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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 같은 날의 오후>, <그녀들을 도와줘>
손시내|영화평론가 / 2020-01-30
<개 같은 날의 오후> 스틸컷
<개 같은 날의 오후>와 <그녀들을 도와줘>를 보며, 어떤 우리가 될까를 고민하다
새해를 맞이하는 길목에서 새삼스레 ‘우리’에 대해 생각한다. 한국 사회에서 동시대를 마주하며 살다 보면, 고달프고 비참한 기분이 들 때가 점차 많아지는 것 같다. 물론 그것이 비단 여기 이곳에서만 느껴지는 기분은 아니겠지만 말이다. 어쨌든 우리가 좀 더 안전했으면, 우리가 좀 더 행복했으면 하는 마음이 수시로 드는 건 사실이다. 그리고 나 또한 누군가에게 믿음을 줄 수 있고 누군가를 안심하게 할 수 있는 사람이길 바라게 된다. 그런데 동시에 이런 고민도 생긴다. 만일 내가 그런 사람이 된다면, 그건 내가 ‘우리’를 이루는 구성원이기 때문에 그런 것일까? 그럴 때 우리를 이룬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걸까. 그건 존재와 결부된 것일까 아니면 행동과 결부된 것일까. ‘우리’가 될 수 있는 특별한 자격과 범주가 있을까, 그렇다면 배제되는 이도 있지 않을까. 그럼에도 우리에겐 우리가 필요하고, 서로에 대한 지지와 연대가 필요하지 않은가. 그렇게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두 편의 영화가 떠올랐다. 바로 <개 같은 날의 오후>(이민용, 1995)와 <그녀들을 도와줘>(앤드류 부잘스키, 2018)다. 두 영화는 모두 여성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고, 그들이 모이는 공간을 주목하며 진행된다. 그런데 여기엔 주의 깊게 살펴봐야 할 좀 다른 지점도 있다.
<개 같은 날의 오후>는 25년 전 개봉해 한국 사회에서 적지 않은 반향을 불러일으킨, 이른바 사회풍자 코미디 영화다. 당대 급격하게 터져 나오던 여성 문제와 인식 개선의 요구를 실어 나르는 대사들, 잡다한 소동과 노골적인 폭력 장면들이 이 영화를 구성한다. 영화는 무더위가 기승이던 어느 일요일, 더위에 지쳐 사소한 시비에도 곳곳에서 짜증을 부리고 싸움을 일으키는 사람들을 비추며 시작한다. 영화의 주 무대는 장미아파트라는 공간으로, 이곳의 주민들 역시 계속되는 더위에 지쳐있다. 초반엔 아파트 주민들의 일상이 얼마간 나열되는데, 대개 집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비춰진다. 이 장면들은 이후 일어날 사건을 예비하며 각 주민들을 소개하는 역할을 하면서, 동시에 여성에게 ‘사적 공간’이 어떤 의미인가를 드러내고 있어 흥미롭다. 익명적이고 사적인 주거 공간 아파트. 그러나 그곳은 여성들이 비가시적 폭력에 무방비하게 노출된 공간이기도 하다. 아내의 외도를 의심하고 집착하는 남편의 정형화된 가정폭력, 가족 구성원에게 욕설을 퍼부으며 집 안의 물건들을 때려 부수는 폭력적인 가장의 행동, 성폭력이라 할 만한 성적 접촉 같은 것들이 각각의 집 안에서 발생한다.
이처럼 사적 공간에서 발생하는 여성에 대한 폭력이 영화 속에 삽입돼있는 건, 어느 정도 당시의 상황과 연결해 생각해 볼 여지가 있겠다. 1990년대 초반, 여성단체와 대학가에서 입법 운동이나 학내 활동을 통해 전개된 ‘반(反)성폭력 운동’은 한국 여성운동사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그건 ‘사적인 것’으로만 여겨졌던 것을 ‘정치적인 것’으로 사고하고 인식의 전환을 꾀하며, 가정 내부의 문제나 여성의 섹슈얼리티와 관련된 문제를 더는 사소한 것으로 취급하지 않게 하기 위한 운동이었다. 물론 이 영화는 그러한 문제와 운동의 정치성이나 배경을 성찰하기보다는 각각을 공감할 만한 사건으로 만들고, 폭력과 억압이 일순간 터져 나오는 순간을 제시하는 전략을 취한다. 계속되는 더위와 더불어 아파트의 변압기가 고장 난 탓에 주민들이 주차장 평상에 모여 잡담을 나누는 가운데, 남편의 폭력을 견디다 못한 정희(하유미)가 밖으로 뛰쳐나온다. 뒤따라 나온 남자가 정희를 데리고 들어가려 하자 지켜보던 여성들이 그를 말리고 급기야 구타하기 시작한다. 곧이어 경찰이 출동하자 여성들은 옥상에 올라가 문을 걸어 잠그는데, 이송 중이던 남자가 사망하면서 상황이 악화된다. 그렇게 여성들이 경찰과 대치하며 옥상에서 보내는 며칠이 영화의 중후반부에 담긴다.
