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FIRST

나의 첫 영화 연출기

촬영을 하지 않는 영화 만들기

<로봇이 아닙니다.> 제작기

강예솔|영화감독 / 2021-07-29


‘처음’이란 말은 많은 감정을 불러일으키죠. 설렘이기도 두려움이기도 한 그것! 우리가 사랑하는 여성 감독들의 처음은 어땠을까요? 여전히 두근두근 소중한 기억일지,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게 하는 부끄러움의 시간일지 아무도 모를 일입니다. 그래서 준비했습니다. 감독들이 직접 들려주는 ‘나의 첫 영화 연출기’를! 영화제작 과정부터 우당탕탕 좌충우돌, 따뜻한 메시지까지 < MY FIRST >에서 만나보세요!
강예솔 감독 필모그래피
2021  <로봇이 아닙니다.> 감독
2018  <졸업> 프로듀서/제작 
▶ <로봇이 아닙니다.> 온라인 시사 (2021.7.26.~2021.8.1.)

로봇이 아닙니다.

시작은 구글 로그인을 하다가 가끔 마주치는 ‘로봇이 아닙니다’ 테스트(정식명칭은 reCAPTCHA 이며, 그 뜻은 ‘컴퓨터와 사람을 구분 짓기 위한 완전 자동 튜링 테스트(Completely Automated Public Turing test to tell Computers and Humans Apart)’)였다.

’로봇이 아닙니다’ 테스트에서 볼 수 있는 체크 박스

‘로봇이 아닙니다’ 테스트는 “OO가 있는 타일을 모두 선택하세요.”라는 메시지가 등장하면, 함께 나타나는 이미지 타일에서 OO가 포함된 타일을 선택하는 간단한 테스트이다. 구글에서는 이 테스트에서 ‘올바른’ 선택을 하느냐, 아니냐를 두고 구글에 접속하는 것이 사람인지, 봇인지를 판단한다. 대체로 별 고민 없이 OO가 포함된 타일을 선택하고 테스트를 통과하는데, 가끔 쉽게 선택하지 못하는 경우들이 있다. 예를 들면, ‘자동차’가 있는 타일을 모두 선택하라는 메시지와 함께 등장하는 이미지 타일에 자동차 바퀴만 걸려있는 경우라든가, 이미지 타일 속의 어떤 물체가 자동차인지, 아닌지 분간이 어려울 만큼 크기가 작거나 해상도가 낮은 경우이다. 이런 귀찮은 판단의 과정들을 회피하기 위해 유튜브에서 공략법(?)을 찾아서 ‘로봇이 아닙니다’ 테스트를 우회하는 사람들도 많은 것 같다. 하지만 나는 사소한 것에 대체로 더 진심을 다하는 이상한 성격을 가졌다. 그래서 이 테스트를 더 파고들어 보기로 했다.

자동차를 예시로 계속 이야기를 해보자면, ‘로봇이 아닙니다’ 테스트에서 ‘자동차’ 가 포함된 타일을 선택할 때, 그것이 포함되어 있느냐, 아니냐를 판단하기 위해서는 기준이 필요하다. 그 기준은 나의 경우에는 어떤 하나의 이미지로 떠오르는데, 그것은 준중형 세단의 이미지에 가깝다. 그 이미지를 중심으로 각 이미지 타일들이 그것이 가까운가, 가깝지 않은가를 판단한다. 물론 이 과정은 아주 의식적으로 이루어진다기보다는 무의식적으로 아주 빠르게 일어난다. 

<로봇이 아닙니다.> 후원 관객 모집 당시 사용한 홍보용 이미지

예시를 ‘자동차’에서 ‘사람’으로 바꾸어보면 어떻게 될까에 대해 생각을 해보았다. 여기에서도 판단을 위해서 기준이 필요할 텐데, 여기에서의 기준은 무엇이 될 수 있을까? 사실 자동차는 그 기준이 되는 이미지를 상상하는 것이 아주 어려운 것 같지는 않은데, 사람은 생각보다 어려웠다. 사람을 사람으로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이 무엇이 될 수 있을까? 시각 외에 모든 감각이 배제된 상황에서, 사람을 사람으로 인식하고 판단할 수 있게 해주는 기준은 무엇일까? 그 질문들을 갖고 영화를 만들어보기로 했다.

