ZOOM IN

망설이지 말고, 페미니즘 돋보기

나도 네 꿈을 꾼다는, 20년 후의 고백이 담아낸 것

<윤희에게>

송아름|영화평론가 / 2020-01-23


< ZOOM IN >에서는 여성 영화, 감독, 배우, 캐릭터 등을 퍼줌만의 새로운 시각으로 들여다보고 다양한 관점에서 이야기해보고자 합니다. 여러분들도 망설이지 말고, 페미니즘 돋보기!

<윤희에게> 스틸컷

박상영의 소설 『알려지지 않은 예술가의 눈물과 자이툰 파스타』(문학동네, 2018)에서는 이성애자들이 가지고 있는 동성애에 대한 우스우면서도 잔인한 프레임을 확인할 수 있다. 마치 자신의 ‘일기’처럼 쓴 게이 감독의 영화에 대해 몇몇 동료들은 ‘너무 발랄하여 깊이가 없으며 고통 없이 정체성을 받아들이는 동성애자가 어색해 나이브하다’고 평가한다. ‘그냥 일반인들의 연애 얘기랑 다른 지점 없이 술 먹고 춤추고 성관계하는 게 전부’인 그 영화가 동성애에 대한 ‘성찰’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감독의 정체성을 알지 못한 그들의 평가는 (사실 안다 해도 평가는 그리 달라지지 않았겠지만) 이성애자들이 생각하는 동성애의 기본 조건, 즉 고통받아야 하고 자신의 성적지향을 인정한다는 것 자체를 경계하다 다시 고통받아야 하며, 사랑을 즐긴다는 것 자체도 궁극적으로는 고통이어야 한다는 ‘성찰’이라는 이름의 폭력을 드러낸다. 고상한 척, 이해하는 척, 그들의 고통에 공감하는 척하지만 사실 이 모든 ‘척’들은 소수자는 고통받아야 한다는 명제를 전제로 한 위선이다. 황당하며 낯부끄러워지는 말들이지만 누군가의 사랑에 대해, 누군가의 감정이 타인의 인정을 받기 위해 고통이 필요하다는 것은 안타깝게도 그리 큰 의심 없이 수용되어 온 듯하다.

<윤희에게> 스틸컷

<윤희에게>(임대형, 2019)에서의 쥰(나카무라 유코)에 대한 윤희(김희애)의 답장 말미에서 “나도 네 꿈을 꿔”라는 고백을 들으며 문득 생각났던 박상영 소설의 한 부분은 저 네 음절을 말하기 위해 눌러왔던 20년이 어떤 세월이었을지를 생각하게 했다. 이성애를 전제로 한 멜로는 코미디나 호러, 스릴러 등의 분위기를 앞세워 다양한 냄새를 풍길 수 있도록 변주해 왔지만 동성애에 관한 한 그 영역은 고정된 것에 가까웠다. 이는 물론 재현의 문제를 넘어 현실의 인식과 맞닿아 있는 것이기도 했다. 일반인들의 연애 이야기와는 달라야만 한다는 명목 아래에서 동성의 관계는 늘 묵인되거나 사랑을 무화시키는 단어들(가령 브로맨스나 워맨스, 걸크러쉬 등)로 뭉뚱그려졌고, 그것은 곧 감정을 삼키는 것을 넘어 뻔히 ‘사랑’이라 지시하는 대사가 등장했음에도 ‘그럴 리 없는’ 상황들로 치부되기 바빴다. 그래서 동성애를 다룬 영화들 그리고 이야기들은 사랑으로 묘사하는 당연하고 간단한 방법을 굳이 ‘깊이’가 있어 보이는 방법을 찾아 우회했고, 그 결과는 고통의 확인이라는 그리 좋을 수 없는 방법들이었다. <윤희에게>에선 바로 이 상황들을 그리고 그 속에 던져져 살아야 했던 누군가의 삶 전체를 매우 적절한 단어로 설명해냈다. ‘형벌’. 윤희는 자신의 삶을 그렇게 불렀었다.

윤희가 자신의 사랑과 그 기억으로 이어진 삶 전체를 형벌처럼 느꼈던 것은 분명 자의가 아니었다. 사람의 감정에 대해 너그럽지 못한 것, 아니 허가를 요청하는 너그럽다는 표현 따위와 상관없이 그저 있는 것을 있다고 보지 않은 것은 윤희의 선택을 벗어난 문제였으니까. 윤희는 어떠한 생기도, 관계에도 관심을 끊은 채 말 그대로 벌 받는 듯한 삶을 이어갔다. 물론 이는 윤희의 성격일 수도, 회피일 수도 있었다. 결론적으로 쥰과의 헤어짐은 그의 상대에 대한 부인(否認)을 고스란히 받아들인 것이었다. 그러나 이를 비겁한 선택이라 생각한다면, 윤희가 이에 맞서 싸워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오히려 ‘사랑’이 필연적으로 ‘투쟁’이나 ‘용기’라는 이름으로 쟁취해야 대상이었는가에 대해 질문해야 한다. 왜 윤희와 쥰의 사랑은 싸워서 얻어야 하는 처절한 것으로 놓여야 하는가. 오히려 어색한 이 가정을 피하며 윤희의 수긍과 그 이후의 무기력을 드러내는 것, 그것은 사랑이 지나간 자리에 대한 자연스러운 선택이 아니던가. <윤희에게>는 그렇게 그들의 삶을 다시 돌아보게 했다.

