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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거품이 되어서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

<공기의 딸들>

배선애|연극평론가 / 2020-08-12


<공기의 딸들>   ▶ GO 퍼플레이
정안나, 권오경|2020|실험, 드라마|한국|36분

<공기의 딸들> 스틸컷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코로나19 바이러스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많은 것들을 바꿨다. 무엇보다 사람을 만나면 안 된다는 것이 가장 결정적인 원인이 되었다. 학교는 물론이고 종교시설, 공원, 경기장 등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은 더 이상 갈 수 없거나 허가를 받아야 갈 수 있는 공간이 되었다. 극장도 예외는 아니어서 올해 초 코로나19가 확산세를 보일 때 예정되었던 수많은 공연들이 ‘사회적 거리두기’로 줄줄이 취소되었다. 생업을 이어나갈 수 없는 연극인들은 고민에 빠졌다. 이 시국에 연극을 어떻게 해야 할까? 수많은 고민이 현재도 진행 중이지만 많은 사람들이 선택한 것은 영상을 통한 온라인 공연이었다. 제3회 페미니즘연극제 참가작인 <공기의 딸들: 사랑이라는 가면을 쓴 폭력에 관하여>(연출 정안나, 극단 수수파보리, 여우 플라멩고)도 이 일환으로 제작된 작품이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다른 공연들이 어떻게 공연 자체를 관객들에게 영상으로 잘 전달할까를 고민했다면, 이 작품은 영상으로 어떻게 공연을 잘 보여주어 관객들을 극장으로 불러 모을 수 있을까를 고민한 작품이다. 영상을 활용했지만 지향하는 바가 정반대인 셈이다. 

<공기의 딸들> 스틸컷

이 작품의 목적은 크게 두 가지다. 사랑이라는 명분으로 자행되는 ‘데이트 폭력’을 다루는 것이 첫 번째이고, 공연을 영상으로 보여줌으로써 관객들을 극장으로 오게 만드는 것이 두 번째이다. 첫 번째 목적은 내용과 주제의 측면에 해당하는데, ‘데이트 폭력’ 자체는 새로울 것이 없지만 인어공주 콘셉트를 차용한 것은 매우 독특한 부분이다. 왕자를 죽이지 않고 스스로 물거품이 되어버린 안데르센의 ‘인어공주’를 모티프 삼아 여러 가지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데, 우선 인어공주가 본래부터 지니고 있던 목소리와 꼬리를 잃으면서 인간의 기준에 맞춰지는 모습을 역순으로 배치하면서 ‘뷰티’라는 장식물로 시각화했다는 점이다. ‘뷰티’는 세 가지로 구분된다. 물고기 비늘 같은 장식이 붙어 있는 얼굴 윤곽을 감싸는 장식물, 물고기의 눈처럼 볼록하게 튀어나온 안경처럼 생긴 장식물, 목 전체를 감는 은빛 장식물이 그것이다. 각각은 독특한 모양도 인상적이지만, 주인공인 아이가 세 가지의 장면에서 만나는 언니들에게서 하나씩 받아 합체되었을 때는 입만 뻐끔거리는 물고기의 형상이 된다. 인어공주가 자신의 것을 하나씩 버리면서 인간의 기준과 조건에 맞춰졌다면 <공기의 딸들>에서 ‘뷰티’를 하나씩 얼굴에 씌우는 아이는 인간에서 물고기로 변화해간다. 사랑과 관심이라는 명분으로 이루어지는 지속적인 폭력과 외부의 강요는 ‘뷰티’가 하나씩 몸에 걸쳐지는 것으로 시각화되었고, 이것이 합쳐져 물고기가 된 것은 상실된 주체성, 사라진 인간 존엄을 선명하게 보여주었다. 인간 자체를 옥죄고 사고를 마비시키는 폭력의 실체가 ‘뷰티’라는 이름을 가졌다는 역설은 우리 사회의 수많은 ‘뷰티’가 얼마나 강요된 것인지를 인지시켜준다. 