이 영화의 옥상은 여성에게 가해지는 억압과 편견을 토로할 수 있는 장이자 여성들 사이의 차이와 균열도 함께 드러나는 장소다. 우연한 사건으로 옥상에 함께 오른 이들의 면면은 술집 종업원과 식당 주인, 부녀회장과 밤무대 가수 등으로 다양하지만, 각자가 여성으로서 겪어온 다양한 차별을 이야기하며 점차 동질감을 느낀다. 물론 분열은 틈틈이 발생한다. 옥상 위 여성들은 상대에 대한 도덕적 판단으로 불화하거나 서로에게 적대감을 보이기도 하고, 무리에 트랜스 여성이 있음을 알게 되자 자격을 운운하며 그를 추궁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들도 종래에는 모두 권력에 피해 입은 ‘외롭고 소외된’ 우리들이 되며 하나로 어우러지는 모습을 보인다. 이때 남성 권력에 맞선 저항과 연대의 장인 것처럼 보이는 이 옥상이 일시적이고 예외적인 성격을 띤다는 점을 반드시 언급해야 할 것이다. 언젠가는 이들도 옥상에서 땅으로 내려와야 한다. 옥상 아래 그곳은 아마도 덮여있던 여성들 간의 차이가 다시 벌어져 그 차이를 끝내 좁힐 수 없는 곳, 각자가 겪는 문제를 한목소리로 발화할 수 없는 곳일 것이다. 뒤집어 말하면, 공동의 적에 대한 통렬한 싸움과 각각의 차이를 압도하는 연대는 오직 옥상에서만 가능하다. 영화의 마지막, 여성들이 박수받으며 땅으로 내려오는 유쾌한 장면은 그와 같은 문제를 슬쩍 가려버린다. 물론 이를 지적하기는 쉽겠지만, 우리는 영화의 그러한 선택 자체가 은연중에 연대의 난점을 드러내는 거라고 말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럼 이제 땅으로 눈을 돌려보자.
<그녀들을 도와줘>는 스포츠 바 겸 식당인 ‘더블 웨미’의 매니저 리사(레지나 홀)의 정신없는 하루를 따라간다. 텍사스 도로변에 위치한 더블 웨미의 이른바 모토는 리사의 표현처럼 ‘가슴, 맥주, 빅 스크린’이다. 가슴을 강조하고 허리와 배를 드러내는 아주 짧은 티셔츠에 그보다 짧아 보이는 핫팬츠를 유니폼으로 갖춰 입은 여성 직원들이 식당을 찾은 손님에게 서빙과 가벼운 대화 응대 등의 서비스를 제공한다. 리사는 이곳을 유능하게 관리한다. 가게의 곳곳을 유지, 보수하고 직원들을 챙기는 것 모두가 그의 일이다. 요컨대 그는 이 일터가 허물어지지 않도록 지키는 사람이다. 여성의 섹스어필에 기대는 일의 특성상 고객이 선을 넘지 않게 지켜보고 직원을 보호하기 위한 단호한 대처가 필요하며, 마찬가지로 규칙을 지키지 않는 직원들은 조용히 가게 밖으로 내보내야 한다. 에어컨과 TV 스크린 등의 제품이 고장 날 때 바로바로 수리하는 건 물론이다. 또 가끔 더블 웨미의 직원들은 리사의 주도 아래 세차 모금 행사를 하는데, 이는 그의 말에 따르면 ‘안전망’을 구축하는 일이다. 업장 바깥에서 이뤄지는 여분의 수익 활동이기에 불법이지만, 이 돈은 각종 경제적 어려움을 겪는 직원들에게 돌아간다. 리사는 직원들의 자립을 돕고 최소한의 울타리를 제공한다.
