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FIRST

나의 첫 영화 연출기

먼저 걸어온 사람들 덕분에

<늦은 오후> 제작기

주영|영화감독 / 2020-03-19


‘처음’이란 말은 많은 감정을 불러일으키죠. 설렘이기도 두려움이기도 한 그것! 우리가 사랑하는 여성 감독들의 처음은 어땠을까요? 여전히 두근두근 소중한 기억일지,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게 하는 부끄러움의 시간일지 아무도 모를 일입니다. 그래서 준비했습니다. 감독들이 직접 들려주는 ‘나의 첫 영화 연출기’를! 영화제작 과정부터 우당탕탕 좌충우돌, 따뜻한 메시지까지 < MY FIRST >에서 만나보세요!
주영 감독 필모그래피
2019  <계양산> 연출
2018  <늦은 오후> 연출
2017  <오래된 기다림> 연출
2014  <결혼전야> 스크립터

<늦은 오후> 촬영 현장 사진 ©주영 감독

지난해 12월, 퍼플레이 오프라인 상영회 ‘퍼플데이’에서 <계양산> GV를 마치고 나오는데 퍼줌 운영진이 조심스럽게 다가와 원고를 요청했다. ‘나의 첫 영화 연출기’라니! 그런 건 유명해진 감독이 처음을 회상하며 쓰는 거 아닌가? 이제 겨우 첫 발을 떼고 한 걸음 한 걸음이 조심스러운 나에게 그런 거창한 요청을 하다니! 

당황스러웠지만 첫 시작을 기록해두고 싶은 욕심이 들었다. 겁 없이 덜컥 원고 요청을 수락하기는 했는데 과연 내가 무슨 이야기를 쓸 수 있을까?

<어떤 개인 날> 스틸컷

처음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한 건 2009년이었다. 당시 인천여성영화제 프로그래머를 하고 있던 나는 개막작으로 상영된 이숙경 감독님의 <어떤 개인 날>(2009)이 너무 좋았다. 영화를 보고 선정하면서 뭔가 2% 부족한 느낌이 들던 당시에 속이 다 시원해지는 느낌이었다. 개막작을 보고 나오는 관객들로부터 영화가 너무 좋았다며 감사하다는 인사도 수없이 받았다. 

그런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 당장은 맡은 일들이 있어 어렵겠지만 10년 후에는 가능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하며 막연한 꿈을 꾸었다. 그리고 특별한 계획도 없으면서 10년 후의 꿈은 영화감독이라고 소문을 내고 다녔다.

그런데 10년이 지난 2018년, 정말 첫 영화 <늦은 오후>를 찍었다. 영화감독을 목표로 차근차근 계획을 세우며 살아온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인천여성영화제를 지속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기 위해 좌충우돌하며 영화를 만들겠다는 목표는 까맣게 잊고 지낸 시간이 훨씬 더 길었다. 다만 해야 할 일을 하다 보니 어느새 주변에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무언가 나를 채우기 위한 일이 하고 싶어졌던 2017년, 한겨레교육문화센터의 영화연출학교를 등록했다. 그 때만 해도 정말 이렇게 계속 영화를 찍게 될 줄은 몰랐다. 

졸업 시나리오를 써야 하는 6월, 마침 알고 지내던 촬영감독이 간단한 작업을 함께 해보자고 해서 초단편 영상시 <오래된 기다림>을 촬영했다. 내가 적은 글이 화면에 담기고 그것이 완성되는 과정에 빨려 들어갔다.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영화를 만들고 싶어졌다. 현장 경험 하나 없어 막막하기는 했지만 촬영을 맡아줄 사람이 있으니 겁 없이 시작할 수 있었다. 처음 촬영한 화면을 보고 너무 마음에 들어 흐뭇한 미소를 감출 수 없게 했던, <늦은 오후>, <계양산>, <싫다는 게 아니라> 등 연이은 작업을 함께 해준 윤인천 촬영감독이다.

<늦은 오후> 촬영 현장에서 주영 감독(맨 왼쪽)이 모니터를 하고 있다. ©주영 감독

시나리오를 어떻게 써야 하는지도 몰라 그냥 끄적끄적 적어 내려갔다. 한겨레에서 들었던 강의를 되새김질 해보기도 하고, 오래전 들어본 적 있는 『영화 예술』도 들춰보고, 주변 감독들에게 추천받은 『단편 영화 이렇게 만든다』도 뒤적거려봤지만 도무지 시나리오 쓰는 데 어떻게 적용해야 하는지 가늠도 되지 않았다.

