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FIRST
나의 첫 영화 연출기
극복하지 않기
<군대에 가고 싶지 않은 마음> 제작기
장윤미|영화감독 / 2020-08-27
‘처음’이란 말은 많은 감정을 불러일으키죠. 설렘이기도 두려움이기도 한 그것! 우리가 사랑하는 여성 감독들의 처음은 어땠을까요? 여전히 두근두근 소중한 기억일지,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게 하는 부끄러움의 시간일지 아무도 모를 일입니다. 그래서 준비했습니다. 감독들이 직접 들려주는 ‘나의 첫 영화 연출기’를! 영화제작 과정부터 우당탕탕 좌충우돌, 따뜻한 메시지까지 < MY FIRST >에서 만나보세요! |
장윤미 감독 필모그래피 2020 <고양이는 자는 척을 할까> 감독, 각본, 촬영, 편집 2019 <깃발, 창공, 파티> 감독 2018 <공사의 희로애락> 감독, 촬영, 편집 2017 <콘크리트의 불안> 감독 2016 <늙은 연꽃> 감독 2014 <어머니가방에들어가신다> 감독, 편집, 촬영 2012 <군대에 가고 싶지 않은 마음> 감독 ▶ <콘크리트의 불안> 보러 가기 |
처음에는 오직 다큐멘터리를 만들고 싶다는 마음만 있었다. 그 마음도 막연한데다 계속 떠올랐다 가라앉기를 반복하는 것이어서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상태, 그 정도였다. 마침 그 시기에 지인이 “다큐멘터리 찍어볼래?”라고 물었다. 솔깃했다. “병역거부를 하려는 친구가 있는데 파티를 한대.” 기자회견이 아닌 파티를 하는 병역거부자의 모습을 나로서는 잘 상상할 수 없었다. 반전(反戰)과 평화에 대해 발언하는 게 아니라 사람들과 맛있는 걸 먹으며 축하를 나눈다고? 병역거부를 지지하던 나에게도 낯선 방식이었다. 그래서 좋은 ‘소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촬영은 물론 기획안과 구성안도 제대로 써본 경험이 없었다. 친구는 자신의 작은 캠코더를 빌려주었다. 지금은 거의 쓰이지 않는 6mm 테이프가 들어가는 카메라였다. 한 손에 꼭 맞게 들어왔다. 일단 인물의 이야기를 잘 듣고 충실히 찍어보겠다는 마음이었다. ‘20대 이후 누군가의 이야기를 듣는 작업을 꾸준히 해왔으니 나는 다큐멘터리도 잘 맞을 거야!’ 이 정도의 자신감은 있었다.
그때 나는 왜 다큐멘터리, 그것도 영화로서의 다큐멘터리에 끌렸을까? 10년 전이라 이제는 기억이 가물거리지만 그 시절 자주 생각했던 건 반복에 관해서다. 하루하루를 살고 일주일이 되고 한 달이 되고 일 년이 되는데, 끝내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는 잔상을 남겨두고 싶다, 처음은 살고 두 번째에는 내 방식으로 반복해보고 싶다, 표현하고 싶다. 그리고 글보다는 이미지가 말로 설명하기 힘든 걸 드러내기에 더 좋은 매체이지 않을까, 이런 생각들. 그게 ‘어떻게 재현할 것인가’의 문제라는 건 첫 다큐멘터리를 하고 난 뒤에야 배웠다.
내 첫 다큐멘터리 주인공의 이름은 현민이다. 그는 성을 뺀 현민으로 불리고 쓰이기를 원했다. 나는 카메라를 든 2009년 11월부터 그가 감옥에 가기까지의 4개월을 담기로 했다. 충실히 과정을 담고 인물의 말을 잘 듣다 보면 다큐멘터리를 완성할 수 있을 거라 믿었다. 하지만 현민의 말을 들으면 들을수록 그 믿음은 조금씩 허물어졌다. “왜 병역거부를 하느냐”는 질문에 그는 뚜렷한 답을 하지 않았다. 내가 그렇다고 느꼈다. 무언가 부족하다고 느꼈다. 현민은 “반전과 평화를 지지하는 건 맞지만 그런 언어를 쓰기에는 자신에게 솔직하지 못한 것 같다”고 했다. “자신은 대단한 용기가 있어서 병역거부를 하는 게 아니라 20대 내내 병역 문제로 끙끙대며 악몽에 시달린 찌질한 청년일 뿐이다. 그러니까 이걸 있는 그대로 드러내고 싶다”고 말이다.