이렇게 보면 더블 웨미는 직원 메이시(헤일리 루 리차드슨)가 문득 외치는 것처럼 ‘자매애’(sisterhood)가 강해지는 공간인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영화가 보여주는 하루를 따라가다 보면 그것이 생각만큼 간단한 일이 아님을 알게 된다. 당연한 말이지만, 리사가 하는 일은 시스템을 원활하게 돌아가게 하고 가게의 구조를 재생산하는 성격을 띤다. 그가 이곳을 제대로 관리해 더블 웨미가 허물어지지 않고 지켜진다고 해도, 아니 오히려 그럴수록 더욱 이곳은 자매들의 집이 될 수 없다. 더블 웨미는 노동이 자본과 교환되는 직장이자, 오히려 차별의 속성을 띠는 다인종 정책이 있는 곳이며, 언제나 성추행의 위협에 노출된 공간이다. 또한 이곳 직원들은 생각도, 각자가 이해하는 것도, 불만 사항도, 인종도 다 다르다. 이들을 하나로 묶는 건 아마 자매애보다는 유니폼일 것이다. 영화는 인물들 간의 그 좁힐 수 없는 차이와 무시할 수 없는 삶의 조건을 응시하면서, 더블 웨미라는 공간을 중심으로 ‘우리’를 형성하려는 노력의 어려움을 넌지시 보여준다
사장은 직원들의 삶까지 신경 쓰는 리사를 끝내 해고하고, 이번 모금의 대상이었던 샤이나(제나 크레이머)는 리사의 바람과 달리 폭력적인 남자친구에게로 돌아간다. 살기 위해서 지켜야 하는 일터는 삶을 괴롭히고, 그럴수록 함께 하는 건 더욱 어려워진다. 영화의 후반부, 리사는 더블 웨미와 유사한 콘셉트의 프랜차이즈 매장인 맨케이브의 매니저 자리에 지원해 면접을 본다. 여기서 리사가 면접관과 나누는 대화는 퍽 흥미롭다. 면접관은 이 산업을 규정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고 커다란 하나의 콘셉트이며, 직원들은 그 시스템 아래에서 이 지점에서 저 지점으로 언제든 수월하게 옮겨질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한 명의 노동자로서 아무렇게나 교체되고 대체될 수 있다는 이 조건은 무섭도록 비인간적으로 들리지만, 적어도 영화에서는 그것이 숙명적이거나 패배적으로 느껴지진 않는다. 이 영화의 여성 노동자들을 이르는 가장 정확한 표현은 아마도 리사의 말처럼 ‘길 위의 전사들’일 것이다. 이들은 일시적이고 예외적인 장소에서가 아니라, 끊임없이 움직이고 살아가야 하는 때 묻고 복잡한 땅에서 ‘우리’를 찾는 전사들이다. 영화의 마지막, 더블 웨미를 나와 맨케이브에서 면접을 보고 다시 모인 리사와 대니얼(샤이나 맥헤일), 메이시는 이제 유니폼도 이름표도 없이 술병 하나를 달랑 들고 함께 옥상 위에 선다. 어차피 “거지 같은 직장은 널렸”으니, 삶이 우릴 괴롭힐 땐 소리를 질러버리고 이 고속도로 건너편에서 다시 좋은 친구가 되어 만나면 좋겠다고 이야기하면서. 가진 것이 거의 없는 이들은 꼭 그만큼 홀가분하고 그래서 당당해 보인다.
2020년을 시작하면서, 공통의 이름과 공통의 지반을 먼저 마련하는 우리보다는 각자의 삶의 조건과 싸우면서 부단히 운동을 지속하는 우리가 되길 바라본다. 그것이 옥상에서 땅으로 내려왔을 때나 길 건너에서 다시 마주칠 때, 매번 새롭게 생성되는 만남과 연대를 가능케 하지 않을까. 너무 크고 폭력적이며 도저히 개인의 힘으로 돌파할 여지가 없어 보이는 세상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우리’란 그러한 것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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