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영화를 읽다
복수는 모두의 것
<택시에는 비상구가 없다>
윤고운 / 2020-01-03
<택시에는 비상구가 없다> 스틸컷
많은 밤, 잠들기 전에 이런 시간을 가진다. 이불 밑에 지친 몸뚱이를 누이고 천장을 가만 노려보며 ‘아, 이 말을 했어야 했는데. 그 무례한, 혹은 편협한, 혹은 그냥 재수 없는, 아니면 몽땅 다였던 그 자식한테 이 말을 했어야 했는데’. 그렇게 이 말 저 말 곱씹으며 하지 못했던 말을 퍼붓고(아마 나쁘고 심한 말일 것이다) 혹은 하지 못했던 것을 하며(이것 역시 나쁘고 심한 행위일 수도) 망상을 한다. 그게 명상보다 효과적일 때가 있다. 마음의 평화를 꼭 평화롭게만 얻어야 한다는 법은 없다.
미투(#Metoo, 나도 말한다)가 한창 예술계를 휩쓸 때였다. 모든 남자 예술가가 고소되어야 이 사단이 끝나겠느냐 비꼬던 사람이 있었다. 문제의식에는 통렬히 공감하지만 이게 복수심으로 번지는 것은 옳지 않다며 훈수를 두던 사람도 있었다. 그 날 밤 이불을 덮고 천장을 가만 보며 생각했다.
‘좋아하던 작가가, 좋아하던 연극인이, 좋아하던 영화인이 파렴치한 놈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은 나 역시 유쾌하지 않습니다. 이 사람만큼은 제발 조신한 놈이어라, 이렇게 말도 안 되는 놈들은 이제 그만 나오길 바랐습니다. 오히려 당신보다 내가 더 절망적이었습니다. 그리고 복수심으로 번지는 것은 옳지 않다고요? 왜 안 됩니까? 문화 권력에 의해, 젠더 위계에 의해 폭력 피해를 입은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과연 얼마나 있었을까요? 잘못된 언행에, 부당한 폭력에 왜 복수심을 불태우면 안 되는 겁니까? 왜 그러면 안 되는 건가요?’
<택시에는 비상구가 없다> 스틸컷
11분짜리 짧은 단편영화 <택시에는 비상구가 없다>(김혜진, 2017)는 “이러면 안 되잖아!”라는 주장에 “이래도 돼!”라고 답하는 영화다.
젊은 여성 커플이 택시에 탄다. 택시 기사는 “이 늦은 밤에 아가씨들이 남자 만나고 오냐”며 껄렁하게 말을 걸기 시작한다. 커플은 정중하게 대화를 끊어보려고도 화제를 돌려보려고도 하지만 택시 기사의 무례함은 무례를 넘어 점점 폭력적으로 변한다.
내리고 싶은 택시에서 내리지 못했던 경험은 많은 여성들이 가지고 있을 것이다. 나는 살면서 택시를 탈 일이 별로 없기도 했고, 운이 좋기도 해서 택시에서 위험하거나 불쾌한 경험은 거의 없었다. 반말을 찍찍 뱉는 기사라든지, 행선지를 말할 때나 계산을 할 때 툴툴대며 불평불만을 하는 기사는 물론 있었다. 한둘이 아니었으나, 그 정도의 경험이야 이제 익숙해서 이야깃거리도 안 된다.
딱 한 번, 께름칙한 일이 있었는데, 그 날은 한 해의 마지막 날이었고 밤늦게까지 일하다가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계산을 하며 ‘한 해가 갔네요, 새 해도 잘 맞이하세요’ ‘기사님도요’ 이런 덕담을 주고받았는데 신년을 맞이하여 악수를 나누잔다. 악수를 건넸는데 기사는 내 손을 꼭 잡고만 있을 뿐 흔들지도 않았다. 내리고 나니 묘하게 소름이 돋았다. 이불을 덮고 생각했다. 손을 주지 말걸. ‘악수는 뭘요, 제 손이 좀 차서요’ 능청스레 넘겨볼걸. 원래 나는 악수를 잘 하지 않는데 왜 했을까. 해서는 안 될 내 탓도 했다.
<택시에는 비상구가 없다> 스틸컷
택시는 사실 묘한 공간이다. 손님과 기사, 그러니까 서비스를 받는 자와 제공하는 자, 요금을 지불하는 자와 받는 자가 명확하지만 그 구도만으로 권력 관계를 정의할 수 없다. 영화의 제목대로 비상구가 없는, 육중한 차체에 의지를 부여하는 것은 기사의 몫이다. 물론 그 방향이 손님의 의지대로 정해진다고 해도, 그곳까지 가기 위해 폐쇄된 공간을 견뎌야 한다는 사실은 변함없다.
