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영화를 읽다
디지털 성범죄의 상처를 딛고 살아남은 혜원이들에게
< K대_OO닮음_93년생.avi >
루나 / 2020-06-18
정혜원|2019|드라마|한국|24분|청소년관람불가 |
남성의 서술에 따라 목에 점이 있는 여성, 민소매를 입은 여성이 비춰진다. 영상 속 피해 당사자인 혜원(신지우)뿐만 아니라 누구나 이 범죄의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걸 보여주는 듯했다. < K대_OO닮음_93년생.avi >(정혜원, 2019)는 모든 불법촬영물, 불법유포물에 정면승부를 던지는 쇼킹한 제목이다. 감독은 영화를 보는 사람들이 주인공에 대한 불법촬영을 보는 것 같은 찝찝함을 느끼길 바랐다고 한다. 감독이 자신의 이름을 주인공에게 부여한 것은 디지털 성범죄 피해자를 대상화하지 않으려는 노력이었을까?
전 남자친구이자 가해자인 지호(김재훈)는 피해자인 혜원에게 탄원서를 써달라고 회유하려 한다. 우리 좋았던 때도 많지 않았냐며 꽃을 주고 사랑 고백이라도 하는 듯한 분위기를 풍긴다. 하지만 이내 자기 뜻대로 되지 않자 “너도 할 때는 좋아서 했잖아”라며 주인공에게 폭언을 퍼붓는다. 성관계를 할 때는 당연히 좋았을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이 영상물로 인터넷을 떠돌며 불특정 다수가 보고 품평하고 신상정보를 찾아내길 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특히 영상 속 여성이 어떻게 소비되는지는 영화 첫 장면에 여실히 드러난다.
< K대_OO닮음_93년생.avi > 스틸컷
‘유출’이라는 이름이 붙은 불법촬영물, 불법유포물은 다른 영상보다 더 잘 ‘팔린다’. 연기가 아니라 실제로 하는 거니까 더 ‘꼴린다’는 것이다. 이러한 영상을 보고 퍼 나르는 이들은 일말의 죄의식도 느끼지 않는다. 그렇기에 2016년 디지털 성범죄의 온상이었던 ‘소라넷’ 사이트가 폐쇄되었어도 너무나도 쉽게 장소를 옮겨 다시 활동하는 것이다. 버닝썬 게이트와 텔레그램 n번방, 박사방 성착취 사건과 같이.
대검찰청의 2019 범죄분석에 따르면 성폭력범죄 발생건수의 구성비 중 지난 10년간 가장 급격히 증가한 범죄는 ‘카메라 등 이용촬영’이다. 2009년 전체 성폭력범죄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4.8%였던 것이 2018년 무려 19.0%까지 증가한 것이다. 대검찰청은 불법촬영이 급증한 이유를 스마트폰 등 전자기기 사용의 보편화로 인한 범죄의 증가와 성폭력범죄에 대한 사회적 인식의 변화, 피해 신고의 증가에 두고 있다. 그것이 전부일까? 해외 사이트라 가해자를 잡을 수 없다는 식의 미온한 대처와 불법촬영에 대한 최대법정형이 고작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3000만 원 이하의 벌금이라는 사실도 디지털 성범죄를 쉽게 저지르는 데 한 몫 했을 것이다.
< K대_OO닮음_93년생.avi > 스틸컷
전국민적 공분을 산 텔레그램 n번방 성착취 사건이 연일 보도되고 나서야 국회에서 디지털 성범죄 관련법이 개정되었다. 2018년 익명의 여성 30만 명이 ‘불법촬영 편파수사 편파판결’ 규탄 시위에서 목 놓아 외쳐도 꿈쩍 않던 국회가 26만 명의 디지털 성폭력 가해자가 수면 위로 드러나고서야 움직인 것이다. 신설조항이 생기고, 처벌의 수위는 높아졌다. 그러나 한편에선 가해자의 행위에 분노하고 처벌의 목소리를 드높이고 있는 반면, 다른 한편에선 유해 사이트 검색순위에 ‘텔레그램’이 오르는 것이 현실이다.
