아지도록 적은 예산으로 만들 수 있어야 했다. 스토리 이전에 촬영 회차부터 정했다. 촬영 회차가 적으면 적을수록 예산 절감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3회차 안에, 집에서 찍을 수 있는 스토리가 뭐가 있을까 고민하다 보니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몇 년 전 추석이었다. 추석 당일 엄마는 모르는 번호로 전화를 받았다. 시댁에서 제사를 지내고 집으로 돌아가던 중, 열받아서 가출한 친구의 전화였다.
“OO 씨, 나 OO 씨네 가도 돼?”
급하게 나오느라 핸드폰을 두고 온 친구분이 고속터미널 공중전화로 엄마에게 전화한 것이었다. 그날 밤 우리는 고단했던 아주머니의 명절 노동을 들으며 함께 술을 마셨다. 며칠 더 머물다 가라는 권유에도 아주머니는 다음 날 아침 일찍, 자고 난 이부자리를 깨끗하게 정리해놓고 집으로 돌아가셨다. 이 기억을 가지고 추석 연휴, 혼자 사는 주인공의 집에 결혼 후 멀어진 친구가 호박전만 들고 갑자기 찾아오면서 벌어지는 내용의 시나리오를 썼다. 제목은 <추석 연휴 쉽니다>.
<추석 연휴 쉽니다> 촬영 현장 ©남순아 감독
시나리오 초고를 쓴 다음 여러 제작 지원 사업에 응모했다. 운 좋게도 영화진흥위원회 독립예술영화제작지원 사업에 선정되어 800만 원을 지원받게 됐다. 적은 금액은 아니었지만 넉넉한 금액도 아니었다. 단편영화라는 이유로 스태프들에게 최소한의 인건비도 지급하지 못하는 현장을 만들고 싶지는 않아, 사비를 더해 회차당 인건비 최소 10만 원이라는 원칙을 마련하고자 했다. 물론 이 금액은 그들의 시간과 재능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을 안다.
가장 먼저 정해진 스태프는 스크립터와 촬영감독이었다. 이전에 내가 스크립터로 참여했던 영화 <걷기왕>(2016)의 백승화 감독이 이 작품의 스크립터를 맡아주었다. 노다해 촬영감독과는 ‘페미니스트 영화·영상인 모임 찍는페미’에서 만났다. 그는 지속적으로 함께 작업해나갈 수 있는 감독을 찾고 싶다고 말하곤 했는데, 그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내가 그런 사람이 될 수 있길 바랐다. 이후 순차적으로 류현아 미술감독, 김아람 PD, 김지인 조감독까지 정해지면서 프리 프로덕션 단계에 필요한 스태프들이 꾸려졌다.
많은 사람들이 스트레스를 받는 상황에 노출된 후 그 상황이 꿈에 반영되는 경험을 해봤을 것이다. 나도 그랬는데, 캐스팅 때문에 고민이 많아지자 스태프들이 “그냥 고양이가 하는 건 어때요?”라고 말하는 꿈을 꿨다. 그 말이 끝나자마자 갑자기 어디선가 나타난 고동색 고양이가 연기를 했다. 고양이의 연기는 끝내줬고 스태프들이 “와, 딱이다, 딱이야!”라고 손뼉 칠 때 깨어났다.
이영 역으로 출연한 임성미 배우
스트레스를 받았던 것과는 별개로, 다행히 처음부터 내가 그렸던 이미지에 맞는 배우들을 캐스팅하게 되었다. 혼자 사는 주인공 이영 역에는 <연애다큐>(구교환·이옥섭, 2015), <그 새끼를 죽였어야 했는데>(이가홍, 2018) 때부터 팬이었던 임성미 배우가, 갑자기 찾아온 친구 다정 역에는 오랜 인연을 갖고 있는 강진아 배우가 함께 하게 되었다. <소공녀>(전고운, 2017), <한강에게>(박근영, 2018)에 출연했던 강진아 배우는 내 첫 단편 극영화 때도 함께 했었는데, 이후 기회가 되면 꼭 다시 작업하고 싶었던 배우였다. 두 배우 모두 경험이 많고 안정적인 연기를 하는 분들이었기에 함께 할 수 있어 정말 큰 행운이었다고 지금도 생각한다.
분에 넘치게 능력 있는 스태프들과 배우들이 함께하게 됐지만 자신감보다는 걱정이 앞섰다. 내가 잘 해낼 수 있을지 확신이 없었다. 프리 프로덕션이 진행될수록 스태프들과 배우들을 실망시킬지도 모른다는 불안에 시달렸다. 잘 만든 영화를 보면 저렇게 해내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고, 못 만든 영화를 보면 저렇게밖에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눈물이 앞을 가린 것처럼 뿌연 앞길을 사주 어플의 ‘오늘의 운세’에 의지하며 건넜다.
<추석 연휴 쉽니다> 스틸컷
내가 나를 믿지 못했기 때문에 시나리오에도 확신을 갖기 어려웠다. 남들은 이 정도 시나리오는 쉽게 쓰는데 혼자서만 절절매는 건 아닐까 의심했다. 내가 시나리오 갈피를 못 잡겠다고 투덜대자 촬영감독이 자기 친구 중에 시나리오를 정말 잘 쓰는 친구가 있다며 소개해줬다. 나는 그 친구분을 혼자서 ‘기흥 귀인’이라는 별명으로 불렀다(친구분과는 기흥에서 만났다. 내 시나리오가 초고보다 나아진 것의 80%는 기흥 귀인 덕분이다).