인어공주를 차용함으로써 효과를 본 두 번째는 각 장면의 표현 방법과 연결된다. 아이가 만나는 장면의 모든 인물들은 마치 목소리를 잃은 인어의 몸짓처럼 무용으로 감정과 의미를 전달했다. 부채, 지팡이, 꽃다발이라는 각각의 소품을 활용하여 데이트 폭력은 물론이고 여성이 겪는 일상적 폭력을 보여준 ‘#인어1 괜찮아, 사랑일거야’, ‘#인어2 이게 평등이야?’, ‘#인어3 매일 꽃을 선물 받는 여자’ 속 세 인물은 강약을 조절하고 긴장과 이완을 효과적으로 창출하여 몸짓만으로도 어떤 감정인지를 표현했고 각 장면의 의미를 부각시켰다. 극장 공간에서 만난 세 인물(처용의 아내, 카르멘, 조르주 상드) 역시 각각의 성격에 부합되는 춤으로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배우 개인의 몸짓도 아름답고 인상적이었지만 가장 좋았던 것은 작품의 마지막, 건물의 옥상에서 모든 출연진과 스태프가 어떠한 꾸밈도 없는 민낯으로 한데 어우러져 자유롭게 춤을 추는 것이었다. 공감과 연대를 구구절절한 설명 한 마디 없이 몸짓과 표정으로만 구현한 최고의 장면이었다. 모든 사람이 그렇게 어우러져서 함께 춤추고 환하게 웃을 수 있는 세상. 인어공주가 바랐던 것, 물거품을 선택한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었던 것이다. 

<공기의 딸들> 스틸컷

<공기의 딸들>의 부제는 ‘사랑이라는 가면을 쓴 폭력에 관하여’이다. 즉, 데이트 폭력을 집중적으로 다룬다는 의미인데, 실제 구성된 장면들은 데이트 폭력이라는 것에 수렴되지 않는 것들이 있었다. 대표적인 것이 아이가 극장 공간에서 만나는 세 여인이다. 예술 작품 속 대표적 팜므파탈인 카르멘이 열정적인 춤을 추면서 자신의 입장을 이야기하고, 남장으로 유명한 프랑스 작가 조르주 상드가 자신에게 덧씌워진 왜곡된 시선들을 이야기한다. 가장 처음 등장한 처용의 아내는 자신이 처용에게 마음을 줄 수 없었던 이유를 말한다. 세 인물은 그 자체로 매우 흥미롭다. 특히 처용의 아내는 지금껏 한 번도 예술작품 속에서 제 모습을 보여준 적이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그 자체로도 주목할 만하다.

그런데 이 세 인물이 데이트 폭력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 어떻게 직접적으로 연결이 되는지는 의문스럽다. 역사적으로, 예술적으로 왜곡된 여성에 대한 재인식은 될 수 있지만, 이들에게는 #1, #2, #3의 인어들이 보여주는 ‘사랑이라는 가면을 쓴 폭력’을 발견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공기의 딸들>은 내용적으로 1부와 2부로 구분이 되었다. 뷰티를 아이에게 씌워주는 인어의 이야기가 1부, 아이가 세 여인을 만난 후 뷰티를 하나씩 벗게 되는 2부. 데이트 폭력과 관련된 것은 1부이고 2부는 그것을 극복하고 치유하는 과정으로 전개되었다. 폭력의 양상과 치유를 함께 담아내는 의도는 이해되지만 가스라이팅 등으로 본인 스스로 인식하지 못하는, 부제 그대로 사랑이라고 믿어버리는 폭력에 대해 조금 더 집요하게 파고들어 인물을 배치하고 장면을 구성했으면 어땠을까? 대사보다는 춤을 통해, 마치 시를 쓰듯이 만든 장면들의 추상성과 상징성이 역사와 예술 속 인물들로 쉽게 치환되어 단순해졌다는 것은 아쉬운 지점이다.

<공기의 딸들> 스틸컷

이제 두 번째 목적, 즉, 공연을 영상으로 보여주어 관객들이 극장을 찾아오게 만들겠다는 목적을 얼마나 성실히 수행하고 있는가를 살펴볼 차례다. 카메라는 아이의 행적을 따라간다. 아이가 두려워하며 머무른 곳은 신촌문화발전소이고, 불안한 발걸음은 이 공간의 곳곳을 누빈다. 각 층에서 마주한 언니들은 제각각 데이트 폭력에 시달리거나 갖가지 성희롱의 언어 속에 고통 받거나 아름다움이라는 기준에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 장면들을 거친 후 아이가 도달한 곳은 지하의 공연장이고, 그곳에서 3명의 여인을 만나고 아이는 ‘뷰티’를 벗게 된다. 이러한 과정을 공연이라고 상상한다면, 이 작품은 인물을 따라 관객이 여러 공간을 옮겨 다니기 때문에 ‘장소이동형 이머시브 씨어터’가 될 것이다. 신촌문화발전소라는 건물, 그 건물 안을 옮겨 다니며 곳곳에 배치된 장면들을 관람하고 궁극에는 옥상에서 함께 어우러지는 과정은 상상만으로도 즐거운 이머시브 씨어터의 관극 활동이 된다.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한 관객 참여의 연극을 영상을 통해 그 참여의 과정을 보여줌으로써 극장에 대한 기대와 그리움을 불러일으킨다는 목적이 뚜렷하게 드러나는 부분이다. 