그 시간 동안 어떤 탑승객은 자신의 의사와 관계없이 불쾌한 질문과 말을 견뎌야 한다. 때로는 그보다 더 무서운 상황이 닥치거나 스스로 그런 상황을 상상하기도 한다. 여성들이 서로의 택시 번호판을 찍거나 메모하는 광경은 이제 익숙하다. 길에서 손으로 택시를 잡으려고 하면 “콜 불러서 가”라고 하는 광경도 이제 익숙하다. 이상하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을 내는 손님’임에도 불구하고 습관적인 공포를 겪는다는 것은 이 사회에서 돈 이전에 더기본적이고 무의식적인 권력이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이 습관적인 공포를 누가 겪고 또 누가 겪지 않는지를 헤아려 보면 이 권력 관계가 어떻게 작용되는지 분명히 알 수 있다.
<택시에는 비상구가 없다>에서처럼 본인이 퀴어 여성일 경우에 이는 더욱 중첩적으로 적용된다. 영화 속에서 여성들이 감행하는 복수는 권력 자체에 대한 복수일지도 모른다. 많고 많은 복수물(누군가 원한을 품고 복수를 하는 모든 영화를 복수물이라고 간편하게 말할 수 있다면) 중에서 물론 여성이 복수의 주체가 되는 경우는 드물다. 주체가 된다고 해도 복수의 동기는 다소 정형화돼있다.
<친절한 금자씨> 스틸컷
<친절한 금자씨>(박찬욱, 2005)의 금자(이영애)는 아이를 잃었고, <킬 빌>(쿠엔틴 타란티노, 2003)의 더 브라이드(우마 서먼)는 결혼식 때 배 속의 아이를 포함한 모든 것을 잃었다. 요약하자면, 여성이 복수의 주체가 되어 신명 난 활극을 펼치는 영화들에서 복수의 동기는 대부분 잃어버린 아이, 꺾인 모성애에서 비롯된다. 여성이 복수를 실행하려면 이유가 있어야 하고 그 이유를 세우기 위해서는 크나큰 고통이 필요한데, 여성으로서 겪을 수 있는 최대의 고통은 어미로서 자식을 잃은 고통인 것이다. 과연 그럴까? 복수를 하려면 그 정도로 괴로워야 하나? 그 괴로움은 ‘자식 잃은 어미’의 프레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일까?
반대로 영화에서 이유 없이 사람을 죽이는 살인마는 남성 캐릭터가 대부분이다. 이유 없이 죽는 사람은 여성들이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에단 코엔·조엘 코엔, 2007)는 어떠한가. 최근 인기를 끌었던 <조커>(토드 필립스, 2019)도 마찬가지다. 이들에게 폭력은 그 자체로 캐릭터를 존립하게 하는 근거가 된다. 물론 나름의 철학과 세계관을 설파하지만, 그것의 옳고 그름은 중요하지 않다. 오히려 별다른 명분 없이 일관성 있게 폭력과 살인 행위를 꾸준히 하는 것 자체가 캐릭터를 살린다.
<택시에는 비상구가 없다> 스틸컷
<택시에는 비상구가 없다>의 복수가 나름 통쾌해 보이는 것은 이런 지점 때문이 아닌가 싶다. 아이를 잃은 엄마가 아니더라도 충분히 강해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다만 아쉬운 것은, 너무 적나라하게 드러난 택시 기사의 혐오 표현과 남성의 판타지로 삽입된 레즈비언 커플의 키스신이다. 그 정도로 심한 말을 듣지 않더라도, 그런 판타지로 소비되지 않더라도, 그러니까 굳이 복수의 명분을 갈고 닦지 않더라도 이 커플의 행위는 충분히 통쾌할 수 있다. 이 영화를 볼만하게 만들어주는 것은 이들이 가지는 정당성이 아니기 때문이다.
택시 안에서 작동하는 권력 관계를 뒤집고 남성 서사 중심 영화의 문법 안에서 작동하는 스테레오타입을 뒤흔드는 것만으로도 이 영화는 충분히 가치가 있다. 언젠가 아무런 슬픔도 고통도 없이 활개를 치고 다니는 희대의 여성 살인마 캐릭터를 영화에서 볼 수 있게 되길 바라며, 이왕이면 <택시에는 비상구가 없다>의 커플이 그 주인공이 되길 역시 바라본다.
PURZOOMER
2019 서울인권영화제 상임활동가, <보호> 공동연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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