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FIRST

나의 첫 영화 연출기

<어른도감> 제작기

총 29회의 촬영현장을 중심으로

김인선|영화감독 / 2020-01-16


‘처음’이란 말은 많은 감정을 불러일으키죠. 설렘이기도 두려움이기도 한 그것! 우리가 사랑하는 여성 감독들의 처음은 어땠을까요? 여전히 두근두근 소중한 기억일지,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게 하는 부끄러움의 시간일지 아무도 모를 일입니다. 그래서 준비했습니다. 감독들이 직접 들려주는 ‘나의 첫 영화 연출기’를! 영화제작 과정부터 우당탕탕 좌충우돌, 따뜻한 메시지까지 < MY FIRST >에서 만나보세요!
김인선 감독 필모그래피
2017  <어른도감> 연출
2016  <수요기도회> 연출
           <출출하 여자 시즌2> 연출
2015  <암살> 연출부
2014  <알레르기> 연출
           <아빠의 맛> 연출
2012  <스테파니> 연출
2010  <니마> 스크립터
           <시선 너머> 스크립터
           <맛있는 인생> 스크립터

인천 주안4동 주민센터에서 이재인 배우(왼쪽)와 엄태구 배우 ©김인선 감독

1회차: 주민센터와 가정법원 

첫 촬영지는 인천 주안4동 주민센터였다. 주민센터 신은 영화의 초반 장면이자 스태프, 배우 모두에게 비교적 부담이 적은 신이었다. 촬영 시작 전 제정주 피디님의 안내에 따라 ‘모두가 알아야 하고 모두가 노력해야 하는 촬영장 내 성희롱 예방 수칙’을 함께 읽었다. 그리고 첫 슛이 들어갔다. 주민센터 신을 무리 없이 찍고 근처 가정법원으로 이동했다. 판사 역의 이정은 배우가 첫 촬영에 함께해서 무척 좋았다. 

<어른도감>에서 경언 역을 연기한 이재인 배우 ©김인선 감독

<어른도감>에서 재민 역을 연기한 엄태구 배우 ©김인선 감독

첫 촬영은 서로를 파악하는 시간이다. 현장의 많은 사람들이 다들 이재인 배우를 좋아하고 잘 챙겼다. 고마운 일이지만, 나는 스태프들에게 2~3회차에는 되도록 재인에게 관심을 자제해달라고 언질을 줬다. 경언(이재인)이 아빠를 떠나보내는 쓸쓸한 장면을 찍어야 했기 때문이다. 대사 없이 경언의 얼굴만으로 슬픔을 표현해야 했기에 재인이 극에 몰입할 수 있도록 돕고 싶었다.

연출자가 배우의 연기 스타일을 빠르게 파악하고 그에 맞는 방법론을 펼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엄태구 배우는 집중력이 아주 뛰어나다. 촬영 직전까지 에너지를 끌어올려 슛이 들어가면 다 쏟아냈다. 처음엔 그런 스타일을 파악하지 못하고, 리허설을 하느라 감정이 제일 좋은 때를 놓쳐버렸다. 그래서 리허설을 최대한 드라이하게 하고, 세팅을 모두 마무리한 다음 배우가 연기를 제대로 할 수 있는 상황을 만들려고 노력했다. 힘겹게 끌어올린 에너지를 놓치지 않도록.

<어른도감>에서 점희 역을 연기한 서정연 배우 ©김인선 감독

엄태구 배우(왼쪽)와 이재인 배우 ©김인선 감독

9~10회차: 희약국
오점희(서정연)가 운영하는 약국 촬영은 금천구 시흥동에서 진행됐다. 주택가에 위치하고 혼자 운영할만한 규모의 약국! 촬영하게 된 곳은 우리가 찾던 약국 형태에 가장 가까웠다.

약사님은 여러 차례 만남 끝에 신중하게 이틀간의 촬영을 허락하셨다. 단, 조건이 있었다. 극중 점희가 길냥이에게 밥 주는 장면을 넣어달라는 것이었다. 캣맘인 약사님의 부탁이 예쁘기도 하고, 약국 섭외를 무조건 성공시켜야 해서 당장 시나리오에 추가했다.

우리에게 주어진 이틀간 총 12개의 약국 신을 모두 소화했다. 편집에서 삭제된 약국 몽타주의 경우, 다수의 시흥5동 주민들이 출연했다. 동네에서 인정 많기로 소문난 약사님의 덕망 덕분이었다.