<군대에 가고 싶지 않은 마음> 스틸컷
파티에서 그는 10장짜리 소견서를 낭독했다. 무려 10장이었다. 파티가 시작되고, 긴장돼서 한숨도 못 자고 왔다던 현민은 떨리는 목소리로 20대 내내 자신을 괴롭혔던 병역 문제에 관해 마음 아주 깊숙한 곳까지 내려가서 쓴 글을 읽어주었다. 그는 사적이고 내밀한 문제 안에서 헤매고 방황하며 자신의 고통이 권력의 문제와 연결되어 있다는 걸 겨우겨우 이끌어냈는데, 그렇다고 그곳이 종착점 같지는 않았다. 그의 언어는 솔직한데 모호했다. 소견서 낭독이 끝나자 사람들은 박수를 쳤고, 일부는 여전히 궁금해 했다. “그래도 왜 병역거부를 하는지 모르겠다” 심지어 “어쩐지 군대 환송회 같았다”는 사람도 있었다. 주변의 반응에 나는 조급해져 또다시 그에게 묻고 만다. “그러니까 왜 병역거부를 하나요? 왜 감옥을 선택했나요?”
“나는 내 식의 언어를 만들고 싶었던 건데, 그게 기존의 운동의 언어나 정치적 언어와는 조금 다를 수 있다는 생각은 들어요. 근데 나는 이것도 다른 병역거부를 고민하는 사람들이 참고할 수 있는 하나의 언어가 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현민)
이제와 돌아보니 당시의 내 고민이 무척 낡아 보인다. 뚜렷한 이유를 설명하기 어려워하는, 혹은 거부하고 싶은 현민의 고민은 그 이전의 병역거부자들도 했었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다만 굳이 드러내지 않았거나 드러나지 않았을 뿐이다. 병역거부자마저도 강한 영웅으로 만들어지는 것에 대한 반감, 자신의 불안하고 흔들리는 마음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것, 그건 곧 고정된 ‘남성성’에 대한 고민으로 이어진다. 현민이 “병역거부와 병역기피는 구분되지 않는 것 같다”고 말한 것도 그 고민의 연장이었을 것이다. 그때 나는 다른 질문을 던졌어야 했다. 아니, 내가 했던 “왜 병역거부를 하느냐”와 같이 늘상 병역거부자들에게 던져진 질문들과 싸웠어야 했다. 현민의 새로움에 끌렸듯 나는 그의 언어에 맞는 영화 형식을 더 치열하게 고민했어야 하지 않을까?
그는 파티라는 새로운 형식으로 병역거부를 했지만 이후의 과정은 철저히 정해진 법적 절차를 따라야 했다. 현민은 경찰 조사를 받고, 법정에서 최후진술을 하고 1년 6개월형을 선고받는다. 법정에서 나온 그는 울음을 터뜨렸다. 카메라를 들고 있던 나는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지 못했다. 소심하게 줌을 당겨 그림자처럼 검게 앉아 흐느끼는 그의 어깨를 담았다. 사람들이 그의 어깨를 도닥였다.
<군대에 가고 싶지 않은 마음> 스틸컷
보통 병역거부자들은 법정에서 바로 포승줄에 묶여 감옥으로 이동했다는데, 다행인 건지 현민은 일주일 후에 수감된다고 했다. 수감되기 전날 그를 광화문에서 다시 만났다. 그는 법정에서도 판사로부터 “조서와 최후 진술서를 다 읽었지만 잘 모르겠다”는 식의 말을 들었다고 말했다. 그런데 그는 그게 좋았다며, 일단 판사가 자신의 글을 꼼꼼히 봐줬다는 사실과 그럼에도 자신의 언어가 법망에 걸리지 않는다는 건 자신이 원하는 바이기도 했다고. 어쩐지 카메라로 본 그의 얼굴 중 가장 평온해 보이는 표정으로 말하고 있었다.
그 순간 나는 이 인물의 힘을 느꼈다. 그리고 이제야 조금씩 그의 마음과 의지에 더 가까워졌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그는 수감됐다. 촬영하고 싶어도, 만나고 싶어도 그럴 수 없었다. 이후 나는 촬영본을 몇 번 모니터링하고 인터뷰 녹취를 풀어두고는 작업을 중단했다. 무엇하나 제대로 한 게 없다는 생각에 자책했다. 일단 충실히 과정을 기록한다는 계획은 흔들리는 카메라, 엉망인 구도, 줄곧 이상한 곳을 향하는 내 시선으로 인해 좌절됐고, 현민의 말을 연출자로서 충분히 흡수하지도, 그렇다고 제대로 된 거리감도 갖지 못한 채 비슷한 질문에서 계속 맴맴 돌았다는 점도 실망스러웠다. 끝내 설명할 수 없는 걸 표현할 수 있는 매체로서 다큐멘터리 영화에 매력을 느꼈다지만 나는 현실에서 더 선명하고 확실한 걸 찾고 있었다. 그게 가장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나는 취직을 했고, 방송국에서 비정규직으로 2년을 일했다.