<윤희에게> 스틸컷

생각해보면 쥰을 사랑한다는 그 확신 이후의 것들은 윤희의 선택사항이 될 수 없었다. 쥰을 사랑한다는 이유로 정신병원에 보내져야 했고 ‘병’이 나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누군가와 결혼을 해 아기를 낳아야 했다. 그리고 생활이라는 무게가 있었고, 어쨌든 살아 있기에 삶이라는 시간이 남아 있었다. 그래서 모든 것을 숨긴 채 죽은 사람처럼 살아가는 것, 그것이 윤희와 쥰이 행할 수 있는 가장 최선의 선택이었을 것이다. 이 거대한 짐 덩어리가 쌓아 올린 그들의 삶은 새로운 누군가에게 마음을 열 수 있는 기회조차 완벽히 앗아간, 멈춰버린 것이었다. 윤희는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을 하며 어쩌다 이어진 타인과의 대화는 일자리를 앗아가는 결과를 낳을 뿐이었고, 쥰은 오랫동안 보아온 지인에게서 자신에게 고백하려는 긴장과 수줍음을 읽어냈을 때 숨길 수 있는 것은 굳이 말하지 않는 편이 낫다는 말로 그의 입을 막는다. 누군가와의 연결이 어떤 일을 불러올지에 대한 공포는 아마도 두 사람이 20년 동안 눌러 담아 온, 그리고 그 사이에서 벌어진 무수한 공허함의 흔적으로 인한 것이었을 테다. 바로 이 시간이 <윤희에게>에는 남아 있다. 이는 <윤희에게>가 서로의 사랑을 믿었던 너무도 짧은 찬란함을 지나, 그 기억을 고스란히 안은 채 조금씩 서로를 향해 닳아간 ‘중년’ ‘여성’을 스크린에 세우는 것으로 성취한 일이었다.

젊은이들의 방황처럼 혹은 그 속에서 일어날 수 있는 우울하고 자극적인 몸부림으로 채웠던 묘사들을 치웠을 때, 불쑥불쑥 솟아오르는 자신을 누르는 삶이 어떤 모습인지 그리고 한때의 잘못된 선택과 같이 교정될 수 있을 것이라고 무시당한 감정이 얼마나 오래도록 그들을 괴롭게 했는지를 차분히 보여줄 수 있었다. 엄연히 존재하는 감정이기에 동의를 물을 이유도 필요도 없는 일이건만, 혐오와 반대라는 우스운 표 더미가 누군가의 생을 어떻게 앗아가고 있었는지 역시 분명히 드러낼 수 있었다. <윤희에게>는 이 모든 것을 이해하지 못할 이들을 위한 ‘성찰’이 아닌 사랑하는 이에 대한 그리움이라는 당연한 감정으로 설명하면서, 누군가의 엄마로만 자리했던 ‘중년’ ‘여성’의 가늠할 수 없는 깊이로 표현하면서 미처 드러내지 못한 긴 그리움으로 세월을 그렸을 많은 이들의 삶을 퀴어 영화의 영역에 포함시키고 있었다. 나보다 오래 살아온 누군가의 그리움은 늘 무시해도 되는 것이었고, 그것이 동성일 수 있다는 점은 상상의 범주를 벗어나는 일이기에 완벽하게 배제되어 있던 이 사랑들이 다시 이야기될 수 있는 기회를 찾은 것이었다.

<윤희에게> 스틸컷

아마도 쥰은 자신의 고모가 아니었다면 윤희에게 써왔던 그 편지를 부치지 못했을 것이다. 아니, 쥰이 견딜 수 없을 때마다 윤희를 떠올리며 편지를 쓰지 않았다면 두 사람은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윤희는 딸 새봄(김소혜)이 먼저 편지를 보지 않았다면 늘 꿈에서까지 그리워했던 이를 찾아가지 못했을 것이다. 아니, 윤희가 20년 동안 쥰의 이름을 품고 있지 않았더라면, 그의 주소로 찾아가 쥰의 뒷모습을 보지 않았더라면 두 사람은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두 사람은 선뜻 서로에게 향할 결정을 내리지 못했을지라도 찰나로 서로를 알아볼 수 있을 만큼 서로를 기다렸고, 서로가 서로를 그리워했다는 사실을 확인한 것만으로도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었다. 바로 당신을 떠올리는 것만으로, 내가 좋아할 수밖에 없던 네가 날 생각했다는 것만으로 가슴 뛰는 그 기억이 떠오르는 것, 켜켜이 쌓인 눈처럼 조금은 무거워도 결국엔 녹아 스며들 사랑을 확인하는 것, 여기에 굳이 덧붙일 것이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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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한국영화평론가협회 영평상 신인평론상 수상,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시네마 크리티크 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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