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영화를 읽다

너와 나의 일상다반사

<그녀들의 점심시간>

최민아 / 2020-01-30


<그녀들의 점심시간>  ▶ GO 퍼플레이 
구대희 | 2016 | 다큐 | 한국 | 67분

<그녀들의 점심시간> 스틸컷

가장 일상적인 것은 흔히 가장 무신경한 것이 되어버리곤 한다. 말뜻 그대로 ‘날마다 반복’되는 일상의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일상을 소중히 대하는 것에 자못 서툴거나 그럴만한 여유가 없거나 혹은 스스로 과분히 여길지도 모르겠다. 자신을 가장 투명하게 비추는 거울과도 같지만, 그 안의 나를 바로 바라보고 깊은 사유를 불러오기까지는 아주 오랜 시간이 걸려 불현듯 찾아올 뿐이다.

영화 <그녀들의 점심시간>(구대희, 2016)은 여성 10명의 점심 식사를 비춘다. 나이도 하는 일도 각기 다른 여성들의 일상 한가운데서 이들이 어떤 점심시간을 보내는지 담백하게 관찰하고 기록한다. 우리는 그 일상을 가만히 바라보며 여성들의 다층적인 삶을 살피고 공감하는 자신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깊은 내면까지 가지 않더라도 그저 일상을 지켜보는 것만으로 자연스레 나를 겹쳐 보이며 보편적 정서와 유대를 갖게 되는 경험과 기억의 확장. 이 영화의 가장 원초적이고 집약적인 힘은 이로부터 발현된다.

<그녀들의 점심시간> 스틸컷

일상다반사(日常茶飯事)
날마다 반복된다는 ‘일상’에서 ‘차 마시고 밥 먹는 일’이라는 강조를 더한 ‘일상다반사’라는 말을 떠올려보았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밥 먹는 일상’이란 과연 무엇일까. 감독은 어느 날 집에서 혼자 바닥에 대충 점심을 차려 먹던 중 문득 이 점심이 나의 인생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초라하고 궁상맞고 외롭고, 점심이 누군가의 삶을 보여주는구나.’ 영화는 여기에서부터 비롯된다. 여성들이 어떤 식사를 하는지, 여성들에게 식사라는 것은 어떤 의미인지 살피며 여성의 삶을 재발견해나간다.

첫 번째 인물로 등장하는 취업준비생 여성은 일주일이 지난 밥을 익숙한 듯 들추고 최소한의 설거지로 자신에게 허락하는 한 그릇의 식사를 준비한다. 그에게 식사다운 식사는 누군가를 만날 때에나 가능한, 드물고도 특별한 비일상으로 존재한다. 또 다른 성장을 고민하는 직장인 여성의 점심 식사는 저렴한 가격에 반찬을 다양하게 먹을 수 있는 가성비에 의해 선택된다. 사회초년생의 성장이라는 것은 힘듦을 통해서만 가능한 것인지 스스로 물었고, 반복되는 일상에 특별함을 주기 위해 맛있는 저녁 식사를 약속하게 되었다. 이들에게 특별한 식사를 가능케 하는 것은 비일상이 끼어들거나 제법 큰 결심을 통해서인 것이다.

배우로 일하며 평소 일반 성인의 절반도 먹지 않았던 한 여성은 임신하게 되면서 인생에서 유일하게 다이어트를 하지 않아도 되는 시기를 맞이했다고 한다. 임신을 통해 그동안과 다른 세계와의 교감이 생겨났듯, 지난날의 자신은 먹지 못한 것이 아니라 먹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스스로를 ‘빛 좋은 개살구’라 칭하는 전문직 여성은 사회적으로 성취를 이뤘으나 식사와 같은 가장 기본적인 시간에는 왜 혼자일까 의문이 일었다. 그렇다면 사회인으로서의 나와 여성으로서의 나는 어떻게 다를 수 있을까, 결국 밥 짓는 일로 귀결되었다.

여성에게 있어 식사(食事)라는 것이 단순히 ‘먹는 일’만이 아님을 새삼 확인하는 순간들이다. 가장 일상적인 일이지만 마음껏 할 수 없으며 내가 먹는 일뿐만이 아닌 남을 먹이는 일로 자연스레 연결되는 것, 그것이야말로 여성들에게 또 다른 의미에서의 ‘일상다반사’일 것이다. 우리는 왜 스스로를 이렇게 규정할 수밖에 없었을까?

<그녀들의 점심시간> 스틸컷

여성의 노동일상 너머
어린 아이들을 먹이고 어르며 틈틈이 식사를 겨우 마치는 엄마의 점심은 분주하다. 온전한 자신의 의지만으로 시간을 보내는 것은 불가능하며, 나보다 우선하는 존재를 돌보고 먹이는 일이 중요해진다. 카메라는 식탁에 마주 앉은 두 여성에게 꽤나 오랜 시간을 할애한다. 그저 정면에서 응시하며 시간의 경과를 따라가는 것만으로도 어떤 고단함이 전해진다. 식당에서 누군가의 식사를 책임지는 이들의 점심시간도 다르지 않다. 남들의 점심시간이 지난 후에야 비로소 자신의 점심시간을 가질 수 있는 이들, 손님과 한바탕 전쟁을 치른 후 동료와 그때그때 먹고 싶은 밥상을 차려 든든히 한 끼를 채운다. 이처럼 어느 점심시간을 통해 식사라는 것은 누군가의 노동에 의한 것임을 확인케 하며 여성들의 또 다른 삶을 들여다볼 수 있다. 여성으로 대변되지만 노동으로 여겨지지 않는, 여성이 주를 이루지만 그 특별함을 의미화하지 않는 노동에 대해서도 카메라는 말을 건넨다.