기흥 귀인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지만 불안은 가시지 않아서, 나는 기흥 귀인 외에도 여러 사람에게 시나리오 피드백을 받았다. 다들 각자의 분야에서 뛰어난 두각을 나타내는 이들이었는데, 피드백 내용이 저마다 달랐다. 나는 혼돈의 강을 건너며 그들의 의견을 모두 취합해 시나리오에 반영했다. 수정된 시나리오를 읽은 기흥 귀인은 내가 쓴 시나리오 같지 않다며, 영화를 잘 만드는 것만 중요한 건 아니라고 했다. 영화를 못 만들어도 되니까 원래 하고 싶었던 게 뭔지 생각하라는 피드백과 함께.
<추석 연휴 쉽니다> 콘티 ©남순아 감독
나는 그냥 잘하고 싶었다. 이 마음이 너무 커서, 내가 최선의 선택을 내리지 못할까 봐 겁이 났다. 기흥 귀인의 말을 듣고 부끄러워져서 트위터에 자책하는 트윗을 썼더니 촬영감독에게 전화가 왔다. 이즈음 촬영감독은 내 멘탈을 자주 확인하곤 했다. 이야기를 들은 촬영감독은 본인도 이번 시나리오가 깔끔하긴 했는데, 이게 정말 내가 하고 싶었던 것이 맞는지 물었다. 그러곤 나보고 용기를 내라고, 일할 땐 감독이 촬영감독의 용기라고 했다. “감독이 소극적이면 촬영도 보수적으로 갈 수밖에 없어.” 그 말을 듣고 나만 스태프들과 배우들에게 기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들도 나에게 기대야 한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그러기 위해선 가장 먼저 내가 나를 믿어야 한다는 것도.
마음을 다잡고 다가올 촬영 준비를 착실히 해나갔다. 주요 로케이션인 주인공의 집을 내가 사는 집으로 정하고(운 좋게도 촬영 기간에 아랫집 주민이 여행을 갔다) 촬영감독, 스크립터와 함께 콘티 작업에 들어갔다. 사진과 영상을 찍어보며 미리 동선을 체크하고 콘티를 짤 수 있어 다행이었다. 미술 주요 소품과 나머지 로케이션이 결정되고, 의상 및 분장 피팅, 성희롱 예방 교육도 받고 나자 마침내 촬영일이 다가왔다.
<추석 연휴 쉽니다> 촬영 현장에서의 스태프들 ©남순아 감독
남순아 감독(가운데)과 스태프들 ©남순아 감독
촬영을 시작하는 날, 촬영감독은 꿈에서 웅덩이에 몸을 숨기고 있는 호랑이 세 마리를 봤다고 한다. 꿈이 심상치 않아 해몽을 찾아봤더니, 호랑이들은 어려움을 상징한다고 했다. 그러니까 3회차의 어려움이었던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마지막 회차 때는 비가 와서 촬영을 다 마치지 못하고, 추후 보충 촬영일을 잡아야 했다. 배우들과 스태프들 모두 촬영 내내 적은 예산과 적은 인원으로 좁은 공간에서 촬영하느라 고생이 많았다.
촬영이 끝나고 나서도 후반 작업과 최종 정산까지 수많은 사람들을 고생시키고, 도움 받은 뒤에야 겨우 DCP 파일을 넘길 수 있었다. <추석 연휴 쉽니다>는 올해부터 영화제에 출품해 전주국제영화제, 미쟝센 단편영화제, 평창국제평화영화제에서 상영됐다.
<추석 연휴 쉽니다> 촬영 현장 ©남순아 감독
촬영감독이 꿨던 호랑이 꿈처럼 영화를 만드는 과정은 어려움의 연속이다. 하지만 호랑이 굴에 들어가도 정신을 차릴 수 있게 도와주는 동료들이 있다면 용기를 낼 수 있다. 동료들이 모든 걸 해결해줄 수 있다는 게 아니다. 각자 자기가 돌파해야만 하는 부분이 있다. 그렇지만 끝없는 불안과 자기 의심 속에서 내가 나를 믿어볼 수 있었던 건 동료들의 신뢰와 지지 덕분이었다. 그들을 실망시킬까 봐 두려웠던 마음이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결정을 내리고 내 몫의 책임을 다하고 싶은 마음으로 변하면서, 두려움에 부딪칠 수 있었다.
이 작업을 하기 전까지 나는 영화가 공동 작업인 것이 가장 힘든 부분이라고 생각했다. 이 생각은 지금도 변함없다. 하지만 영화가 공동 작업이기 때문에 매력적이라는 것을 동료들을 통해 배웠다. 다시 한번 <추석 연휴 쉽니다>에 함께 해준 제작진 임성미, 강진아, 김아람, 김지인, 백승화, 노다해, 이지민, 김연수, 정한별아, 최성진, 박성환, 류현아, 염희수, 이재경, 한정인(코스모스 슈퍼스타), 최지영 그리고 이 영화가 만들어질 수 있도록 도움 주신 많은 분들께 깊은 감사 인사를 전하고 싶다.
PURZOOMER
<추석 연휴 쉽니다> <아빠가 죽으면 나는 어떡하지?> 연출
STORY : MY FIR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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