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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아름의 잠시, 다시] 무엇을 보아왔건, 틀렸으니 공부하세요
송아름|영화평론가 / 2020-10-01
송아름 평론가가 ‘또 다른 눈’으로 여성영화를 들여다봅니다. 지금보다 더 많은 여성의 이야기를 바라며, ‘잠시’ 멈춰 생각하고 ‘다시’ 또 생각합니다. 때로는 냉철하게 때로는 사려 깊게,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이야기. |
학.습.이란, 과거의 경험을 통해서 새로운 지식이나 기술을 배워 익히는 것이다. 즉, 과거의 경험을 통해 몰랐던 사실을 배우고 서투른 점을 반복하고 곱씹어 익숙하게 만드는 것이다. 최근 몇 년간 수많은 성폭력이 꼬리에 꼬리를 물면서 이어지고, 가해자에 대한 신랄한 비판이 쏟아졌지만, 놀랍게도 성폭력은 끊이지 않고 이어진다. 어지간해선 학습의 결과가 나타날 만도 한데 도무지 계도가 되지 않는 것은 가해자의 지능을 의심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신기한 일이다. 물론 그 이유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성폭력과 관련해선 가해보다 피해자의 피해 사실 증명이 먼저 요구되었고, 각종 담론들은 아주 다양하게도 피해자가 피해 사실을 제공했다는 이유를 만들어냈다. 피해자가 이를 반박하기 위해 힘을 쏟는 동안 가해자는 특별히 힘쓸 것 없이 자신의 행위에서 죄책감을 똑 떼어낼 수 있었다. 굳이 힘 쏟지 않고 얻어낼 수 있는 것들, 게다가 자신에게 유리한 것은 쉽게도 학습되는 탓에 성폭력은 징그럽게도 이어졌다.
〈서울무지개〉 스틸컷
그래도 궁금은 하다. 아무리 자신의 행위를 별 것 아닌 것이라 판단했다 해도, 좋아하는 줄 알았다는 핑계나 자신의 딸에겐 절대 할 수 없는 행동을 딸 같아서 했다는 말들이나 아무렇지도 않게 누군가의 얼굴과 몸을 평가해대는 레퍼토리가 어찌 그리 쉽게 나올 수 있는지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까닭이다. 또한 분명 자신의 행동이 공개되는 순간 경험할 수밖에 없는 끝 모를 쪽팔림을 어떻게 고려하지 않을 수 있는지 역시 붙잡아 묻고 싶을 만큼 궁금하다. 자신의 권력을 굳게 믿고 상대가 결코 말할 수 없을 거라고, 혹은 그 사실을 말하지 않을 만큼 자신을 좋아한 것이라 생각했다면 그 자신감의 출처도 진심으로 알고 싶다.
〈서울무지개〉 포스터
굳이 직접 물어볼 필요 없이 그들이 보아왔을 무수한 소설들과 영화들을 되짚어 본다면 그들의 왜곡된 학습이 대체로 무엇에 기대고 있었을지 충분히 알만하다. 물론 이런 작품들을 찾지 않더라도 과거에 만들어 놓았던 흔적들은 그들에게 고스란히 남아 있을 터였다. 가령, 우리가 텔레비전이나 영화를 통해 본 적 있는 ‘버스안내양’은 원래 남성들이 담당하던 직업군이었다. ‘교통운영의 명랑화’를 도모하기 위해 갑작스레 생겨난 직업이 버스안내‘양’이었던 것이다. 남성의 직업일 때는 버스‘조수’ 혹은 ‘차장’으로 불리던 이 직업은 여성의 직업으로 변화하며 ‘양’이라는 성별을 명기하고, 그들에게 노동이라기보다는 ‘명랑’을 ‘도모’할 수 있는 역할을 요구했다. 버스안내‘양’의 모집공고는 ‘16세 이상 20세 미만의 젊은 여성들’, ‘얼굴이 예쁘고 애교 있는 아가씨’를 우선 선발한다는 조건을 내걸었다. 승객들 역시 버스안내‘양’의 유니폼이 더럽고 목소리도 걸걸하며 폭력적이라는 민원을 제기할 만큼 그들에게는 깨끗하고 밝고 친절한 여성이 요구되었다.
〈노는 계집 창〉 스틸컷
이러한 일들이 깡깡 옛날, 1960년대의 일이었다 치자. 그러나 우리는 시간이 지난다고 해서 여성에 대한 시선이 바뀌지 않는다는 것을 이미 오랫동안 학습했다. 그래서 여성들이 작품 속으로 들어갔을 때, 아니 들어갔다기보다 끌려갔을 때, 폭력적인 상상력은 처참할 정도였다는 점을 알고 있다. 과거 한국영화와 소설, 특히 1970-80년대의 작품들을 지속적으로 보는 일은 상당한 인내를 필요로 한다. 여기에 등장하고 있는 무수한 여성들은 과연 존재할 수 있는 인물인가, 혹은 존재해도 되는 인물인가 라는 점이 의심스러울 만큼 고통 속에 던져져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도대체 어떻게 살아남으라는 것인가?’라는 의구심이 들 만큼 절망스러운 상황 속에서 허우적대며 완벽하게 대상화된다. 당연히 이러한 설정의 전제는 여성들이 주체적인 인간으로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노는 계집 창〉 스틸컷
굳이 영화의 내부에 진입하지 않더라도 (여)배우들은 그 지겨운 ‘꽃’이 되어야 했다. 해외영화제에 진출하기 위해 우리 (여)배우들을 많이 데리고 가 영화제에서 활약하게 해야 한다는 제작자의 말이 버젓이 실린 잡지들은 그 의도가 너무나 투명해 당혹스러울 정도이다. 해외 진출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만들어진 다수의 영화들이 여성의 벗은 몸을 둘러싼 산수(山水)를 통해 강력한 오리엔탈리즘을 드러내고 있는 것은 이러한 생각에서 기인한 결과일 것이다. (여)배우에 관한 기사들에서 잘 빠지지 않는 ‘수줍게’, ‘화사한’과 같은 수식어들과 영화의 내용과는 전혀 상관없는 가십성 짙은 인터뷰들 역시 이 배우들의 직업을 전혀 다른 방향으로 돌려버리고 있었다.