경언의 집에서 이재인 배우 ©김인선 감독

경언의 집에서 이재인 배우(왼쪽)와 엄태구 배우 ©김인선 감독

12~18회차: 경언이네 집
경언의 집은 촬영 분량이 아주 많았다. 극의 초·중·후반이 골고루 배치된 장소고, 각 신의 분위기와 리듬, 인물의 감정이 다 달랐다. 경언이 홀로 슬픔을 감내하는 초반 신부터 재민(엄태구)이 들어와 낯선 광경을 만들어내는 신, 두 사람이 친밀해지다가 격하게 다투는 신까지. 갇힌 공간 안에서 각각의 신에 변화를 주고자 다양한 동선을 만들었다.

배우들은 같은 장소에서 밭은 시간 차를 두고 여러 감정을 연기해야 하니, 톤 잡는 것을 어려워 했다. 어려운 건 나도 매한가지였다. 어떤 부분은 감독인 나에게도 베일에 휩싸여 잘 보이지 않았다. 그런 부분들은 열어두고 배우에게 의존하기도 했다. 다른 접근을, 즉흥적인 다른 연기를 보여주길 유도했다. 그래서 배우들은 연기 톤을 여러 버전으로 시도해볼 수 있었다. 다행히 엄태구 배우는 다르게 해보는 것에 대해 매우 적극적이었다. 재인 배우는 그런 방식을 처음에는 낯설게 느끼고 어려워 했지만 결국 잘 해냈다.

경언의 집 촬영을 통해 코미디 연출이 굉장히 어렵다고 느꼈다. 현장에서 재밌게 느낀 장면이 편집실에서 보면 과잉인 것이 많았기 때문이다. 현장 웃음소리를 믿으면 안 된다는 걸 절감했다. 그 숏 자체는 웃겨서 뒤집어질지 몰라도, 앞뒤 숏 사이에 들어가고, 앞뒤 신 사이에 배치되면 톤이나 리듬이 완전히 어긋나는 경우들이 있었다. 코믹 대사를 진지하게 했을 때 완성된 영화에서 대사의 코믹한 면이 더 살아나는데, 현장에서는 그걸 놓치고 말았다. 결국 전체를 고려해 경언 집에서 촬영된 신 중 코믹 신 세 개를 최종 편집에서 뺐다. 코미디야말로 영화 전체가 감독 머릿속에 그려져 있는 가운데, 부분 부분을 정교하게 만들어야 하는 장르란 걸 깨달았다.

<어른도감> 촬영현장 ©김인선 감독

경언 집은 데이/나이트 신이 섞여 있어 밤샘 촬영이 많았다. 실내 촬영이라 추위는 면했지만 스태프, 배우 모두 잠과의 사투를 벌였다. 감독인 나도 이렇게 눈꺼풀이 무거운데 다른 스태프들은 오죽할까 싶었다. 경언의 집 촬영 중간에 성탄절이 껴있었는데, 재인 배우가 손수 만든 편지와 선물을 스태프들에게 나눠줬다. 체력적으로 많이 지쳤을 텐데도 쉬는 시간을 스태프들을 위해 썼다는 그 마음이 고맙고 예뻤다.

점희의 집에서 서정연 배우(왼쪽)와 엄태구 배우 ©김인선 감독

<어른도감> 촬영현장 ©김인선 감독

21~22회차: 점희 집
점희의 집은 촬영 이틀 전 집을 빌려주기로 한 분이 잠수를 탔다. 대관절 점희 집을 하루 만에 어디서 찾는단 말인가. 당시 서정연 배우는 두 개의 드라마 촬영을 병행하고 있었고, 점희 집을 찍기로 한 날짜는 오래전부터 드라마팀에 양해를 구해 겨우 빼놓은 거였다. 점희 집 분량을 뒤로 미루는 안을 검토하는 중에 한국영화아카데미 직원께서 본인의 집을 빌려주겠다고 하셨다. 그 집으로 촬영 하루 전 확인 헌팅을 갔다. 프리 프로덕션때 계획한 공간 세팅과 인물 동선을 다 버려야 했지만, 아쉬우면 아쉬운 대로 촬영은 계속되어야 했다. 장소가 급작스럽게 바뀔 때마다 미술팀은 새로운 공간에 맞는 세팅을 준비해야 했기에 무척 힘들었을 텐데도 매번 주어진 조건에서 최선을 다해주었다.