영화를 만들기로 결심한 후, ‘로봇이 아닙니다’ 테스트에 대한 자료를 더 찾아보았다. 그러다가 최근 몇 년 사이에 ‘로봇이 아닙니다’ 테스트에서 등장하는 키워드가 교통 관련 키워드인 경우가 많아졌고, 그 이유는 자율 주행 자동차에 탑재된 AI를 학습시키기 위한 데이터들을 수집하기 위한 명목이라는 기사를 보게 되었다. 구글에 접속하는 사람들의 보안을 위해 진행하는 테스트인 줄 알았는데 그것이 다른 목적으로도 쓰이고 있다는 사실이 흥미로웠다. 리서치를 하면서 알게 되었지만, 본디 reCAPTCHA가 갖는 의의 중 소위 ‘집단지성’을 통한 빅데이터 수집도 있다고 한다. 

자율 주행 자동차 사고 보도사진 / 출처 : 블룸버그TV

‘로봇이 아닙니다’와 자율 주행 자동차의 AI 사이의 연결고리를 발견하면서 자율 주행 자동차와 관련된 리서치를 좀 더 진행해보았다. 그 과정에서 2018년 미국 애리조나주에서 자율 주행 자동차 보행자 사망 사건이 난 기사를 발견했다. 해당 사건에 대해 미국 연방교통안전위원회(NTSB)에 따르면, 사고를 낸 자율 주행 자동차가 보행자와 충돌 6초 전쯤 보행자를 감지했지만 이를 차량 혹은 자전거로 잘못 식별했고, 그래서 운전자에게 경고 메시지가 전달되지 않아 사고가 발생했다고 한다. 물론 해당 교통사고에는 사고가 발생하게 된 여러 가지 맥락들(운전자의 부주의, 보행자의 무단횡단)이 식별 오류 문제 외에도 추가로 몇 가지 더 있기는 했다. 그렇지만 자율 주행 자동차의 AI가 보행자를 차량 혹은 자전거로 식별하게 되었다는 것에는 어떤 이유가 분명히 있었을 것이고, 그것에는 분명히 자율 주행 자동차 AI가 학습한 데이터들이 원인으로 작용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AI가 학습하는 데이터가 문제라는 것인데, 그 데이터들이 어디서부터 왔고, 어떻게 만들어졌으며, 어떻게 학습되는가가 궁금했다. 


촬영을 하지 않는 영화 만들기

<로봇이 아닙니다.>에 대한 아이디어들을 수집하고, 리서치를 진행하면서 느꼈던 점은, 이미지들은 곳곳에 넘쳐나고, 그 이미지들이 이제는 현실을 초월하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는 것이다. 무엇인지 알 수도 없고 왜 만들어졌는지 그 목적도 알 수 없는 이미지들이 수십수만 장 인터넷을 떠돌아다니고 있다. 그리고 그 이미지들은 대개 무방비하게 노출되어있고, 언제 어디서 어떻게 그 원래의 맥락으로부터 떨어져 사용될지 알 수 없다. ‘로봇이 아닙니다’ 테스트에서도 테스트에 사용되는 이미지가 어디서 나온 것인가에 대한 의문은 쉽게 풀리지 않는다(리서치를 통해서도 그 답은 찾지 못했다.) 그런데 그 이미지를 통해 인식되고 파악된 데이터들은 자율 주행 자동차 AI의 학습에 활용되고, 그것은 실질적으로 현실에 영향을 미친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쳤을 때, 없는 이미지를 연출해 만들기보다는 이미 존재하는 이미지들을 통해서 새로운 사실을 구성하는 촬영을 하지 않는 영화를 만드는 방식이 <로봇이 아닙니다.> 작업에 더 적합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촬영 없이 이미 존재하는 이미지들을 재조합하여 만들어내는 영화(소위 ‘파운드푸티지(found footage)’ 라 방법을 차용한 영화)를 이전에 종종 본 적이 있다. 그런데 항상 드는 의문은 원래의 이미지가 갖고 있는 저작권을 어떻게 해결하느냐의 문제였다. 비슷한 작업들을 하는 사람들에게 물어봐도 아주 뚜렷한 답을 얻기는 어려웠다. 그래서 직접 이와 유사한 사례의 저작권과 관련된 정책이나 이슈들을 찾아봤다. 그러다가 ‘공정 이용(Fair Use)’ 이라는 저작권법상의 규정을 발견했다.