디지털 성범죄의 피해자들은 불법촬영물이나 불법유포물에 대한 삭제 지원을 받기 위해서 피해지원센터에 본인이 직접 영상이나 URL을 보내야 한다. 혜원이 그러했듯 말이다. 수사와 재판이 진행되는 과정에서도 영상 속 사람이 자신이라는 것을 확인시켜주어야 한다. 때로는 경찰, 재판부와 함께 영상을 봐야 하는 상황도 있다. 영상이 더 이상 유포되지 않게 하고, 가해자를 처벌하기 위해 피해자는 계속 그 상황으로 불려가야만 한다. 가장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 가장 원하지 않는 일을 해야만 하는 모순이 발생하는 것이다.
< K대_OO닮음_93년생.avi > 스틸컷
혜원은 일터에서, 역에서, 길에서 끊임없이 남성을 경계하게 됐다. 집이 아닌 장소에서 탈의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 됐고, 집에 와서는 빨래해둔 속옷이 다 있는지 개수를 확인해야 했다. 피해 영상 URL을 직접 수집하여 삭제를 요청하고, 삭제 비용을 감당해내야 했다. “저 누나 누구 닮지 않았어? 어디서 본 것 같은데…”라는 말에 심장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기분을 느껴야 했다. 아무 잘못 없는 피해자가 왜 모든 것을 감내해야 하는 것일까? 그리고 이 사회는 왜 피해자의 취약성을 당연시하고 고립되도록 내버려 두는 것일까?
지호는 혜원에게 “우리가 어떻게 할 얘기가 없냐”라고 말한다. 그렇다. 사실 피해자는 해야 할 이야기가 너무도 많다. 내가 어떤 피해를 입었는지, 그로 인해 얼마나 심각한 정신적 스트레스와 트라우마를 겪고 있는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일상을 살아내고 있는지. 그런 피해자의 입을 막은 것은 가해자와 방관자인 이 사회였다. ‘너만 가만히 있으면 모두가 편해’.
< K대_OO닮음_93년생.avi > 스틸컷
일반적인 범죄에서는 피해자를 탓하거나 범죄 사실과 관계없는 피해자의 평소 행실을 문제 삼지 않는다. 피해자가 피해 사실을 명확히 알리고, 가해자로부터 보상받는 것은 당연지사이다. 가해자는 자신이 저지른 범죄에 대한 마땅한 책임을 져야 한다. 그런데 유독 성범죄의 경우 온 사회가 나서서 가해자를 보호하려 든다. 그가 평소에 얼마나 건실한 사람이었으며 앞날이 창창한지를 앞 다퉈 말한다. 이러한 사회의 보호망 안에서 가해자는 마음껏 피해자에게 n차 가해를 한다. 지호가 혜원에게 “네 앞에서 죽을까? 네가 안 도와주면 나 자살해야 돼”라며 피해자에게 죄책감을 전가하는 것처럼 가해의 방식은 다양하다.
사람들은 쉽게 말한다. “그러게 조심했어야지”, “조심하지 않은 것도 자신을 못 지킨 거야”. 성범죄가 조심해서 일어나지 않을 수 있는 일이라면 세상에는 성범죄가 없어야 한다. 성범죄가 조심하지 않아서 일어난 일이라면 왜 여성에 대한 성범죄율만 압도적으로 높은 것인가? 여성은 살아 숨 쉬는 동안 매일 조심하고 또 조심한다. 가장 편안해야 할 집에서도, 믿고 있는 사람과 함께하는 그 순간까지도. 얼마나 더 조심해야 하는 걸까?
화장실에 간 혜원은 불법촬영 카메라를 발견한다. 유심히 보던 혜원은 가방에서 눈썹칼을 꺼내든다. 덤덤하게 카메라를 제거하며 화면은 페이드아웃 된다. 놀라지도 않고 단호한 손길로 카메라를 제거하게 되기까지 혜원의 마음은 몇 번이고 무너져 내렸을 것이다. 그럼에도 자신과 같은 피해자가 생기지 않도록 행동하는 혜원. 디지털 성범죄를 주제로 한 또 다른 단편 영화 <비하인더홀>(신서영, 2019)을 생각나게 하는 결말이었다. 가해자를 단죄하기 위한 행동에 앞장서는 혜원과 <비하인더홀>의 정희. 그들은 더 이상 피해 속에만 남아있지 않을 것이다.
PURZOOMER
안양여성의전화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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