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FIRST

나의 첫 영화 연출기

가슴에 난 구멍 안쪽, 들여다보기

<심경> 제작기

김승희|영화감독 / 2020-07-02


‘처음’이란 말은 많은 감정을 불러일으키죠. 설렘이기도 두려움이기도 한 그것! 우리가 사랑하는 여성 감독들의 처음은 어땠을까요? 여전히 두근두근 소중한 기억일지,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게 하는 부끄러움의 시간일지 아무도 모를 일입니다. 그래서 준비했습니다. 감독들이 직접 들려주는 ‘나의 첫 영화 연출기’를! 영화제작 과정부터 우당탕탕 좌충우돌, 따뜻한 메시지까지 < MY FIRST >에서 만나보세요!
김승희 감독 필모그래피
2019  <호랑이와 소> 연출
2017 <심심> 연출
          <피의 연대기> 애니메이션 작업
2014 <심경> 연출

<심경> 스틸컷

지난해에 ‘#지난10년을_되돌아보기’라는 트윗이 내 트위터 타임라인에 보인 날이 있다. 2009년부터 2019년. SNS에 업로드는 하지 않았지만 나도 한 번 메모장에 생각나는 대로 적어보았다. 2009년과 2019년, 그 중간. 거기에 그 터닝 포인트가 보였다. 

2014년 9월에 첫 단편 애니메이션 <심경>의 영화제 출품을 시작했다. 지금은 지구인이 77억 명이나 되었지만 2014년에는 ‘60억 명의 지구인 중 한 명은 좋아하겠지’라며 만들었다. 근데 생각보다 많은 사람이 좋아해 줬다. 반면, 당시에 인간 김승희는 극심한 우울증과 불안으로 방구석에 처박혀있었고, 그런 우울한 김승희를 아무도 좋아하지 않았다. 나조차도…. 라고 나는 회상한다. 

©김승희 감독

애니메이션의 제작과정은 그저 기상-밥-작업-밥-작업-작업-운동-잠의 반복이다. 게다가 나는 팀 작업도 아니니 나의 내적 싸움 말곤 할 얘기가 없다. 하지만 <심경>으로 땅바닥에 코 박고 엎드려있던 마음에서 이제는 두 발로 일어날 정도는 되었으니 그 얘기를 해볼까 한다.

죽음과 탄생은 연결돼있는 것처럼 <심경>은 내가 다니던 학교를 그만두고 모든 것에서 손을 놓아버린 날 시작됐다. 오, 이렇게 쓰니 근사하다. 당시 나는 서양화과 4학년 1학기에 겨우 매달려있는 상태였다. 깜깜한 집안 상황과 가족관계가 극에 치닫고 있었다. 이겨낼 수 없는 무기력과 우울증, 조절하기 힘든 분노, 집 밖으로 나갈 수 없게 만드는 불안이 계속해서 나를 휘감았다. 

그 날도 학교 수업 후, 늦은 밤까지 아르바이트를 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우연히 같은 버스를 탄 엄마에게 “나 더는 못하겠어. 밖에 나가는 게 무서워”라고 말했던 순간이 어제 일처럼 생생하다. 그다음 날부터 나는 학교를 나가지 않았다. 그렇게 나의 지리멸렬한 방구석 생활이 시작됐다. 

<심경> 작업 현장 ©김승희 감독

<심경>을 그리기 전, 오랫동안 나는 아무것도 그릴 수가 없었다. 녹다운. 몸과 마음이 모두 지쳐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었다. 방문 밖으로는 나가지 않았다. 나갈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울고, 화내고, 벽에 머리를 찧던 날들이 계속됐다. 어떤 날은 여전히 살아있는 내 자신을 저주했고, 어떤 날은 이제 어떻게 살아가나 고민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농사 전 흙을 뒤집는 것처럼 새 시을 위해 필요했던 시간이었던 것 같다. 좋게 말하면 그렇지만, 솔직히 그런 시간 없이 행복하게 살았다면 훨씬 더 좋았을 것 같기는 하다. 

<심경> 작업물 ©김승희 감독

<심경> 작업 현장 ©김승희 감독

그러던 중 어떤 날, 2013년 구정. 이유 없이 마음에 힘이 붙는 날들이 있다. 이날이 그런 날이었다. 종이 위에 그냥 아무런 계획 없이 손끝으로 나오는 선 그대로 그려보기 시작했다. 동그라미. 완벽하지 않은 동그라미를 수도 없이 그렸다. 얼마나 그렸을까. 종이가 아깝다고 생각이 들 무렵, 원 안에 얼굴을 그려 넣었다. 곧 그 얼굴은 표정을 갖게 됐다. 이때 만든 작업은 <심경>에 들어가지 않았지만 <심경>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둥근 원의 시작이었다. 그렇게 손이 풀리기 시작했다. 

이제 와서 말하지만, <심경> 제작과정이 왜 내 인생의 터닝 포인트가 되었냐면, 이때 단순히 애니메이션 작업뿐 아니라 운동에 빠지게 되었고 잠시 채식도 하게 됐다. 그때 그 생활의 변화들이 고스란히 <심경>에 반영됐다.

<심경> 스틸컷

먼저, <심경>에서는 단발머리에 퉁퉁한 여자가 발가벗고 춤을 춘다. 그게 나였다. 내 안에서 제일 먼저 벗어던지고 싶었던 것은 내 몸에 대한 마음이었다. 엄마의 말을 빌리자면, 코스모스같이 하늘하늘하지 않은, 돼지 같은 딸. 남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예쁜 꽃 같은 딸이, 나는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코스모스 같을 필요도 없었고, 엄마의 트로피가 될 필요도 없었다. 