그러나 이러한 의도가 제대로 효과를 보였는가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다. 장소이동형 이머시브 씨어터의 경우, 실제로 관객은 공간을 이동하는 인물을 따라 달라지는 공간을 관찰하는 데 집중하기 때문에 자신을 이끄는 인물의 심리를 따라가기 어렵다. 각기 다른 공간 속에 마주하는 장면 또한 관객이 어느 위치에 서 있느냐에 따라 집중도가 달라진다. 즉, 눈앞에서 펼쳐지는 연극적 장면보다는 현재 서 있는 공간 자체가 더 중요한 관객도 있다는 말이다. 관객에게 부여된 근원적 권한인 ‘선택적 관극’. 무대 위에 혹은 눈앞에 펼쳐지는 장면에서 제작진의 의도와 상관없이 관객이 보고 싶은 것을 보는 ‘선택적 관극’이 이 작품에서는 실현되지 못했다. 이것은 카메라가 갖는 근본적인 한계이기도 한데, 첫 장면에서 불안한 표정으로 등장한 아이의 얼굴을 클로즈업하는 카메라는 관객의 시선을 제한하고 오로지 카메라와 일치하기를 암묵적으로 강요한다.

아이가 계단을 오르내릴 때 흔들리는 앵글, 엘리베이터를 탈 때 인물이 아닌 버튼을 비추는 비스듬한 각도, 각 공간을 마주할 때의 긴장감을 표현하기 위해 좌우로 이동하는 앵글 등 카메라는 세밀하게 아이의 감정을 전달하고 있고, 관객들도 그 감정을 적극적으로 느끼며 관극을 하게 된다. 이렇게 잘 촬영되고 철저하게 계산된 영상을 카메라의 시선으로 따라가는 과정 속에서 관객이 선택적 관극을 할 수 있는 여지는 없었다. 그렇게 세밀한 시선을 따라가다 보니 극장에 대한 그리움이 생성되기보다는 잘 만든 영상 한 편을 본 만족감이 더 컸다. ‘공연을 잘 보여줄 수 있는 영상’을 통해 극장에 관객을 불러 모으고 싶다는 이 작품의 목표와 의지는 ‘장소이동형 이머시브 씨어터’라는 콘셉트를 통해 잘 보여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카메라라는 어쩔 수 없는 매체의 성격 때문에, 그리고 매우 잘 만든 영상 때문에 아이러니하게도 그 목적을 제대로 성취하지 못했다. 이 작품을 통해 신촌문화발전소라는 건물은 샅샅이 보게 되었지만 너무 세세히 잘 보여주었기에 그곳이 궁금하지 않은 결과를 낳은 것이다. 

<공기의 딸들> 스틸컷

카메라 자체가 갖는 한계를 감안한다면, <공기의 딸들>은 신촌문화발전소를 근거로 삼은 장소이동형 이머시브 씨어터이며, 일상적으로 행해지는 데이트 폭력의 피해와 치유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이 작품의 모티프로 삼은 ‘인어공주’는 필자 개인적으로 ‘성냥팔이 소녀’와 함께 가장 슬펐던 동화였다. 어쩌다 놀러 간 바닷가에서 물거품을 보노라면 혼자서 괜히 슬퍼졌던 것도 물거품이 되기로 선택한 인어공주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저 물거품이 인어공주이겠거니 하며 쓸데없이 감정이입을 했던. 그런데, 실상 안데르센이 살던 시기에 공기에 대한 인식은 지금과 달랐다는 것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 안데르센이 인어공주를 물거품으로 만든 것은 실존의 불완전함을 극복한 완전한 형태를 지향했기 때문이었다. 왕자의 사랑을 얻지 못한 인어공주의 선택은 왕자를 죽이는 대신 사랑과 현실에 얽매이지 않는 완전함을 지향한 것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거품에 대한 개인적인 슬픔은 그렇게 치유되었는데, <공기의 딸들>에서 그것을 담아냈다는 것이 매우 반가웠다. 마치 완전한 상태인 공기가 된 인어공주처럼 일상의 폭력을 극복하고 치유하면서, 또한 약한 존재끼리 서로 연대하고 공감하며 스스로 공기의 딸들이 되자는 메시지가 지금의 현실과 직접적으로 맞닿아 있었다. 비록 영상이라서 직접 그 흥겨움을 느끼지는 못했지만, 이 작품 때문에, 옥상에서 한껏 자유로운 공기가 된 사람들처럼 마스크 없이, 감염 걱정 없이 그렇게 공기가 될 수 있는 날이 다시 왔으면 하는 바람이 간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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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이 좋아서 평론으로, 드라마투르그로 연극판을 어슬렁거리는 연극매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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