ZOOM IN

망설이지 말고, 페미니즘 돋보기

살해당하거나 살인자가 되거나

황미요조|영화평론가 / 2019-12-26


< ZOOM IN >에서는 여성 영화, 감독, 배우, 캐릭터 등을 퍼줌만의 새로운 시각으로 들여다보고 다양한 관점에서 이야기해보고자 합니다. 여러분들도 망설이지 말고, 페미니즘 돋보기!

<스릴러> 스틸컷 ©다음

미치도록 다시 쓰고 싶은 죽은 여성들의 이야기  

페미니스트적 관점으로 다시 재작업해보고 싶은 창작물이 있는가? 어떤 작품을 어떻게 재해석하고 싶은가? 2003년 <살인의 추억>(봉준호) 개봉 당시 평론가이자 영화감독인 김소영은 영화잡지 ‘키노(KINO)’에 기고한 글에서 한스 벨머(독일의 화가이자 조형작가)의 사진 작업을 재작업한 신디 셔먼(미국의 사진 예술가)의 섹스 픽쳐 시리즈를 언급하며 <살인의 추억>을 페미니스트의 시선으로 다시 쓰고 싶다는 소망을 피력했다. 

1930년대 무력하고 학대받은 소녀의 신체를 상기시키는 오브제를 대상으로 반(反)파시즘의 주제를 형상화했던 한스 벨머의 사진 작업은 파시스트를 공격하는 데는 효과적일지 모르나 그 바탕에는 소녀 신체에 대한 여성혐오적이고 가학적인 판타지가 공명하고 있다. 신디 셔먼이 한스 벨머의 작업을 전유하여 남성적 삽입의 판타지가 불가능한 신체 이미지를 형상화했던 것처럼 김소영은 <살인의 추억> 피해자인 여성의 시선으로, 배수로의 여자가 벌떡 일어나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에 일타를 가하는 호러 영화로 다시 쓰고 싶다고 말한다.(김소영, 「미친 듯이 다시 쓰고 싶다」, 『KINO』 NO.98(2003년 6월호), 151-153쪽) 

1980년대의 국가권력 앞에 무기력했던 남성성에 대한 연민을 미제 연쇄 살인사건으로 알레고리화하여 ‘추억’하기 위해 여성들이 죽어야 했다면, 페미니스트들은 그 여성들을 살려내 그들이 직접 말하지 못하는, 차마 추억하지 못하는 이야기를 다시 쓰고자 하는 것이다. 

희생된 여성들의 입장에서 고전을 다시 창작하려는 시도는 1970년대 초기 씨네 페미니즘에서부터 시도되어 온 전략 중 하나다. 1970년대 활동을 시작해 현재까지 영화 연출을 계속해오고 있는 걸출한 페미니스트 예술가 샐리 포터 감독은 푸치니의 유명한 오페라 <라 보엠>을 재해석한 30분 분량의 단편 영화 <스릴러>(1979)로 영국의 실험영화와 예술영화계에서 컬트적인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영화가 시작되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은 채 오페라의 노랫소리가 먼저 들린다. 그 후 등장하는 것은 좁고 어두운 방 안 의자에 앉아서 책을 덮고 크게 웃고 있는 흑인 여성이다. 곧 아무도 없는 오페라 무대 세트, 사람들 신체의 일부분이 파편처럼 보이는 이미지, 그리고 앞서 본 흑인 여성이 무엇에 놀란 듯 입을 막으며 거울을 등지고 서 있는 이미지가 신경질적이고 공포스러운 음악과 함께 차례로 등장한다. 히치콕 감독의 <사이코> 속 샤워 장면에서 사용돼 귀에 익은 음악이다. 그리고 영화의 타이틀 ‘스릴러( Thriller)’가 뜬다. 샐리 포터는 가난한 예술가들의 비극적인 사랑 이야기로 알려진 오페라 <라 보엠>을 스릴러라고 생각한 것이다.

<스릴러> 스틸컷 ©다음

관객은 흑인 여성의 독백을 듣는다. “나는 지금 기억해내려고 애쓰고 있어. 바닥에 누워 있는 사람들 중 한 명은 나인데, 나는 죽은 걸까? 살해당했나? 누가 왜 나를 살해한 걸까?” 곧 그는 오페라의 여주인공 ‘미미’가 자신이었던 것을 안다. 자신의 죽음을 납득할 수 없었던, ‘거울을 보고 생각하고 책을 읽는’ 미미는 자신의 죽음의 경위를 따지고 든다. 미미였던, 그러나 미미인 자신의 일생을 거울에 비춰보며 거리를 두고 생각해 보는 여성의 독백과 분절된 오페라 장면과 음악, 실험적인 사진 이미지들을 거쳐 도달하는 결론은, 미미는 결핵에 시달리다 사랑하는 연인의 품에 안겨 고통스럽지만 낭만적으로 생을 마친 것이 아니라 살해당했다는 것이다. 