다 벗고 뛰는 여자를 그릴 땐 상상만으로는 움직임을 분석하기가 어려워서 거울 앞에서 춤을 참 많이 췄다. 다 벗고 췄다. 춤추는 내내, 또 그 움직임을 기억하며 그리는 내내 왠지 모를 해방감을 느꼈다. <심경>으로 독일 라이프치히 국제다큐영화제(DOK Leipzig)에 참석한 적이 있다. 그때 내 작품을 뽑아준 심사위원이 다 벗고 뛰는 뚱뚱이가 새로웠다고 말했다. 특히 유두를 그린 점이 새로웠다고.

점차 나는 집에서 외국의 운동 영상을 조금씩 따라 하게 됐다. 태닝을 한 짙은 갈색 피부, 근육질의 여성 트레이너들과 함께 허공에 ‘잽! 잽! 어퍼컷!’을 수없이 날렸다. 나를 억누르고, 내가 나를 견딜 수 없게 만든 과거의 기억들, 과거의 사람들, 사람과 말. 그 모든 것들을 생각하면서 카운터펀치를 날렸다. 그 마음이 <심경>에 고스란히 옮겨왔다. 담뱃불로 얼굴을 지져도 달리고, 몸이 반으로 갈라져도 달리는, 뱃살을 퉁퉁거리며 밧줄 위를 아슬아슬 달리는 나. 

<심경> 작업물 ©김승희 감독

기억나는 2개의 이메일이 있다. 상영 요청도, 경쟁작 선정결과 메일도 아니었다. 한 사람은 <심경>을 보면 힘이 난다고, 계속 작업하길 바란다고 했다. 또 다른 사람은 <심경>을 보면 살아갈 힘이 난다며 아침마다 틀어놓고 본다고 알려줬다. 아마 그 두 사람도 매일매일을 살아가며 마음속으로 수많은 잽과 어퍼컷을 날려왔던 게 아닐까 싶다. 

또, 아무것도 없는 나를 인정하는 과정이 <심경> 그 자체였다. 남들에게 멋져 보일 필요도 없고, 없는데 있는 척할 필요도 없었다. 식당을 하는 엄마 가게에 나뒹구는 채소 상자를 잘라 젯소를 칠하고 구멍을 냈다. 그걸 햇볕에 살살 말리는 시간이 좋았다. 좋은 카메라는 없었지만 핸드폰은 있었다. HD사이즈 영상을 찍는 데 충분했다. 음악을 만들고 싶었지만 프로처럼 연주할 수 없었다. 하지만 나에겐 누구나 칠 수 있는 악기, 실로폰, 멜로디언, 핸드 드럼이 있었고, 가벼운 마음으로 참 신나게 만들었다. 집 앞 개천가에 들리는 개구리 소리와 귀뚜라미 소리가 참 좋았다. 그 좋아하는 소리를 녹음해 넣었다. 바람에 흔들리는 풍경소리를 사랑했다. 그 소리를 넣었다. <심경> 안에 있는 모든 것이 나였다. 식당 아줌마의 딸. 고졸의 나. 아직 살아있는 나. 걷는 게 좋은 나. 공기를 느끼는 게 좋은 나.

<심경> 스틸컷

마스터 파일이 나오자마자 영화 출품을 하기 시작했다. 매일매일 컴퓨터 앞에 앉아 출품했다. 첫 연락이 온 곳은 미국의 No Budget Film Festival이었다. 그리고 나도 모르는 새에 Innovation Award를 받았다. ‘노 버짓’인만큼 타이틀만 주어졌을 뿐이지만 당시에 나는 심장이 터지는 줄 알았다. 그 후 시상식다운 시상식에서 상을 받은 것은 2015년 부산국제단편영화제였다. 

그때 뭐랄까, 계속 애니메이션을 만들어도 된다고 허락받은 기분이었다. 학교에 다닐 때는 돈을 벌어야 하니까 미술을 그만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다른 쪽을 계속 기웃거렸다. 그때 가슴이 항상 아렸다. 회사에서도 일하고 학원에서도 아이들을 가르쳤는데, 매일 밤 막차를 타고 돌아오는 길이 그렇게 슬펐다. 그런데 그런 내가 작업으로 상을 받다니…. 

<호랑이와 소> 스틸컷

그 후 나는 계속 알바도 하고 외주 일도 하며 살아갈 수 있었고, <심심>(2017)이라는 두 번째 작업도 끝냈다. 올해는 세 번째 작업인 <호랑이와 소>를 출품해 여러 영화제들에서 상영하고, 평창국제평화영화제에서는 한국단편경쟁 부문 심사위원대상을 수상했다. <심경>을 통해 입술을 움직이고 <심심>을 통해 소리를 내는 연습을 했다면 <호랑이와 소>로는 드디어 말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이걸 쓰는 요즘, 다시 터닝 포인트라고 느끼고 있다. 지금까지 해온 3개의 애니메이션을 바탕삼아 내가 앞으로 무슨 작업을 할지 현재의 나도 모르겠지만 그냥 기대하고 싶다. <심경>을 만들 때처럼 앞이 깜깜하지만 그래도 나에게 기대하고 싶은 요즘이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심경>과 <심심>은 모두 비메오에서 ‘Mirror in Mind’와 ‘The Realm of Deepest Knowing’을 검색하면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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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메이션 <심심> <심경> 등 연출, <피의 연대기> 애니메이션 작업 참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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