그 후 나는 다시 작업을 시작한다. 작업을 덮어둔 지 2년 만이었다. 다행히 그 공백의 시간은 나와 이 작업과의 거리감을 만들었다. 촬영할 당시의 나와 편집하는 내가 분리됐다. 부족한 촬영이지만 거친 그대로를 살리자고 마음먹었다. 방송국에서 정형화된 편집 기술에 익숙해진 나는 오히려 틀이 없고 마구 찍힌 듯한 내 촬영본 영상에서 이상한 해방감(?)을 느끼기도 했다. 말이 좀 이상하지만 공백기가 이 작업을 여유롭게 보도록 도운 건 분명하다. 이제 나는 촬영본에서 좀 다른 것들을 찾기 시작한다. 돌아보면 파티하는 날 가장 기억에 남은 건 그의 긴장된 목소리, 연신 땀이 배어나는 손을 바지에 닦는 모습이다. 거칠지만 그런 이미지들이 찍혀 있었다. 나머지 장면들에서도 현민의 비언어적인 특성을 발견하려고 했다. 주저하는 표정, 여러 번 고쳐 말하는 특성, 무언가를 건네줄 때 몸의 모양이나 중요한 일이 있는 날 그의 걸음걸이 같은 것들. 그의 말에서도 애써 메시지를 찾아내려 하기보다, 물론 그것도 중요하긴 하지만, 말 사이의 여백과 그가 자주 쓰던 ‘그냥, 조금’과 같은 미세한 말들이 주는 느낌을 잘 살리려고 했다. 그런 디테일들이 에둘러 인물의 마음을 잘 드러내줄 거라 믿었다.
제대로 찍지 못했다고 자책했던, 현민이 울던 장면도 내가 끝내 다가가지 않아서 좋았다. 이 과정은 내가 연출자로서 무엇에 더 끌리는지를 알아가는 시간이기도 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제목이 정해졌다. 군대에 가기 싫은 마음도, 군대에 안 가고 싶은 마음도 아닌 <군대에 가고 싶지 않은 마음>. 주저하고 조심스럽게 부정을 유예하면서 더 단단하게 부정하는 느낌, 그런 느낌을 주길 바랐다. 더디지만 나는 결국 작업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
<군대에 가고 싶지 않은 마음> 스틸컷
영화에서 단 한 번 현민이 강하게 말하는 장면이 있다. 사람들 사이에서 그는 응원과 걱정, 질책을 받고 있었다. 누군가 물었다. 앞으로 계속 대한민국에서 살 텐데 주어진 현실을 직시하고 당면한 문제를 피하지 않을 노력도 해야 하지 않겠냐고. 그는 답한다. “나한테는 공부와 글쓰기는 노력하고 싶은 영역이다. 나는 장애인 운동으로 학위논문을 썼지만 중증장애인과 눈을 마주치기는 여전히 쉽지 않다. 이 낯섦과 이물감을 극복하는 건 2~3년으로 안 될 것 같다. 힘든 일이지만 이건 극복하고 싶다. 그런데 군대는 아니다.” 상대가 다시 묻는다. 중증장애인과의 소통 문제와 군대에 가는 건 별개의 문제 아니냐고. 순간 현민은 얼굴을 붉힌다. “그러니까 군대는 제가 극복해야 할 문제가 아닌 것 같다고요. 거기서는 제가 극복해야 할 어떤 요소도 없는 것 같다고요.”
당시 바스트 숏으로 잡힌 현민의 표정과 목소리가 담긴 한 컷이 내 마음 어딘가에 잔상보다 더 강한 무엇으로 남았다. 극복하지 않기. 더 나은 연출자가 되기 위해 내가 극복해야 할 것들이 많지만 그에 못지않게 극복하고 싶지 않은 걸 지켜나가는 게 중요하다고 늘 생각한다. 그게 연출자로서 나만의 고유한 무엇일 거다. 그 한 컷이 그 다짐을 늘 상기시킨다.
현민은 출소 후 몇 년이 지나 『감옥의 몽상』(돌베개, 2018)이라는 책을 냈다. “수형생활의 흩어진 감각, 감정, 기억들”에 관한 내용이다. 그는 경험과 고민을 자신만의 언어로 표현하려는 삶을 계속해나가고 있다.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여겨진 그의 사적이고 내밀한 언어가 실은 얼마나 정치적인 것인지를 새삼 깨달으며 ‘내가 그런 지점을 더 잘 드러낼 수 있는 연출자였다면’ 하는 아쉬움은 여전하다. 그 아쉬움이 작업의 동력이기도 하다.
그저 좋은 소재라며 안일하게 접근했던 나에게 <군대에 가고 싶지 않은 마음>은 다큐멘터리 만들기가 얼마나 마음처럼 되지 않는지를, 마음처럼 되지 않는 걸 내가 어떻게 끌어안을지를, 그리고 무엇보다, 힘이 들어도 내가 다큐멘터리를 계속 잘해보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알게 해준 각별한 첫 작업이다.
PURZOOMER
<군대에 가고 싶지 않은 마음> <어머니가방에들어가신다> <늙은 연꽃> <콘크리트의 불안> <공사의 희로애락> <깃발, 창공, 파티> 연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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