공정 이용은 특정 상황에서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자료를 사용할 수 있는 경우에 관한 규정인데, 그 기준은 여러 가지가 있다. 그중 눈에 띄는 것은  저작권 보호를 받는 자료를 ‘변형해서’ 사용했는지의 여부를 기준으로 공정 이용인지 아닌지 판단한다는 것이었다. 다르게 말하자면, 기존의 저작물에 새로운 표현이나 의미를 추가했을 때에 그것이 공정 이용으로 인정될 수 있는 가능성이 커진다는 것이다. 이외에도 여러 가지 기준이 있었지만, 변형 여부에 대한 기준이 상대적으로 중요하게 작용하는 것 같았다. 해당 규정을 염두에 두고 최대한 수집한 이미지들을 활용하고자 했다.

<로봇이 아닙니다.> 영화 스틸컷

저작권과 관련된 여러 규정을 찾아보았지만 그럼에도 최대한 확실하게 저작권 이슈를 피해가고 싶은 마음이 컸다. 그래서 오픈되어 있는 이미지 데이터셋으로부터 이미지들을 가져오거나, 직접 컴퓨터 화면을 녹화하는 방식을 선택했다. 영화를 완성한 이후에 다시 돌이켜보았을 때 이 선택들은 그래도 꽤 잘한 선택들이었던 것 같다. 특히 오픈되어 있는 이미지 데이터셋들로부터 흥미로운 이미지들을 많이 발견하였다. 그중에는 이게 도대체 자율 주행 자동차 AI를 학습시키기 위한 용도로 어떻게 가치를 가질 수 있는지 의문스러운 것들도 있었는데, 그 이미지들을 본 덕분에 아이디어가 더욱 확장되었다. 그리고 그 확장된 아이디어는 영화에 등장하는 내레이션을 쓰는데에 크게 영향을 미쳤다. 


함께 영화 만들기

저작권과 관련된 문제들은 어찌저찌 해결해보았지만, 촬영 없이 수집된 이미지들만을 가지고 그것들을 재조합하고, 이미지들에 새로운 이야기를 부여하는 과정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호기롭게 촬영이 없는 영화를 만들겠다고 이야기했지만, 막상 각 이미지들이 새롭게 조합되었을 때 어떤 그림이 그려질지 잘 상상되지 않았다. 생각들을 펼쳐나가며 리서치를 하는 과정은 흥미로웠지만, 막상 이 생각들을 시각화하는 것은 다른 차원의 것이었다. 

프로젝트 다큰아씨들

이 과정에서 함께 프로젝트를 진행한 다큰아씨들의 동료들이 많은 힘이 되었다. 사실 작업을 하는 과정 내내 동료들에게 미안함이 컸다. <로봇이 아닙니다.>의 촬영을 하지 않는 영화 만들기의 방식은 나로서도 처음 시도해보는 작업방식이었고, 다큰아씨들 동료들에게도 처음이었다. 그래서 정확히 어떻게 함께 협업을 진행해야 할지에 대한 감이 없었다. 아이디어를 어떻게 시각화해야 할지에 대해 구체적인 계획이 나오지 않은 상태에서 각자에게 역할을 분담하는 것이 쉽지 않았고, 그래서 어떻게든 빨리 아이디어를 구체화해야 한다는 부담에 시달렸는데, 오히려 그 부담 때문에 생각이 진전되지 않았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어느 정도 내 안에서 완성된 그림을 내놓고, 그 안에서 함께 협업을 해야 한다는 압박감도 있었다. 개인적으로 미완성의 모습을 잘 보여주지 못하는, 일종의 강박관념 같은 것이 있는데, 그 강박관념도 부담에 더해져 꽤 오랫동안 우울한 상태에 빠졌었다.