〈노는 계집 창〉 포스터
영화의 내부에 진입하면 대상화의 수는 더욱 늘어나며, 방법은 교묘해진다. 사실 여성 인물에 있어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괴롭히는 내용은 그 수를 헤아리기 어려울 만큼 많겠지만, 가장 비겁한 방식은 거대담론을 등에 업고 여성을 희생자로 만들고 이를 어떤 가치와 의미를 지니는 것처럼 포장하는 일이다. 이 영화들은 잔인한 폭력을 시대와 정치라는 이름으로 둔갑시키고 제물이 된 희생양에게 할 수 있는 모든 가학을 퍼붓는다. 이 과정을 통해 시대정신이라는 이름의 허상을 획득하고 여성이라는 실체는 버려진다. 가령 이런 식이다. 반공 영화라는 장르 명을 달고 있는 몇몇 영화들은 관객을 끌기 위해 북한군에게 지속적으로 강간당하는 여성을 전시한다. 제목에는 누가 보아도 옷을 벗었다는 의미가 명확한 한자를 사용하고 포스터에는 고개를 젖힌 채 일그러진 여성의 얼굴이 삽입된 것은 물론이다. 이러한 방식은 1980년대, 민주화 이후 더욱 시대정신을 드러낸다는 명목으로 더욱 활발하게 이어진다. 그리고 이 작품들은 대체로 소설이라는 원작에서 증식한 것들이다.
〈수취인불명〉 스틸컷
이러한 영화가 가능했던 것은 영화를 만드는 이들의 합의에서 비롯된다. 영화를 제작하는 이는 물론이고, 그렇게 강력했다던 검열 안에서도 여성의 몸은 노출의 정도를 부위별로 구분해야 하는 대상으로 자리했다. 어느 부분은 노출을 삼가고, 어느 정도까지는 노출을 시킬 수 있다는 식의 분류는 궁극적으로 이 여성 인물이 영화 속에서 어떠한 일을 겪고 있는지를 판단할 필요가 없게 만든다. 종종 여성의 노출 혹은 일탈에 주의하라는 지시가 있긴 하지만, 이는 ‘여대생’이나 ‘선생’과 같이 ‘보호할 가치’가 있다고 판단한 이들에 대한 주의를 요구하는 것이었다. 1970년대 중후반, 갑작스레 호스티스 영화가 쏟아져 나왔던 것은 이러한 ‘주의’가 필요치 않은, 그래서 ‘자유’를 찾을 수 있다는 판단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이러한 인식을 경유하여 탄생한 영화들은 그 어디에서도 현실을 살아가고 있는, 혹은 살아갈 수 있는 여성 인물을 출연시키지 못한다. 그 시기에만 잠시 등장했던 (여)배우들의 필모그래피를 볼 때면 그럴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그들이 찍었던 영화들은 더 할 수 없는 멋진 말들로 고평 받았을지 몰라도 그들에게 영화는 끊임없이 폭력적이었기 때문이다(최근까지도 이러한 방식은 꾸준히 사용되었고 역시 꾸준히 고평 될 수도 있다는 점에서 참담할 뿐이다).
〈수취인불명〉 스틸컷
왜 이제와 그러느냐고, 전엔 이런 게 문제 되지 않았었다고, 옛날엔 다 그랬다고 이야기하는 이들이 보아왔던 작품은 아마 이런 것들이었을 것이다. 이런 이유로 모르겠다면 나도 똑같이 모르겠다고 답할 수 있다. 도대체 그게 왜 이상하지 않았냐고, 그때 몰랐다면 지금이라도 알아야 하는 것 아니냐고, 그리고 지금은 그때가 아니니 같은 기준으로 보는 것이 더 이상한 일 아니냐고, 나는 그걸 모르겠다고 되물을 수밖에 없겠다. 그래도 모르겠다면 물론 방법은 있다. 이렇게 열심히들 당신들이 보아온 것이 틀렸다고 이야기해주고 있으니 공부를 하라고. 몸에 인이 배어 버릴 만큼 학습했던 것처럼, 이제는 또 다른 학습을 열심히 해보라고. 그땐 그랬을지 몰라도 지금은 이러니까 예전처럼 많이 보고, 듣고, 읽으라고 말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모르겠다고 징징댈 나이가 지난 지 까마득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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