그래도 그냥 썼다. ‘모르겠는걸, 뭐. 창피해하지 말고 주변에 물어보고 배우자!’라는 마음으로 써내려 간 시나리오를 주변 사람들에게 보여주면 다양한 방식으로 다양한 의견을 보태주었다. 아니, 사실은 많은 질문을 받았다.

“그래서 하고 싶은 이야기는 뭐야?”

“왜 소설이 아니라 영화야?”

“다큐가 아니라 극영화로 만들고 싶은 이유는 뭔데?”

“어떤 결말을 내고 싶은 거지?”

“주인공은 어떤 성격이야?”

<늦은 오후> 스틸컷

시나리오 작업을 하며 가장 많은 질문을 던져 준 사람은 <결혼전야>(2014), <천막>(2016)을 연출한 이란희 감독이다. 목적을 명확히 할 것과 단편은 적은 장소, 적은 인물을 이용해 간결하게 담아내야 한다는 기준을 만들어줬다.

던져지는 질문 속에서 나만의 길을 찾아가며 수차례 시나리오를 뒤엎었다. 해를 넘기고 2018년 1월,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정리가 되어갔다. 그 무렵 다시 고민이 들었다. 촬영을 시작하려면 제작비가 필요한데 아무리 주변의 도움을 받는다고 해도 몇 백이 필요하다는 현실을 뒤늦게 깨닫게 된 것이다.

‘과연 내가 그렇게 비용을 들여서 영화를 찍고 싶을 만큼 간절한가?’ ‘좋은 영화들이 너무나 많아지고 있고 나 말고도 좋은 작품을 만드는 감독들이 무수한데 왜?’ ‘내가 영화를 찍는 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이번에는 내 머릿속에서 무수한 질문들이 쏟아졌다.

시나리오 기획 단계부터 나의 무수한 방황을 지켜보던 촬영감독이 다시 갈등하는 내게 말했다. “영화를 만들기 전과 후에 보이는 세상이 달라요.”

<늦은 오후> 촬영 현장 사진 ©주영 감독

스태프를 꾸리기 시작했다. 얼마 전 인사를 나눈 감독에게 무작정 조감독을 해달라고 요청했다. 사실 조감독이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도 몰랐다. 우선 조감독을 먼저 찾아야 한다고 하니 작업 경력이 있는 감독에게 부탁을 했는데 첫 만남에서 흔쾌히 수락을 해줬다. 조감독이 정해지고 나니 본격적인 작업 모드로 전환됐다. 조감독은 시나리오를 꼼꼼히 보고 다양한 의견을 내며 시나리오의 비어있는 부분을 채울 수 있게 도와줬다. 그러고 나서 곧바로 캐스팅 준비가 시작됐다.

다시 질문이 시작됐다. 캐스팅을 위해 조감독은 등장인물의 캐릭터에 대해 디테일하게 묻기 시작했다. 내 머릿속에선 그냥 여자와 남자였는데 생각해야 할 것이 너무도 많았다. 그만큼 시나리오에 자세히 담기지 못했다는 뜻이다.

<늦은 오후> 촬영 현장 사진 ©주영 감독

다시 하나하나 생각하기 시작했다. ‘나이는? 왜 그 나이여야 하지? 이미지는? 성격은? 직업은? 습관은?’ 정리되지 않고 흔들리는 나에게 조감독은 다양한 배우들의 사진을 보내줬다. 그리고 배우에게 연락을 하고 일정을 잡고 함께 미팅을 하며 내가 정리해서 말하지 못한 나의 의도를 알아서 파악했다. 그렇게 친분도 쌓기 전에 마음을 내서 작업을 함께 해준 조감독은 <마음의 편지>(2017), <높은 마음>(2019)을 연출한 고경수 감독이다. 조감독이 정해지고 친분이 있던 감독에게 또다시 PD를 부탁했다. 마침 조감독과 워낙 친한 감독이라 이 또한 흔쾌히 수락을! 

촬영 장소는 단 하나, 집 안이었다. 예산도 없고 집을 구할 방법도 마땅치 않은 상황이다 보니 그냥 우리 집에서 촬영을 하기로 했다. 다른 준비보다 캐스팅이 가장 어려운 일이었다. PD까지 합세하여 배우 캐스팅에 집중했다. 조감독과 PD와 인연이 있던 수많은 배우들의 사진을 봤고, 드디어 주인공으로 마음이 가는 배우와 미팅을 잡았다. 

<늦은 오후> 스틸컷

카페에서 배우를 처음 보는 순간 ‘아, 찾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속으로 환호했다. 사진으로 확인하고 출연한 영화를 보면서 마음을 정하기는 했지만 등장하는 순간 포스부터 남달랐고 이야기가 시작된 후 ‘이 사람이다!’ 싶었다. 그렇게 만난 사람이 <파란입이 달린 얼굴>(2015)의 장리우 배우였다.