그러다가 한번은 한날한시에 다큰아씨들 동료 3명으로부터 갑자기 장문의 카톡이 왔다. 작업을 진행하는 나의 안위(?)에 대한 걱정들이 섞인 장문의 카톡들이었는데, 그 카톡들이 너무 동시에 와서 그들이 함께 나를 걱정하고, 어떻게 위로해줄지 고민했을 모습들이 상상되어 웃기고 귀여웠다. 감동의 눈물과 함께 너무 궁금해서 혹시 셋이 짜고 카톡을 보냈냐고 물어봤는데 그렇다고 했다. 넷이서 그 얘기를 주고받으며 깔깔거렸던 기억이 난다. 이날 받았던 카톡들은 정말 큰 위로가 되었다.

다큰아씨들 프로젝트를 시작하기 전에 했던 작업들은 많은 경우에 혼자서 고민하고, 혼자서 풀어내는 것들이었다. 다큰아씨들 프로젝트를 시작하면서 ‘함께 영화 만들기’와 ‘서로를 응원하는 존재들’에 대해 많이 이야기하고, 같이 그러한 방향으로 나아가자고 이야기를 했었는데, 막상 내가 연출자가 되어 작업을 하다 보니 이전에 그랬듯 관성처럼 다시 혼자 고립되고 있었다. 특히 촬영을 하지 않는 영화 만들기 방식은 사실상 일반적인 영화를 만드는 과정에서 프로덕션 과정이 없어서 더욱 그랬던 것 같다. 다큰아씨들 동료들은 내가 끝없이 고립되고 내 안에 갇히지 않도록 끊임없이 나를 밖으로 끌어내 주었다. 동료들 덕분에 작업을 위한 동력을 얻었고, 실제로 그 장문의 카톡들을 받은 날을 기점으로 작업이 점차 진전되었던 것 같다. 동료들과 풀리지 않는 지점들에 대해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고, 부족한 부분에 대해서는 같이 리서치를 진행해나갔고, 리서치를 통해 수집한 이미지들을 조합하는 과정에서 계속 피드백을 받으며 점점 구체적인 그림이 잡혀갔다. 그리고 그 그림들을 실제로 영화로 옮겨내기 위해 다큰아씨들 동료 외에도 여러 스탭들이 머리를 맞대어주었다. 그들 덕분에 영화를 완성할 수 있었다. 그들에게 끝없는 감사를 표하고 싶다.

<로봇이 아닙니다.> 영화 스틸컷

완성된 <로봇이 아닙니다.>는 처음 ‘로봇이 아닙니다’ 테스트를 접하고 영화를 만들어야겠다고 결심했던 때와는 조금 다른 방향으로 완성된 것 같다. 사람을 사람으로 판단할 수 있게 해주는 기준 그 자체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고 싶은 마음에 이 작업을 시작했는데, 막상 작업을 진행해보니 사람과 사람이 아닌 것을 가르는 기준 그 자체보다는 그 기준이 어떻게 형성되는가에 대한 이야기하는 영화가 된 것 같다.  

‘촬영을 하지 않는 영화 만들기’ 는, 어떻게 보면 이미 존재하는 이미지를 가지고 작업을 해야 한다는 한계를 갖고 시작하는 작업 방식인 것 같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그 이미지들 안에서 수없이 많은 새로운 맥락을 구축해낼 수 있는 가능성을 갖고 있었다. 그 새로운 맥락을 구축하기 위한 과정은 길을 찾지 못하고 헤매고, 좌절하고, 고통스러워하는 과정을 포함하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에 어떤 새로운 길을 찾았을 때에 느껴지는 희열감은 정말 짜릿했다. 사실 어떻게 보면 꼭 촬영을 하지 않는 영화 만들기 방식으로 만들어진 영화뿐만 아니라, 모든 작업들이 그러한 것 같다. 깜깜하고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동굴 속을 걸어가다가 어느 순간 나만의 출구를 발견하는 그런 과정들. 항상 그래오기는 했지만, 이번에는 특히 내가 그 길을 혼자의 힘으로 걸어오지 않음을 느꼈다. <로봇이 아닙니다.> 작업을 잘 마무리할 수 있게 도와준 다큰아씨들 동료들, 그리고 함께 작업해준 스탭들에게 다시 한번 감사의 인사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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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큰아씨들 프로젝트 시즌1 <로봇이 아닙니다.> 연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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