미미는 바느질로 꽃을 만드는 노동자다. 미미의 위층에 사는 남자들은 밤낮으로 ‘창작’의 고통을 이야기하지만 미미는 ‘생산’을 하느라 바쁘고 지쳐있다. 독백을 하는 미미는 ‘만일 미미가 결핵으로 죽지 않고 계속 살았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라는 질문을 한다. 결혼했겠지만 평생 일해야 하는 것은 변함없었겠지. 아이들에게까지 희생하고, 결국 나이 들어서도 계속 꽃을 만들며 고생하는 운명인 것은 변함없겠지. 여기까지 생각했을 때 거울을 보는 미미는 깨닫는다. 미미의 역할, 즉 예술작품에서 여성의 역할은 남성의 자기 연민적 고통과 시련을 강조하고 낭만화하는 데 필요할 뿐 진짜 여성의 삶은 재현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이다. 남성 예술가들이 처한 비애를 나르시시스트적으로 낭만화하기 위해 미미는 젊어야 하고 젊을 때 죽어야 한다. 미미는 러브스토리의 적합한 캐릭터가 되기 위해 죽어야 했던 러브스토리의 희생자이며, 결국 미미의 입장에서 오페라 ‘라 보엠’은 자신이 살해되는 스릴러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거울을 보며 성찰하는 미미는 여기서 한 발자국 더 나아가 ‘라 보엠’에는 자기 자신 외에도 남성의 이야기에서 정해진 역할을 맡을 수밖에 없는, 다른 한 명의 희생된 여성을 발견한다. 오페라 속에서 순수하고 헌신적인 미미와 대조적으로 물질주의적이고 천박하게 묘사된 뮤제타이다. 남성 예술가의 숭고하고 아름다운 사랑과 그 비극을 강조하기 위해 미미의 사랑은 더욱 순정적이고 헌신적인 것으로 강조돼야 하며, 그 과정에서 뮤제타와 미미는 대립적 관계로 설정되어 있을 뿐, 서로가 관계 맺을 수는 없다. 뮤제타는 사실 영화 내내 미미의 가까운 곳에 있다. 뮤제타는 신체 일부나 문틈 사이로 슬쩍 슬쩍 보여져 왔다. 관객들이 스릴러적인 궁금증과 긴장을 가질 때쯤, 미미는 뮤제타의 존재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미미는 남성 예술가들이 은폐한 자신의 죽음의 이유를 알았을 뿐 아니라, 뮤제타를 발견한 것이다. “우리는 서로 사랑할 수도 있었는데…” 미미의 독백과 함께 이 두 여성이 서로를 감싸 안는 순간, 방 안의 남자들은 창밖으로 몸을 던진다. 

샐리 포터는 오페라 고전을 다시 씀으로써 고전적 러브스토리들이 남성들의 자기애적 비극을 완성시키기 위해 여성을 어떻게 이용하고 희생시켰는지를 보여준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여성이 스스로 자신이 처한 상황을 거리를 둔 채 생각해 보고 논리적으로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이렇게 여자들이 말하고, 생각하고, 설치면 여성 억압의 현실이 보인다. 이 비밀을 여성들이 알아내면 남자들은 감당할 수 없게 되어 겁에 질려 도망간다.

<침묵에 대한 의문> 스틸컷 ©다음

웃음으로 가담하는 여성의 남성 살인 

이에 반해, 여성에 대한 억압을 드러내고 남성 중심적인 질서에 맞서는 방식으로 말과 냉철한 생각이 그다지 효용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영화가 있다. 비슷한 시기, 마를렌 고리스는 <침묵에 대한 의문>(1982)을 만든다. 이 영화에서 여성들은 살인자다. 그리고 여성이라면 모두 이 살인에 잠재적 공모자이거나 동조자이다. 