제작지원도 없는 시나리오에 처음 영화를 찍는 내가 장리우 배우와 작업을 할 수 있었던 건 전적으로 PD 덕이었다. 나를 뭘 믿고 그렇게 자기 주변을 탈탈 털어줬는지 참 고마울 따름이다. 그렇게 함께 해준 PD는 <새들이 돌아오는 시간>(2016), <이장>(2019)의 정승오 감독이다.

<늦은 오후> 스틸컷

시간은 촉박한데 남자 배우가 결정되지 않았다. 이번엔 장리우 배우도 합세했다. 본인이 아는 남자 배우를 한 명 한 명 거론하며 추천을 하다가 마음에 드는 배우를 찾았다. 즉석에서 전화를 걸었다. 그 날 미팅을 했다. 그리고 당일로 캐스팅을 결정했다. 세상에 이렇게 초스피드라니! 그렇게 만난 배우가 김완수 배우다.

우여곡절 속에 배우 캐스팅이 완료되고 리딩과 리허설을 진행했다. 이 또한 머릿속에 계획되어 있지 못한 부분이었다. 리딩을 하는데 내가 더 떨렸다. 리허설을 하는데 무엇을 체크해야 하는지 정신이 없었다. 그나마 배우가 워낙 베테랑인지라 먼저 질문을 했다. “감독님, 여기서 여기로 이동한다는 거죠?” “내가 그럼 이때 이 물건을 짚을까?” 나보고 감독님이라니! 아, 그것도 낯설었다. 내가 정확하게 이야기해주지 못해도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고 있는 배우가 나를 리드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내가 무엇을 봐야 하는지 알아가게 됐다.

현장 리허설을 하면서 배우는 소품까지 챙기기 시작했다. 영화에서 여자 주인공 ‘승연’이 짐을 챙기는 장면이 있는데, 내가 마련해놓은 소품은 도무지 자신이 챙겨가고 싶지 않은 것들이라며 결국은 장리우 배우 본인이 집에서 직접 물건을 갖고 왔다. 그래서 영화 속 승연이 챙겨가는 짐은 모두 장리우 배우의 물건들이다.

<늦은 오후> 촬영 현장 사진 ©주영 감독

촬영은 3회 차로 진행됐다. 낮 장면만 있어서 오후 4~5시에 촬영을 마무리하는 여유로운 촬영이었다. 한 공간에서 두 인물 뿐인 작업이다 보니 첫 작업치고 그리 정신없지는 않았다. 다만 중간에 비가 오락가락하는 바람에 설정을 바꿔야 한다는 의견도 나왔고 추가 신이 필요하지 않느냐는 제안이 나오기도 해서 혼란스럽기는 했다. 흔들리기도 했지만 초보가 현장에서 변수를 만들면 오히려 문제가 생길 수 있다고 판단해 의미 있는 제안들이었으나 마음을 비우고 계획한 그대로 진행했다.  

첫 작업인데 나름 촬영을 잘 마쳤다고 생각한다. 그 생각은 지금도 변함없다. 첫 작업이었으니까. 하지만 그 때의 부족함은 두 번째, 세 번째 작업을 하면서 알게 됐다. 배우의 연기 연결을 볼 줄도 몰랐는데 당시 배우들이 너무 알아서 잘 맞춰 준지라 편집을 하면서도 그것의 중요성을 몰랐다. 콘티를 준비하면서도 어떤 이미지로 어떻게 표현해야겠다는 생각이 모호했는데도 촬영감독이 알아서 잘 잡아주니 으레 그런 줄만 알았다.

<늦은 오후> 촬영 현장 사진 ©주영 감독

심지어 시나리오를 쓰면서 영화에 어떤 이미지를 담아야겠다는 생각조차 뚜렷하지 않았다. 물론 이런 일들이 아직도 어렵다. 그리고 여전히 내가 무엇이 부족한지 모르는 것 또한 많이 남아 있으리라. 

첫 작업에서 나만 빼고 모두 프로였다. 모두들 내가 영화를 할 수 있도록 도와준 선생님이었다. 지금 생각해도 그렇게 좋은 환경에서 첫 작업을 했다는 건 너무 큰 축복이다. 그 덕분에 작업을 마칠 수 있었고, 다음 작업을 준비 할 수 있었다. 어느새 세 번째 작업을 마쳤다. 꾸준한 걸음으로 나도 누군가의 ‘덕분에’가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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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양산>, <늦은 오후> 연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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