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영화를 읽다
강남역 여성살해사건 이후 우리는 ‘시국페미’가 됐다
<시국페미>
문아영 / 2019-12-16
<시국페미> 스틸컷
문제를 제공한 자가 여성일 때, 되려 여성들은 어떤 비판이 나올지 너무도 쉽게 예상할 수 있다. ‘아줌마 둘이서 나라를 말아먹었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로 불렸던 2016년 국정농단 사태 당시 이와 같은 비난은 마치 범국민적 정서처럼 여겨지고 있었다.
<시국페미>(강유가람, 2017) 영상 속 촛불 행진에는 수많은 사람이 등장한다. 여기서 여남의 성비를 떠올리는 이는 극히 드물 것이다. 그저 많은 사람이 집회에 참여했음을 인식할 뿐이다. 그러나 곧이어 나오는 ‘병신년’과 남성 성기 발기부전에 사용되는 약물 비아그라를 인용한 ‘하야하그라’, ‘청와대 비우그라’라는 플래카드의 등장은 집회가 남성의 목소리로 포진된 장소임을 보여준다. 지금껏 일상 속에서 숱한 혐오를 경험해야 했던 여성들의 예감을 관통하듯, 집회는 이러한 상태에서도 ‘여성’ 대통령 탄핵이라는 강력한 대의명분으로 지속되고 있었다.
“만약 대통령이 여자가 아니었다면?” “비선 실세가 여자가 아니었다면?” 예감을 넘어선 인터뷰이들의 상상은 국정농단이라는 정치적 사안마저 너무도 당연하게 여성의 문제, 여성혐오로 이어지는 현실을 꼬집어 말한다.
당시 영영페미니스트들 안에서는 낙태죄를 폐지하기 위한 운동이 주요하게 이뤄지고 있었다. ‘낙태죄 폐지를 위한 검은 시위’를 진행할 무렵 터져 나온 국정농단 사태에 이들은 새로운 고민을 해야만 했다. 한 사람의 시민으로서 집회에 참여하고자 하는 마음과 동시에 여성이 ‘시민’으로서 자리할 수 있을까에 대한 걱정. 정치권이 주요 과제에서 여성 의제는 늘 뒤로 미뤄왔던 것처럼 자신들의 운동이 한가한 목소리로 비치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인터뷰를 통해 고백된다. 페미니즘 운동에 정체기가 올지도 모른다는 여러 뒤섞임 속에서 여성들은 촛불 집회로 향했다.
<시국페미> 스틸컷
하지만 페미니스트 단체 ‘페미당당’ 활동가 심미섭 씨의 말처럼 대학 총학생회 깃발과 페미니스트 단체 깃발 아래서 참여자가 갖는 위치는 매우 달랐다. 여성들은 ‘대단하다’ ‘기특하다’는 말에 이어 ‘예쁘다’ ‘미스코리아다’ 등과 같은 성희롱 발언에 노출됐다. 여성이 주축으로 진행된 1985년 구로동맹파업과 같은 여러 운동이 한국 운동사에서 주요한 사건으로 기록되고 있음에도 남성 중심의 문화가 인정하는, 권력에 대항하는 얼굴은 남성인 것이다.
페미당당 활동가 우지안 씨의 인터뷰 내용 중, 세월호 깃발을 매단 남성이 여성혐오 발언을 해 싸웠다는 일화는 단지 그 개인만의 경험은 아닐 것이다. “백만 촛불 여성혐오 웬 말이냐! 진보 마초 필요 없다!” 세월호 깃발을 걸쳤을 뿐 그 남성은 여성들이 외친 구호 속의 진보 마초였다. 나는 누구랑 싸우는 것인가. 이러한 혼란을 거치며 여성들은 공권력을 비롯해 자신이 누구와 싸워야 하는지 알아가고 분별하는 경험을 터득하고 있었다.
이후 여성들은 여러 단체가 결합해 ‘페미니스트 존(이하 페미존)’을 만들어 냈다. “페미가 당당해야 부패 정권 박살 낸다! 여성억압 낙태 금지 반대한다!” 이들의 외침은 광장 속에서 청와대를 향한 권력 규탄과 여성 해방이 함께 요구될 수 있는 것임을 보여줬다. 그렇게 “이는 여성의 문제가 아니라 범죄를 저지른 대통령과 권력의 문제입니다”라는 주최 측의 발언이 광장에 울려 퍼지는 역사를 만들어 냈다. 여기서 영화는 나영 모두를위한낙태죄폐지공동행동 공동집행위원장의 인터뷰를 빌려, 영영페미니스트들이 견인한 변화가 주최 단위 내에서 이를 중요한 입장으로 가져가고자 했던 영페미니스트들의 노력과 상호작용하며 발생했음을 언급한다. 이를 통해 관객은 ‘우리에게도 계보가 있다(이민경 저서)’는 말과 함께 잠시나마 페미니스트 세대 간의 닿음을 목격하고 생각할 지점을 갖게 된다.