영화가 시작되고 아이를 키우는 주부, 식당에서 일하는 중년 여성, 비서로 일하는 젊은 여성의 일상이 짧게 나열되고, 곧 차례로 이들은 경찰에게 체포된다. 이들은 한 남성을 같이 때려죽인 혐의를 받고 있다. 이들은 순순히 혐의를 인정하지만, 그 외에는 사건에 대해 어떤 설명도 하지 않는다. 수사관에게 질문을 받으면 멍한 표정을 짓거나 곁눈질하며 서로 웃음을 터뜨릴 뿐이다. 살인사건에 함께 가담했지만 공모도 아니고, 서로 아는 사이도 아니었다. 

<침묵에 대한 의문> 스틸컷 ©다음

심리학자인 야니네(콕스 허베머)는 이해하기 힘든 그들의 심리를 분석하기 위해 고용되면서 이 사건과 관련을 맺기 시작한다. 지식과 언어와 지위를 가진 야니네는 이 사건의 자초지종에 다가가지 못한다. 그러나 그는 이 여성들에게 일어난 일들이나 심리를 구체적인 언어로 설명하거나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이 여성들이 연대하고 있는 기운에 점점 끌려 들어간다. 그럴수록 남편과 대화하는 것이 점점 힘들어지고 남편과의 사이는 멀어진다. 영화의 플래시백이 제시하는(혹은 이 여성들에게 점점 동화되어 가는 야니네가 상상한) 사건의 전말은 일상생활에서 억압을 느끼는 세 명의 여성이 우연히 같은 시간에 한 옷 가게에 있다가 순간적으로 여성 연대가 형성돼 점원을 잔혹하게 때려죽인 것이다. 살인 후 여성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후련해하거나 자신을 억압한 것과 대면하며 자족감에 충만한 모습을 보인다. 

야니네는 법정에서 발표하는 최종 리포트에서 이 여성들이 느끼는 억압과 불안은 살인에 이를 정도로 강하고, 가부장제 사회를 살아가는 여성들에게는 너무나 정상적인 것이며, 따라서 이 여성들의 정신상태는 정상이라고 결론을 내린다. 하지만 판사를 비롯한 법정의 권위를 가진 남자들은 전혀 알아듣지 못 한다. 야니네의 언어가 가부장제에서 전혀 설득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법정의 모든 여성들은 살인에 이른 여성들의 억압과 스트레스가 무엇이었는지를 직감적으로 이해하고 살인자가 된 여성들에게 심정적으로 가담한다. 

<침묵에 대한 의문> 스틸컷 ©다음

남성적인 법의 언어로는 도저히 자신들의 행동과 심리가 설명될 수 없다는 것을 아는 여성들은 큰 소리로 웃기 시작한다. 야니네도, 살인사건에 가담하진 않았지만 같은 장소에 있다가 살인을 목격하고 재판을 보러 온 레즈비언 커플도, 이 사건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여성 방청객들도 큰 소리로 웃으며 법정을 모욕한다. 법 논리라는 최고의 권위적인 언어로 해석하고 규율할 수 없는 여성들의 웃음에 남성 재판관들과 법조인들은 당황하고 겁에 질린다. 여성들을 퇴장시키고 법정을 다시 통제하려 하지만, 한 번 공감대의 웃음이 터진 여성들은 법정을 조롱할 뿐 두려워하지 않는다.

여성이 언어와 지식으로 무장하여 고전 텍스트 안으로 침투해 그 텍스트들의 남성 중심성을 논리적으로 풀어헤치고 비판하는 방식도, 아예 남성 중심 텍스트 바깥에서 남성들은 이해할 수 없는 (비)언어와 여성들만의 연대로 남성 중심성을 공격하는 것도 씨네 페미니즘을 지탱하고 발전시켜 온 여성 예술가들의 전략이다. 어느 쪽이든 드러나는 것은 남성 질서의 허약함이다. 남성들은 여성들이 생각하고 따지는 것만으로, 혹은 함께 연대하는 것만으로도 겁에 질려 도망간다. 실제로 당시 남성들은 이 두 영화에 신경질적인 반응과 비판으로 응대했다. 남성들은 가부장제에 위탁해 권력을 휘두르고 여성들을 통제해왔을 뿐, 작은 균열과 저항을 견딜 만큼 튼튼하지 못하다. 몇 년 전부터 한국사회에서 활기를 띠기 시작한 여성 중심 문학과 영상작품들의 등장 그리고 여성운동의 대중화에 대한 남성들의 호들갑스러운 반응도 마찬가지다. 곁눈질 한 번 정도로 무시하고, 여성들은 여성들의 전략으로 계속 나아가자. 남성들은 아마 계속 뒤처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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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RZOOMER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이론과 강사, 2011~2014 서울국제여성영화제 프로그래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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