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영화를 읽다
‘소외’시키지 않기
<개학>
문아영 / 2019-12-26
<개학> 스틸컷
기능성 콘돔은 청소년 판매 불가 상품이다. 한국에서 청소년은 피임과 섹슈얼리티에 대한 ‘접근’부터 통제받는 존재다. 영화는 극 초반에 편의점에서 비청소년임을 증명하지 않는 한 콘돔을 구매할 수 없는 장면을 연출한다. 이는 남성 인물(편의점 주인)을 통해 설명되며, 고등학생인 주인공(박수연)은 자신의 존재를 숨기기 위해 마스크를 구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인다. 편의점에서 마스크를 찾지 못한 주인공은 결국 우비를 산다. 우비를 입고 모자를 썼을 때 얼굴이 가려지도록 우비에 얼기설기 바느질하는 그의 모습은 주인공과 보는 이 모두에게 어떠한 감정, 욕구를 증폭시킨다.
주인공의 욕구가 임신중절과 관련돼 있음을 알게 됐을 때, 상황을 파악하고자 했던 관객(사회)이 갖게 되는 ‘피임을 했더라면…’이라는 생각은 단순하기에 더 큰 폭력성을 갖는다. 피임 도구를 이용해도 완전한 피임이란 불가능하다. 게다가 여성, 청소년이라는 주인공의 위치(정체성)는 타인에 의해 매 순간 섹스와 강간을 오가며 피임에 대한 시도조차 박탈당하고 있다. 영화는 이러한 함정을 제시하는 등 여성 청소년의 몸과 임신중절권에 관한 이야기를 확장하려는 듯 보인다.
이후 허름한 여인숙에서 주인공은 시술자인 남자 의대생(고유준)과 대면한다. 하지만 남성이 주인공에게 사전에 요구했던 것이 시술에 필요한 물품이 아니라 자신의 배를 채우기 위한 음식임이 밝혀지는 순간, 돌연 ‘준비’를 해야 하는 사람은 시술자에서 여성으로 바뀐다. 여성이 시술자를 보조하는 역할까지 맡아야 하는 상황은 임신중절이 권리는커녕 제공 혹은 거래의 측면으로도 다뤄지지 못하는 현실을 방증한다.
<개학> 스틸컷
하지만 주인공이 남성 인물들로 인해 자신의 욕구 수행이 거부 또는 검열되는 위기에 처할 때 성을 매개로 보이는 반응은 의아스럽다. 자신을 지키고 어떻게든 임신 이전의 상태로 되돌아가고자 하는 일련의 시도는 일종의 무기로 전혀 기능하지 못하고, 되려 주인공의 몸과 위치를 모두 소거시키는 현상을 낳는다. 이는 과연 여성, 청소년의 몸이 사회에서 어떻게 통용되는지 습득해버린 여성 인물의 절박함을 재현한 ‘연출’인 것일까.
끝에 영화는 바닥에 누워 시술받는 주인공의 얼굴을 클로즈업하는 동시에 살을 헤집는 듯한 사운드를 겹쳐낸다. 이는 극의 시작부터 도달하고자 했던 목표임에도 화면에 얼굴이 가득 찰수록 주인공의 존재는 점차 흐릿해진다. 그는 분명 살아 눈을 뜨고 있지만 마치 죽음에 이른 것처럼 보인다.
<개학>이라는 제목에서 예상할 수 있듯, 시술이 끝난 주인공은 학교 정문 앞에 선다. 지난 새벽 동안 영상에 가득했던 서늘한 푸른빛은 사라진 채 평범하다 할 수 있는 등교 시간의 모습이 그려진다. 이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흘러나오는 다소 잔잔한 느낌의 배경음악은 주인공을 서둘러 다른 학생들 사이로, 학교 안으로 밀어 넣는다.
<개학> 스틸컷
그리고 스크린 위로 올라가는 엔딩 크레딧으로 인해 관객과 영화 주인공의 관계는 빠르게 단절된다. 하지만 지난한 과정을 거쳐 학교에 ‘진입할 수 있는’ 몸을 만들어낸 주인공에게 그 공간이 제대로 된 쉼을 제공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는 사라지지 않는다. 그동안 여성의 몸에서 발생하는 건강상의 위험은 치료와 휴식이 필요함을 인정받지 못했고, 여성들은 곧바로 일상과 업무에 전진해야 했다. 관객은 애써 책상에 엎드리거나 보건실에 누워있는 그의 모습을 상상하려 해도 금세 가로막히고 만다. 인물이 겪는 고통과 후유증이 이미 관객의 몸을 관통하는 상황에서, 정작 사람은 사라지고 아픔만 계속되는 이야기가 지금의 여성 관객에게 얼만큼의 이해를 구할 수 있나.
낙태죄와 청소년의 섹슈얼리티를 둘러싼 논의는 2019년도에 들어 갑자기 생겨난 이야기가 아니다. 영화가 만들어진 2016년 또한 이러한 연속선에 있었던 시기다. 누군가를 소외시키지 않고자 하는 태도는 관객이 여성 영화에서 발견할 수 있는 다른 영화와의 분별점일 것이다. 여성 청소년의 임신중절을 그린 영화가 <개학> 한 편일 때와 아닐 때, 관객과 창작자를 포함한 ‘우리’에게서 모여지는 논의의 흐름은 매우 다를 테다. 대상화와 재현의 문제를 지속해서 고민하는 작품들이 영화 <개학>을 이어 지금의 지평을 보다 넓혀주길 바란다.
PURZOOMER
찍는페미 소속, 서울여성독립영화제 집행위원, 여성인권영화제 프로그래머, 다큐멘터리 <멋진 하루> 공동연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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