‘우리끼리 모이면 이렇게 안전하고 재밌구나’라는 깨달음은 집회에 모였던 여성 모두에게 연결돼 나타났다. 2016년 11월 26일에 열린 ‘페미니스트 시국선언’은 활동을 갓 시작했거나 혹은 활동하지 않는 사람 누구나 말할 수 있는 자리였다. “우리는 장애인, 성소수자, 페미니스트 그리고 사회적 약자들과 연대하기 위해 광장에 모였다”. 이들의 발언은 여성이 피해당하지 않기 위해 시작됐던 움직임이 ‘페미니즘 정치’로 확대됐음을 보여준다. 백만 촛불이 바꿔야 할 것은 정권 교체만이 아닌 소수자가 배제되어 온 사회, 여성혐오를 기반으로 한 권력이라는 핵심을 던진 것이다.
<시국페미> 스틸컷
끝에서야 카메라는 다시 백만 촛불을 이뤘던 광화문 광장의 정경을 비춘다. 하이컷으로 화면을 가득 채운 촛불은 이전만큼 ‘민주적’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그때, 파도타기를 하며 넘실대는 촛불 위에 “페미가 당당해야 나라가 산다” “우리는 여기서 세상을 바꾼다”는 여성들의 목소리가 내레이션으로 겹쳐진다. 예감-분노-광장-페미니스트-페미존-변화-역풍-용기-신호탄. 총 9개의 구성으로 2016년 영영페미니스트들의 이야기를 엮어낸 <시국페미>는 이 같은 연출로 민주적인 촛불을 세워나갈 이들은 여성, 페미니스트들이라고 말한다.
<시국페미>는 이러한 일련의 이야기를 첫 장면부터 집약적으로 보여준 영화다. 촛불 집회가 한창일 때, 말 모형 위에 올라탄 중년 남성이 무리 지어 이동하는 사람들을 ‘학생’ ‘처녀’라 부르고 그들을 향해 ‘예쁘다’는 말을 내뱉는다. 그러나 대열 속 인파는 이동을 멈추지 않은 채 ‘궁금해하지 말라’고 ‘우리도 사람이라’고 응수한다. 점차 목소리가 모여갈 때 누군가 “아저씨가 시위에 나오다니 기특하다!”라고 외치자 다 같이 환호성을 지른다.
잠시 화면을 멈추면, 남성이 내건 플래카드 중 ‘청소년들아 썩고 부패한 사회를 물려주어 정말 미안하구나’라는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이를 모두 담아낸 카메라는 정작 싸워야 할 대상, 바꿔야 할 사회가 무엇인지도 알지 못하는 이 남성을 정확히 꿰뚫어 본다.
이와 반대로 여성들은 ‘박근혜 탄핵’, ‘백만 촛불’을 거치며 남성 중심의 문화 속 세세한 얼굴들을 직접 마주해야 했고 그들과 싸웠다. “불편함을 느꼈더라도 직접적으로 문제제기를 하는 건 권력자를 향해서는 가능했지만 ‘우리’라고 생각하는 내부 안에서는 쉽지 않았던 거예요. (중략) 광장에서 얘기하고 변화를 이끌어낸 것이 온라인 페미니스트들이 가진 힘이라고 생각해요.” 나영의 말처럼 이들은 집회 주최 측으로부터 여성혐오 발언에 관한 공식 사과를 받는 등 민주주의 정치(혹은 광장)에 여성주의적 실천을 분명한 기록으로 남겼다.
이처럼 메르스 갤러리-강남역 여성살해사건 이후 페미니스트로 정체화 한 여성들은 대통령과 비선 실세라는 정치 권력에 대항하는 ‘시국’을 치열하게 통과했다. 그리고 상영 내내 이들의 목소리를 담아낸 영화는 영영페미니스트, 온라인 페미니스트들을 ‘시국페미’라는 이름으로 새롭게 불러낸다. 이로써 한국의 2010년대 페미니즘 흐름을 돌아볼 때, 우리는 ‘시국페미’라는 명명을 통해 언제든 환기할 수 있는 기억을 얻게 된다. 나아가 이때의 기억은 영화 <시국페미>를 통해 증명되고 더 많은 이가 공유할 수 있는 공동 기억으로 자리한다.
‘조국 사태’로 불거진 서초동과 광화문 촛불 집회에는 페미존에 대한 필요성이 얘기되고 있는가. 되려 서초동과 광화문 어디에도 자신의 목소리는 없음을 말하는 페미니스트들의 등장은 어떤 의미를 가질까. <시국페미> 속 광장과 2019년 10월의 광장. 이 같은 변화를 되짚어보는 데도 영화는 기억과 기록의 역할을 이어가고 있다.
*본 글은 10월 중순에 작성되었음을 알려드립니다.
PURZOOMER
찍는페미 소속, 서울여성독립영화제 집행위원, 여성인권영화제 프로그래머, 다큐멘터리 <멋진 하루> 공동연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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