한편, 좋아하는 것을 즐기며 자신만의 일을 해나가는 ‘그녀들의 점심시간’을 통해 노동하는 여성들의 단면과도 마주한다. 운전도 좋고 창밖 구경도 하며 돈도 벌 수 있어 좋지만, 여성이라는 이유로 혼자 식당에서 밥 먹기도 어렵다는 택시운전사는 운전 중 김밥으로 한 끼를 때운다. 언제 손님이 탈지 모르니 이마저도 녹록지는 않다. 좋아하는 록 음악을 들으며 매장을 지키고 손님과의 대화에서 즐거움도 찾는 또 다른 여성은 남편과 함께라면 잘 차려 먹지만 혼자서는 영 그렇게 되지 않는다며 매장 한 켠에서 의자를 밥상 삼아 식사한다. 즐겁게 일하지만 일터에 홀로 서는 중년 여성이 갖는 점심시간의 한계가 고스란히 전해진다.

여성들의 이와 같은 일상은 앞서 언급한 ‘일상다반사’의 또 다른 모양새와 다름없을 것이다. 여성의 노동을 사회가 어떻게 인식해 왔는지, 그 안에서 임금노동과 가사노동은 여성들에게 어떻게 스며들어 왔는지 너무 익숙해 오히려 지나쳐버리고 마는 것들을 똑바로 바라보게 함으로써 여성의 삶을 재인식하게끔 한다.

<그녀들의 점심시간> 스틸컷

함께 밥을 먹는다는 것
오전 11시에서 오후 1시까지 점심시간이 들쭉날쭉하지만 집에선 맛없던 밥도 동료들과 둘러앉아 함께 하면 더 맛있다는 여성들. 고된 업무와 경마장 특유의 감정싸움에 지치지만, 여성이 주를 이루는 청소 노동의 현장에서 이들은 여성이 모여든 자리 특유의 긍정적 에너지로 서로를 북돋는다. 고단하지만 함께 식사하며 의지하고 이러한 일상적 경험들이 쌓여 연대의 감각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등장하는 인물인 경로당 회장은 처음부터 그러려던 것은 아니었으나 어느새 경로당 식구들의 한 끼를 책임지고 있다. 누군가는 해야 할 일, 내가 하겠다는 생각에 이르기까지는 그것이 다름 아닌 ‘밥 먹는 일’이고, 소식이 뜸할 때면 서로를 살피는 ‘식구(食口)’이기 때문이지 않았을까.

앞서 등장했던 여성들의 면면에서도 이러한 연대의 감각을 우리는 줄곧 목격할 수 있었다. 식탁에 마주 앉아 아이들에 둘러싸여 식사하는 엄마이기 이전에 오랜 친구인 두 여성, 메신저로 점심시간을 알리며 직장 생활의 속마음을 털어놓을 우리만의 시간을 기다려온 여성 동료들, 식당에서 단둘이 일해오며 척하면 척, 함께라면 못 하는 것이 없을 거라는 여성들의 파트너십까지. 이처럼 먹는다는 행위가 불러일으키는 공동체와 연대의 느낌이 여성들의 점심시간에 묻어 있었다. 그리고 무형이나 서로를 작용케 하는 기운으로 퍼지는 여성들의 연대 곁에는 또 다른 연대의 마음으로 자리를 지키는 카메라가 있었다.

<그녀들의 점심시간> 스틸컷

지켜봄이라는 연대
영화 <그녀들의 점심시간>의 카메라는 대상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 채 시종일관 말없이 관찰한다. 각자의 일상을 담백하게 보여주며 그 원형의 힘을 통해 이들 여성의 삶이 개별의 것을 넘어 우리네의 것으로 확장해 나갈 수 있게 한다. 삶의 한 단면을 가장 가까이에서 있는 그대로 나타내며 이를 통해 ‘한 사람’과 ‘여성들’의 일상과 노동, 삶과 연대의 감각을 전하는 것이다. 넘치게 파고들거나 무언가로 정의하지 않으며 어떤 삶의 방식과 사유를 결속시키는 조용한 힘을 느낄 수 있다.

감독의 말처럼 ‘내 삶이기도 하고 과거이자 미래이기도 한’ 누군가의 일상과 이 기록은, 그녀들의 이야기이자 나의 이야기이며 우리의 이야기일 것이다. 미처 생각지 못했거나 어쩌면 알고도 모른 체했던 각자의 존재 의미를 다시금 생각하고 서로를 지켜봄으로써 우리는 동료가 될 수 있을 거라 믿는다. 그리고 여성들이 자기 자신을 가장 우선할 수 있게 되기를, 그것이 우리의 ‘일상다반사’가 되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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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디다큐페스티발 사무국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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