인왕산 전망대에서 이재인 배우(왼쪽)와 엄태구 배우(오른쪽) ©김인선 감독

23회차: 인왕산 전망대

재민과 경언의 야경 신은 크랭크인 직전 추가된 장면이다. 두 사람 사이에 진심이 마주하는 순간을 보여주고 싶었다. 인왕산 전망대에서 촬영을 준비하는데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점점 빗발이 굵어져서 여차하면 촬영을 접어야하는 상황이었다. 그렇게 애를 태우더니 10여분이 지나자 비가 그치고 사위가 포근해졌다.

그날 촬영에서 본 재인의 얼굴은 경언이 그 자체였다. 연기하고 있다는 느낌이 없고, 재인과 경언의 경계가 사라진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그 날 엄태구 배우의 연기는 ‘황재민’이란 사람을 좋아하지 않을 수는 있어도 미워할 수는 없겠다는 확신을 줬다.


<어른도감> 촬영현장 ©김인선 감독

달리는 차 신

차 신이 많고, 중요 대사들이 대부분 차 안에서 이루어졌다. 제작 여건상 슈팅카를 쓸 수는 없었고, 대부분을 배우가 직접 운전하면서 찍었다. 운전과 연기를 동시에 하는 건 아주 위험하고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촬영 전에 상암동의 한갓진 도로를 찾아 연기하면서 운전하는 연습을 했다.

차 신은 5, 7, 24, 28회차에 골고루 분포되어 있었고, 낮 신보다 밤 신이 많았다. 초반에는 배우가 운전하면서 연기를 하는 게 불안했고, 그때그때 연기 피드백을 줄 수 없어 답답했다. 촬영용 차가 한번 주행을 다녀오는 동안 출발지에서 기다렸다가 찍힌 걸 보고 수정해서 다시 주행을 가는 식이었다. 그러다보니 시간이 무척 오래 걸렸다. 안 되겠다 싶어 내가 트렁크에 모니터와 녹음기, 슬레이트를 가지고 탔다. 바로 모니터를 하고 디렉션을 줄 수 있어 좋았지만 멀미를 심하게 해서 괴로웠다. 후반 회차로 갈수록 배우 스탭 모두 차 신에 적응이 되면서 속도가 붙었고, 마지막 날에는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무사히 차 신을 마치긴 했으나, 배우가 연기와 운전을 동시에 해야만 하는 상황은 되도록 지양해야 한다.

2016년 12월 3일부터 2017년 1월 15일까지 28회차, 2017년 5월에 CG소스(재민 춤 영상) 촬영을 한 회차 찍었다. 총 29회차로 전체 촬영이 마무리되었다.

이재인 배우 ©김인선 감독

<어른도감> 촬영을 마치고 ©김인선 감독

#마치며

2016년 2월 한국영화아카데미 장편과정에 입학했고, 2018년 8월 3일 극장 개봉을 함으로써 <어른도감>이 세상에 나왔다. <어른도감>은 가짜의 관계 속에서 진짜의 감정을 느끼게 된 세 사람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리고 그 감정으로 말미암아 조금씩 성장하게 된 경언과 재민의 이야기다.

나의 목표는 하나였다. ‘내가 보고 싶은 영화를 만들자’. 선택의 순간마다 판단의 근거로 나에게 묻고 또 물었다. 내가 보고 싶은 <어른도감>은 목표하는 감정을 분명하게 설정해놓고 관객을 그 방향으로 몰아가는 영화는 아니길 바랐다. 슬픔을 슬프게만 표현하는 영화는 아니길 바랐다. 어떤 상황 속에서도 유머를 잃지 않는 인물이 등장하길 원했다. 못난 사람은 있지만 악한 사람은 없는 영화이길 바랐다. 스크린에서 마지막 화면이 사라질 때, 그들을 응원해주고픈 마음이 들었으면 했다.

나는 <어른도감>이란 한 편의 장편영화를 만드는 과정에서 이 이야기를 내가 왜 만들고 싶었는지, 그것을 깨닫게 된 것 같다. 사람은 나은 방향으로 변할 수 있다고 믿고, 나도 나를 믿는 사랑하는 사람들을 만나 더 나은 사람이 되겠다고…. 그런 희망이 전해지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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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도감> <수요기도회> 등 연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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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ORY : MY FIR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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